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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의, 아니 원고의 제목은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부제가 원래는 제목이었다는 말씀이지요. 나름 내용을 정확하게 지시해 주는 제목을 두고 왜 굳이 별도로 제목을 지었느냐. 이 글을 읽고 있는 분 가운데 그냥 “재미있어 보이려고”, “딱딱한 책 아닌 척하려고”, “많이 팔아먹으려고”라고 단순히 생각해 버리는 분이 있다면… 전 정말 OTL. 저자와 출판사가 머리를 맞대고 책 제목을 결정할 때는 좀더 구체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좀더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책 제목 짓기의 원칙에 대한 내용이 궁금하시다면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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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 표지

우선, 이 책이 어쩌다 나온 단행본이 아니라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와 공동으로 기획해서 내는 ‘트랜스라틴’ 총서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라틴아메리카 관련한 내용이라고 트랜스라틴 총서에 속한 모든 책 제목에 ‘라틴아메리카’가 들어가면 그 책이 그 책 같아 독자 여러분은 구분하기도 어렵고, 총서 자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드러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동일 주제(즉 라틴아메리카)를 하나의 흐름(하나의 연구소, 하나의 출판사)을 갖고 소개하되, 한 권 한 권의 책이 독특한 색채를 뿜어내도록 하려면 그만큼 독특한 제목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이 어떤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린비의 출판행위를 쭈욱~ 지켜봐 주신 독자라면 당연히 “『한미FTA 보고서』를 낸 출판사에서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책은 낼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그 경험이 라틴아메리카 사회에 어느 정도의 충격과 위협으로 다가왔는지 좀더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이 필요했습니다.

브레인스토밍 1단계로 나온 제목은 이랬습니다.『위기와 변화: 신자유주의 20년, 라틴아메리카를 분석한다』, 『잃어버린 20년: 신자유주의는 라틴아메리카를 어떻게 피폐화시켰나』, 『메말라버린 미래의 대륙: 신자유주의 20년, 라틴아메리카는 어디에 서 있나?』, 『신자유주의 인베이젼: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 아직 제목 같진 않죠? 책 제목이 단번에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자꾸 짓다가 더 좋은 게 나올 때가 많은 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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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앙 살가도 作 <세라 페라다의 금광>(1986, 브라질)
_ 브라질 출신의 사진작가 살가도는 원래는, 엘리트 출신의 경제학자였으나
경제학 보고서작성을 위해 돌아본 민중의 참담한 삶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그들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려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어떤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그의 사진은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 줍니다.

일단 책의 컨셉과 키워드를 다시 점검해 보았습니다. 여전히 한국 독자들에게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수탈의 땅, 종속이론과 민중신학 정도를 떠올리게 하는 지역이었지요(아니면 보르헤스의 마술적 사실주의 정도?). 그러니까 분석보다는 주장과 이론과 사회운동의 느낌만 강했던 것이지요. 이 책은 달랐습니다. 저자가 신자유주의 “정책”이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각각 어떻게 펼쳐졌고, 어떤 효과를 냈는지를 다양한 통계자료, 인터뷰, 도표 등을 통해 꼼꼼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력산업과 에너지 산업의 민영화의 효과, NAFTA 체결 후 멕시코의 경제지표 변화 등은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자료가 아니었지요.

그러니 이론서보다는 “한국어로는 거의 최초로 쓰인, 라틴아메리카의 정치‧경제 정책연구서”로서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한미FTA 등 자유무역협정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효과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와 정치경제 분야 독자들을 위한 사례연구서”라는 점을 제목을 통해 전달해 보자고 욕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신자유주의란 어떤 신자유주의냐, 일단 민영화를 키워드로 잡아보았습니다. 라틴아메리카 대신 남미를 상징하는 키워드도 찾아보자 했지요. 그래서 나온 제목안이 『메말라버린 팜파스: 민영화와 양극화, 라틴아메리카의 20년을 분석한다』였습니다. 뭔가 이게 아니다 싶으시죠? 너무 이것저것 넣으려는 것을 모두 조합해서 이도저도 아닌 잡탕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말 그대로 OTL. 이 와중엔, 라틴아메리카 문제를 보기 드물게 풍부한 통계자료와 도표로 분석한 저자의 노고를 살려 “도표로 본~~” 류의 제목도 아이디어로 나오기도 했죠. 이렇게 막혀 있을 때 저자가 수줍게 보내 온 제목안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대홍수: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

대홍수…. 큰물을 뜻하는 홍수(洪水)만 해도 이미 물난리가 났다는 말인데 그 앞에 큰 대(大) 자가 붙었으니 그것은 보통 난리 이상의 의미입니다. 꼭 노아의 대홍수가 아니어도 “옛날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인류가 멸망하고 이후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었다”는 신화는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고대 수메르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날 옛적에 빙하기가 끝난 다음에 대홍수가 왔을 가능성이 높고,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홍수 설화를 찾아볼 수 있다는 과학적 설명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인류는 살아남았고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라틴아메리카의 이야기였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고에 휩쓸려, 거의 초토화되었다가 이제 재건의 몸부림을 시작한 곳. 책의 내용을 함축적이면서도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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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_ 세계 각국 대통령 중 현재 자국민들에게 가장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사람은? 미국의 오바마? 아닙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가져다 준 경제·사회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를 펼친 브라질의 룰라가 국민 80%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시행된 '신자유주의 극복 방법'이죠.

1980년대의 경제위기로 어쩔 수 없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고, 그 신자유주의의 효과로 경제 구조가 취약해진 결과 1990년대 2차 경제 위기를 맞은 후에 라틴의 민심은 우파 정부의 헛된 약속으로부터 돌아섰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 정권을 잡은 중도좌파 정부들은 풍부한 자원과 그간 축적된 사회운동의 경험 위에서 공공성 복원을 무기로 사회 재건에 나섭니다. 그들은 21세기 좌파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좌파는 말뿐이다, 무능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변신하고 있었습니다. 꽉 막힌 자국 중심주의를 버리고, 이웃끼리 연대하여 남미 경제블록화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턱 밑에서 새로운 중심을 창조하고 있었습니다.

뭐 이러면 이들이 무조건 잘하고 있다고만 칭찬하는 것 같은데, 이 책의 논의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40일간의 대홍수 뒤에 노아는 방주 바깥으로 까마귀와 비둘기를 날려 보냅니다. 새들이 푸른 잎사귀를 입에 물고 돌아왔을 때에야 상륙을 시도합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채웠던 큰물은 지금 막 빠지고 있을 뿐입니다. 꽤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저자 이성형 선생님이 이 책을 쓴 목적도 이념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을 칭송하자는 게 아닙니다. 1998년 IMF 위기 이후, 한국 사회 역시 급격하게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경쟁은 심화되었고 공공성은 폐기되었습니다. 첨예한 양극화는 경제위기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 구조 자체가 되었습니다. 한미FTA를 어서 체결하고, 신자유주의 무역 체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올지 모른다는 보수언론의 호들갑과는 반대로, 대홍수의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라틴아메리카의 지표와 한국의 지표를 비교해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도 라틴아메리카처럼 “대홍수”를 필연처럼 겪고야 푸른 잎사귀를 찾게 될까요?

- 편집2팀장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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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10:39 2009/11/17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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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혼琿 2010/02/20 20:48

    잘 읽었습니다. 이런 류의 편집 후기나 편집과 관련한 얘기가 많이 올라오면 재밌고 좋을 것 같습니다. ^^

    • 그린비 2010/02/21 23:39

      감사합니다. ^^ 편집후기는 책이 출간될 때마다 쓰려고 노력한답니다(?)ㅎㅎ 블로그에 포스팅되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들이 홈페이지 책 소개 페이지에 있으니 놀러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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