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개념이 당신의 삶이고 세계이다

고병권 (수유+너머 R)

1. 개념은 당신의 생존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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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어총서 WHAT 가이드북
_ 본 글은 『개념어총서 WHAT 가이드북의 서문으로 수록된 글입니다.
우리의 일상 대화에서 시작해보자. 도무지 개념이 없는 친구군! 이번 전시 컨셉이 뭐야? 이번 광고는 컨셉이 제대로 먹혔어! 철학적으로 따져보면 한 없이 골치 아픈 단어일 것 같은, 이 ‘개념(Begriff, concept)’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무런 두통 없이 일상에서 사용한다. 요즘 ‘신개념’ 창조에 목을 매는 사람은 철학자가 아니라 정보, 마케팅, 디자인, 광고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철학의 과업은 개념의 창조에 있다”고 말했던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가 이제 “철학의 치욕이 바닥까지 드러났다”고 한 것도 이해가 간다. ‘개념’이 전시장에 진열된 상품과 같고, 그 상업적 성공 여부가 ‘비평’을 대신하는 시대에, 독자들은 <개념어총서>를 발간하고, 다시 개념에 대해 묻고 생각해보자는 우리의 제안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개념이란 무엇인가. 자사 제품의 TV 광고 시안을 본 사장의 말에서 시작해볼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는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이 광고 컨셉이 뭐야?’ 그가 보기엔 그냥 잡다하게 나열되어 있을 뿐 어떤 통일성도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구성 요소들을 가로지르는 어떤 일관성, 각 요소들에 다 들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 요소들 사이를 왕복하고 있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없을 때, 우리는 컨셉을 발견하지 못한다. 개념(Begriff)이 없다는 것은, 한마디로 거기에 배열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begreifen) 없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자에게 가보자. 칸트는 말할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개념이 없다면 그것은 한 무더기의 잡다한 인상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둥근 모양과 빨간색, 달콤한 향기, 시큼한 맛, 만질만질한 감촉 등 한 무더기의 인상들이 떠올라도 그것을 ‘사과’라는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해내지 못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것들이 ‘사과’를 나타낸다는 것을 아는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을 파악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잡다한 인상들을 통일하는 규칙을 우리의 지성은, 말 그대로, ‘생각해낸다’. 놀라운 것은 ‘사과’가 아니라 ‘지성’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인식한 ‘사과’는 사물로서의 사과 자체가 아니라, 우리 지성이 생각해낸 규칙에 따라 우리 앞에 나타난 사과다. 우리는 우리가 파악하는 방식대로 나타난 사과를 파악하는 것뿐이다. 개념은 자연이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자연에 부과한 것이다. 개념이란 우리 지성이 생각하고 부여한 통일성이다. 자연에서 우리가 어떤 통일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사실 우리가 먼저 집어넣은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약간의 조롱을 섞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물건 하나를 덤불 뒤에 숨겨 놓은 다음 그것을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발견한다면, 이 일에 칭찬할 만한 구석이 있을까.” “모든 법칙성은 근본적으로 우리 자신이 사물들에 붙여놓은 특성들과 일치하므로,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경탄해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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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세잔 作 <Still Life with Apples>
_ 세계역사상 유명한 사과 세개가 있다. 첫째는 이브의 사과, 둘째는 뉴턴의 사과,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폴 세잔과 동시대 화가 모리스 드니는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껍질을 벗기고 싶지 않다. 잘 그리기만 한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하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고 말했다.

니체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그에 따르면 경험에 대한 통일된 표상은 인간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에서 생겨난 생존 방식이다. 뿔도 없고 강한 이빨도 없는 인간이 지성을 통해 개념을 형성하지 못했다면 살아남을 수나 있었을까. 가령 세상의 어떤 ‘버섯’도 동일한 것은 없지만 각 차이들을 망각함으로써 우리는 ‘버섯’이라는 개념을 형성한다. 직관적으로는 서로 다른 버섯들이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똑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어제 독버섯을 먹고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서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어제 그것과 ‘똑같은 것’임을 파악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숲 속에서 호랑이를 보고 -물론 어제 만난 호랑이와 조금 다르지만- 그것이 호랑이임을 너무 늦게 생각해낸 사람은 어떻게 될까. 그들의 생존가능성은 아주 희박할 것이다. 우리는 대충 같게 보고 대충 다르게 본다. 좋고 말고를 떠나서 이것이 우리의 생존 조건이다.

이 ‘대충 비슷하게’는 우리가 여러 번 교정을 본 문장에서도 오자가 나오는 이유이면서(우리는 매 글자를 읽지 않고 대충 단어나 문장을 읽기 때문이다), 동시에 ‘실체(substance)’와 같은 난해한 개념을 형성할 수도 있는 이유이다. ‘동일한 강물에 발을 담글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우리가 감각하는 것들은 매번 새롭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이런 개념이 가능하려면 오랫동안 사물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어느 정도 무시해야 한다. 즉 적절하게 위조하고 거짓말을 해야 한다. 우리의 지성이 놀랍다면 그것은 지성이 이 일에서 천부적인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형형색색의 인상들을 탈색시켜 하나의 개념을 만들고, 우리의 행위와 삶을 거기에 연결시킨다.

2. 인간은 개념으로 자기 세계를 짓는다

‘사과’니 ‘버섯’이니 하는 말 때문에 개념이란 결국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사과’처럼 감각에 의존하는 소위 ‘경험적 개념’에서는 확실히 지성의 능력과 활동성, 더 넓게 말하자면 우리 사유의 능력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경험적인 것과 관련될 때 우리는 사물들의 질서가 미리 존재하고 우리의 인식은 거기에 부합해서 따라 나온다고 생각하기 쉽다. 인식의 틀이 우리의 창조물임을 인정치 않으려는 것이다.

물론 인식의 틀이 우리의 창조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경험에 선행한다는 걸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해둘 것은 그런 선험적인 인식틀도 사회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형성되어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주 이상한 말이지만, 그리고 칸트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선험적인 것도 역사를 갖는다. 그것은 천부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측정하고 파악하기 위해 전제하는 잣대들, 우리가 무언가를 보기 위해 먼저 갖추어야 하는 렌즈들도 분명히 창조되고 형성되어 온 것이다. 맑스처럼 말해보자면 우리는 우리의 전제 또한 창출해왔다. 우리 지성의 힘, 우리 사유의 능력은 이처럼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경험 이전에 오는 인식틀로서 개념을 생산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이 경우 개념은 사물에 대한 지시나 명명이 아니고, 사실이나 상황에 대한 묘사도 아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맑스의 ‘자본’, 니체의 ‘영원회귀’, 푸코의 ‘권력’, 석가모니의 ‘공’, 공자의 ‘인’, 노장의 ‘무위’ 등은 사물의 이름도 아니고 사실에 대한 기술도 아니다. 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이 존재하지 않으니, 개념은 명제와 달리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없고, 우와 열을 가릴 수도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각 개념이 구축하는 세계뿐이다. 이데아의 모사물로 존재하는 세계, 영원회귀하는 세계,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 세계 등등. 그래도 우리가 위대한 개념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다른 개념이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그런 개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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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 리카도, 맑스
_ 각자 고유한 '물음'을 던져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

개념이 무엇과 관계한다면 그것은 사물이나 상황이 아니라 ‘물음’일 것이다. 가령 스미스가 한 상품이 가진 부의 내적 척도를 물었을 때, 그는 주관적 편익이나 효용과는 다른 ‘가치[교환가치]’ 개념을 만들었고, 그 척도로서 ‘노동’을 제시했다. 리카도가 상품의 가치가 어디서 온 것이냐고 물었을 때, 즉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원천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노동’을 가치형성의 원천으로서 재개념화해야 했다.

곧 이어서 맑스는 가치의 교환도, 원천도 아닌, ‘가치의 증식’에 대해 물으면서 ‘자기증식하는 가치’로서 ‘자본’ 개념을 만들었다. 그는 스미스나 리카도로부터 ‘가치’나 ‘노동’ 등의 개념을 물려받았지만, 그 상속은 자신의 물음 안에서 그 개념들을 새롭게 변형시키는 한에서 이루어졌다. 가치증식에 대한 물음, 즉 ‘자본’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그는 가치 일반이 아닌 ‘잉여가치’를, 구체적 유용노동이 아닌 ‘추상노동’을 만들어냈다. ‘잉여가치’와 ‘추상노동’ 개념은 하나의 물음, 그 일관성 속에서 ‘자본’이라는 개념을 구성하고 있다. 여기서 스미스나 리카도, 맑스 중 누가 더 올바른 개념을 구성했나를 따지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개념은 각자의 고유한 물음 속에서 변형되어 전혀 다른 위상,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의 선고가 아무런 신체적 변형 없이도 한 인간을 ‘죄수’라는 특별한 존재로 바꾸어 버리듯이, 새로운 개념은 그 개념을 통해 파악하는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자본’이 가능한 세계는 ‘잉여가치’와 ‘추상노동’이 가능한 세계이고, 결국 ‘착취’가 일어나는 세계이다. ‘자본’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착취가 이루어지는 세계, 지양해야만 하는 세계로 바꾸어 놓는다.

정리하자면, 개념은 한마디로 당신이 살고 있는 세계이다. 만약 당신이 자본주의를 살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해 당신이 형성한 개념을 통해서다. 만약 당신이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먼저 당신이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당신은 당신이 형성한 개념에 따라 만족하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당신은 당신이 가진 개념에 따라 세계를 파악하고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꿀벌은 자신의 집을 밀랍으로 짓지만, 인간은 자기 세계를 개념으로 짓는다고.

3. 당신의 개념을 창조하라, 그러나 먼저 의심하라

개념이란 우리 식으로 변형된 세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변형되지 않은 참된 세계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세계는 있다 해도 알 수 없지만(변형시키지 않고서 우리는 알 재주가 없다), 대개의 경우 그것은 우리가 야기한 변형의 파생물이다. 가령 플라톤은 ‘이데아’를 ‘이 세계’를 위해 전제된, 그리고 ‘이 세계’가 모방하는 ‘저 세계’로서 상정했지만, 그것을 말하기 위해 그는 ‘이데아’ 개념을 먼저 창조해야 했다. 그리고 이 창조를 위해서 그는 기존의 인식틀, 기존의 개념들을 의심하고 바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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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_ 니체, "꿀벌은 자신의 집을 밀랍으로 짓지만, 인간은 자기 세계를 개념으로 짓는다."
하나의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파악하게 해주지만 동시에 우리를 그것이 구축한 세계 속에 가둔다. 개념이라는 말[concept, Begriff]에는 ‘붙잡다’, ‘낚아채다’는 말[-cept, -griff]이 붙어 있다. 개념은 우리에게 알려진 것 중 가장 유사한 기호로 어떤 것을 붙잡고 낚아채는 일이다. 이처럼 기존의 체험 형식 아래 새로운 체험을 포함시킬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파악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것을 그렇게 파악하는 것은 그것을 달리 파악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붙잡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그 전에 우리가 무언가를 그렇게 파악하도록 붙잡혔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틀, 우리의 개념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수대에 걸쳐, 어쩌면 수천 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며, 보통의 경우 개인은 그것에 대해 판단하지 않고 그것에 따라 판단한다. 자명한 사물의 질서란 오랜 시각 훈련을 의미할지 모른다. 어쩌면 이렇게 말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개념은 인류의 창조물임과 동시에 인류를 훈련시킨 결과이며, 자연에 대한 명령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명령이었다고.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국 어렸을 때 형성한 낡은 개념 아래서, 그리고 그것이 구축한 낡은 세계 안에서 평생을 어릿광대로 놀아날 것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해석한 세계에 사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권력’ 개념을 갖는 순간, 당신은 항상 그 권력과 대면하고 그 권력과 관계할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가진 ‘자유’ 개념 이상의 자유를 요구하지도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민주주의’ 개념을 가졌다면 당신은 그 민주주의 안에서 살고 있거나, 아니면 그 민주주의를 위해 싸울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새로운 세계를 열고 싶다면, 당신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야 한다. 개념을 창조하는 일이 당신이 살아갈 삶, 당신에게 도래할 세계를 부르는 일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나아가지 말자.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기 전에 당신의 낡은 개념들과 이별하는 것이 먼저다. 모든 창조하는 자들은 처음에 의심하는 자에서 시작한다. 당신이 가진 그 개념들, 거기서 충분히 멀어질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이번 <개념어총서>가 그 출발점의 동반자가 되길 바란다. 새로 시작하는 자가 내딛는 그 ‘삐딱한’ 첫 걸음,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개념어총서 WHAT> 관련 링크

2009/11/09 11:01 2009/11/0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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