장소성이 무시되는 사회, 장소의 소중함을 추억하며


1.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2가, 그 ‘장소’에 관한 추억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청파동 능안길 63에 자리잡은 막달레나의집. 지금은 제법 사람이 사는 집 같다. 하지만 이사 오기 전의 한강로2가 시절의 막달레나의집을 기억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사람이 산다고 하기에는 가히 심난하고, 이른바 ‘사회복지시설’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지 의심스러웠던 공간. 누군가는 그랬다. ‘이리로 들어간 사람이 저 문으로 나오고, 저 문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거실이 나오는’가 하던 참 요상한 구조의 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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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대문의 막달레나의집
_ 심난하고 남루했지만 삶의 의미로 가득찬 공간.

막달레나의집에서 살다 하늘나라로 간 사람들의 사진이 가득 놓여 있던 다락방, 단체 대표인 ‘큰언니’는 마루를 집무실로, 접대실로, 식당으로, 침실 등으로 절묘히 용도변경하며 살았고, 책상 하나를 두셋이 나눠쓰던 실무자들은 밤샘을 하는 날이면 1평짜리 사무실에서 다리를 구부린 채 쪽잠을 자고, 식구들은 달랑 두 개 뿐인 방에서 누가 화장을 하는지, 누가 변비로 고생하는지, 누가 무슨 사연으로 잠꼬대를 하는지, 누구와 연애를 하는지 훤히 다 아는 일상을 보냈다. 식구가 많아질 때면 칼잠을 자야 했고 그나마도 부엌에 가는 사람, 화장실로 가는 사람들의 통로가 되어 자다가도 종종 발을 들어줘야 하던, 뭐 대충 그렇게 남루한 공간이었다.

봄이면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고, 그 아래에서 사람들은 한낮에는 솥단지 비빔밥을, 비오는 날에는 똑똑 떨어지는 빗물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둘러 앉아 수제비를 떼어 먹고, 밤에는 삽겹살 판을 벌려 갓 들어온 새식구고 나이 지긋한 신부님이고 간에 둘러 앉아 소주잔을 나누던 추억. 그 집의 뒷마당은 그렇게 파티 장소가 되었고, 서로서로 담배를 나눠 피우며 묘한 연대감으로 고민을 나누던 아지트이기도 했다. 물론 때때로 누군가의 머리끄덩이를 잡히기도 했고, 양동이가 날아다닌 적도 있었다. 이 공간이 폐쇄되지 않고 그 오랜 시간 잘 유지된 건 참 요행이 아닌가 싶다.

2. 장소의 힘/장소 상실 혹은 무장소성의 폭력성

“새 집을 짓는다거나 새로운 땅에 정착한다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일로서,
세계를 다시 세우는 것과 맞먹는다.”

한평생을 이 집에서 보낸, 여자 밝히기로 유명한 못생긴 강아지 ‘브랜디’가 저 세상으로 간 이후에는 누런 동네 강아지가 그곳이 제 친구집이나 되듯 코로 대문을 밀고 들어와 한참이나 늘어지게 자다 가곤 했고, 정신분열 증세가 심하던 효정이는 그 강아지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냈다. 간혹 옥상 장독대에 올라가 서울 시내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던 건 덤으로 즐기는 서비스. 지금도 그 때의 식구들을 만나보면 불편한 잠을 자야 했던 기억은 쏙 빼고 목련 아래 둘러 앉아 울고 웃고 나눠 먹고 지지고 볶았던 추억만 늘어놓으며 깔깔깔 웃는다.

돌아보니 그것은 장소의 힘이었다. 그 심난한 장소에서 여성들은 원 없이 울고 웃었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제 발로 그 의심스러운 장소로 되돌아오기를 몇 차례나 반복하며 자기 삶의 기적을 이뤄내곤 했다. 차별과 배제에 익숙했던 여성들은 그 장소에서 배려 받고 수용되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되었고, 거부와 경계로 자신을 지키던 여성들은 비로소 자신을 열고 낯선 세계와 조우하며 성장했다. 누군가에게는 재개발의 보상 ‘물건’일 뿐이었던 그 공간이 그렇듯 우리에게는 절실한 삶의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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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한강로 철거 현장
_
삶의 의미로 가득 찬 장소가 상실되는 폭력성의 흔적.

물론 지금도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서 또 다른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지금의 인연은 그 때의 인연만 못한 것 같고, 비오는 날의 수제비 잔치나 삽겹살 잔치판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이제 추억이 서린 그 용산 한강로2가의 녹색 대문 ‘집’은 없다. 늦봄 어느 날, 궁금한 마음에 들여다보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흉흉했고, 그 아름답던 목련 잎만 ‘똥 닦은 휴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그 집은 우리가 이사 나온 뒤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너무 낡아서 이기도 하지만 이제 곧 철거가 될 용산 땅 한 켠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쏘다니던 한강로2가의 그 골목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남일당에서 어느 식구의 아기 돌반지를 사며 내가 아기를 낳은 듯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던 기억, 요가를 배우면 살이 빠질까 들렀던 요가학원에서 사범님 배가 너무 나와 여기는 안 되겠다며 돌아 나오던 기억, 그 인근의 술집들을 쏘다니며 우리끼리 한 잔 할 때면 킥킥 웃으며 “큰언니 나빠요~”, “그럼 니가 대표하던가!”라고 흉내를 내거나 뒷담화를 나누던 기억들… 지금 그곳들은 다 없다. 다만 남은 것이라고는 2009년 1월 20일의 잔인했던 흔적들뿐이다. 폭력적인 장소유실의 불합리함에 대항하는 매일의 절실한 의식과 화마가 남긴 곳곳에 아직도 배어 있는 누군가의 아련한 삶들.

3. 장소를 바라보는 정직한 목격자 혹은 참여자

“즐기기보다는 참아야만 하고 무시해야만 하는 환경에서 사는 것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하는 것이다.”

나치 독일에 의해 자신의 마을이 파괴된 경험을 지닌 한 여성은 남편의 죽음이나 자식들과의 이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겪은 최대의 충격은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발견한, 폐허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마을 풍경이었다. 정부의 개발정책에 의해 거주하던 집을 몰수당하며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주민 집단의 반응을 연구한 정신과 의사인 마크 프라이드(Marc Fried)는 그들 대부분 “고통스러운 상실감… 계속되는 갈망… 절망감… 그리고 잃어버린 장소를 이상화하려는 경향과 슬픔” 같은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히로시마 생존자 중 한 명은 폭격 이후의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물론 나는 그 이후에 많은 끔찍한 장면들을 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 경험,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히로시마의 모습을 발견했던 그 언덕에서의 경험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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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휩쓴 남일당 건물과 성매매집결지에 들어설 쌍둥이 빌딩
_ 의미 없는 장소들의 재편.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지금도 버스를 타고 종종 용산 한강로를 지날 때가 있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철거로 흉흉한 모습이 된 남일당 건물 등이 보이고, 도로 건너편으로는 용산 민자역사를 사이에 두고 성매매집결지의 업소들이 한낮에도 붉은 등을 밝히고 있다. 나는 어느 한쪽으로도 시선을 제대로 두지 못한다. 아니 그 구간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쿵쾅거리곤 한다. 하물며 그곳에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묻어야 했던 사람들은 오죽할까. 얼마 뒤면 건너편 성매매집결지 일대 역시 같은 운명이 될 터. 세상의 손가락질을 감수하며 그곳을 자신의 일과 삶의 터전삼아 살아온 여성들도 자신의 소중한 장소가 유실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삶의 근원을 무시한 채 의미 없는 장소들이 획일적으로 재편되는 시대에 남루하지만 소중했던 우리의 장소들을 추억하는 일이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다. 과연 누구를 위한 재개발일까. 자본의 담합에 의지하며 장소를 쓸어버리는 자들이 빈곤했으나 부유했던 우리네 삶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내 시간과 장소의 정직한 목격자”가 되고자 『장소와 장소상실』을 쓴 에드워드 렐프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장소를 빼앗기고 장소에서 뿌리 뽑힌 사람들의 항의’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장소는 그렇듯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며,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이며, 곧 세계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소를 잃은 사람들의 외침이 무시된 채 진행되는 여전한 재개발 정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가 아닌 곧 물질로 존재되는 현실을 여실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단 하루도 ‘개발’의 망치질로부터 자유로운 날이 없는 이 대한민국에서 의미로 가득 찬 장소를 간직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처절히 실감되는 요즘이다.
알라딘 링크
2009/11/04 10:28 2009/11/04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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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야지 2009/11/04 12:03

    잘 읽고 갑니다.

    • 그린비 2009/11/04 13:29

      도야지님, 감사합니다.

  2. stems 2009/11/04 12:19

    너무 좋은 글이네요..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09/11/04 13:31

      stems님, 감사합니다.

  3. 들풀 2009/11/06 12:47

    진정성이 담긴 좋은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09/11/06 14:08

      들풀님, 댓글 감사합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또 느끼는 부분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