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3)
― 벨린스키와 그의 시대 (중)

최진석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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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리온 벨린스키(1811~1848)
_ 급진 개혁파를 자임하던 벨린스키가 어느 순간 체제 옹호의 극단적 이론가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셸링 철학에 강하게 매혹된 벨린스키에게 개별자와 보편자,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의 대립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칸트로부터 피히테, 셸링으로 이어지는 독일 철학의 흐름을 접하면서, 이러한 개념적 대립쌍들이 철학적 사유에 중대한 모순을 일으킨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적 논리'에 국한된 문제일 뿐 예술을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34~1836년 사이에 쓰여진 그의 초기 글들에서 벨린스키가 절대적 이상, 신적 이념과 미(美)의 본질이 완전한 보편성에 기초해 있음을 확언하며, 이 지상에서 보편성의 구현은 개별적 자아의 소멸로부터 이룩될 것이라 자신 있게 공언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별자의 무한한 행복은 오로지 보편자에 대한 사랑의 감정 속에 자아를 해소시킴으로써 보편자에 자발적으로 합치되는 길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이때 양자를 이어주는 매개는 예술이었고, 시(문학)였으며, 바꿔 말해 낭만주의 정신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행복한 화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1836~37년간 벨린스키의 삶은 낭만적 이상에 가득차서 보편 속에 아늑하게 안길 수만은 없던 것이었다. 늘 돈이 궁하던 그는 러시아어 문법책이라도 써서 국비 지원을 받아 보려 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던 검열관들과의 불화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고, 지병이던 폐결핵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37년 봄에는 돈을 꾸어서라도 남부 지역으로 요양을 떠나야 할 지경이었다. 궁핍한 개인사와 답답했던 사회생활은 '보편자에 전적으로 몸을 맡긴 행복한 개별자'라는 이상을 현실 속에 가져다줄 것 같지 않았다. 저열한 삶과의 충돌은 턱없이 높이 추켜세워진 이상과 이념 세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깊이 고민하도록 재촉했다. 벨린스키의 셸링 시대를 사로잡았던 이상적 예술관이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1838년 10월경 미하일 바쿠닌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그 시기 벨린스키를 애태우던 가장 중요한 물음은 그 자신이 세계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된 것은 아닌가, 위대한 이념이 실현되는 무대에서 버려진, 낯설고 우연한 존재자로 남겨진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석고화된 이론이나 몽상적인 꿈으로서의 비평을 거부하고 '현실의 비평'을 선언하였던 벨린스키에게 삶에 체화되지 않은 개념이란 무익한 것이었다.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전환점이 요구되었다. 예술 비평의 방편으로서 철학이 아닌, 철학 자체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좌절감을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 이제 벨린스키에게 모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철학, 몽상으로서의 삶(가상)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삶(진리)이 된다.

“정치경제학도 통계학도 필요 없다. 모든 단편적인 앎은 인간을 저속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상, 이념만이 전 세계적인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사상의 바깥에 있는 것은 전부 환상이요 꿈이다. 네 육체는 부패하고 말 것이지만 너의 자아는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환상이요 꿈이지만, 자아는 영원한 존재다. 자아를 탐구하는 철학이 앎의 시작이요 근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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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린스키의 서신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현실에 짓밟히고 모욕당한 이가 현실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치고 사상의 세계로 빠져들다니! 현실을 사상이라고, 사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벨린스키의 사상으로의 전환은 어떤 오해나 망상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상의 전환이자 이데올로기적인 전향이었다. 예술을 버리고 철학을 통해 세계 이념을 인식하겠다는 선언은, 그가 당대 러시아에서 가장 유력한 사상가였던 헤겔당(黨)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표였고, 벨린스키는 가장 급진적인 열혈당원으로 변신했다.

1837년을 기점으로 벨린스키의 언어는 온통 헤겔의 수사들로 장식되고, 헤겔의 논리학은 현실 판단의 최상위 기준이 된다. 러시아 최대의 예술 문학 애호가를 자처하던 벨린스키는 그 한 해 동안 아무런 비평 활동도 하지 않고 온전히 철학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헤겔당의 열성당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바로 『법철학』에 나오는 저 유명한 문구 -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는 ‘진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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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스탄케비치(1813~1840)
_ 벨린스키, 바쿠닌 등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과 함께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시인.
멀리 있는 이상 세계가 아니라 네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이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세계라는 헤겔의 명제는 당시 러시아 지성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취해진 현실의 합리성에 관한 명제는 현존하는 모든 것이 이성적 발전의 결과라는 사실 명제로 둔갑하였고, 이를 기화로 1830년대 후반 벨린스키를 필두로 한 일단의 서구주의자들이 ‘현실과의 화해’를 선포하며 진보주의를 포기하거나 배반하는 전향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현실의 궁핍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벨린스키가 이러한 ‘화해’를 맞아 느꼈던 감회가 어떠하였는지는 1839년 스탄케비치에게 보낸 편지에 잘 묘사되어 있다: “새로운 세계가 우리에게 열린 것입니다. 힘이 곧 법이요, 법이 곧 힘인 것입니다. 그것은 해방입니다! 나는 국가가 몰락하는 진정한 의미, 정복자들의 법칙을 이해했습니다. 여기엔 어떤 우연도 없습니다. ‘현실’이란 말은 내게 ‘신’과 같은 말이 되었습니다!”

화해란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승인이었다. 벨린스키를 비롯해 서구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증오하고 철폐해야만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농노제와 전제정도 세계 이성이 도달한 역사의 합목적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무조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편자는 개별자보다 언제나 옳고, 개별자는 그것을 자연법칙으로 인식하고 순응해야 한다. “사회와 화해하려 들지 않고 거기에 맞서 싸우려는 자에게 고통이 있으리니! 사회는 더 높은 현실성이어서 인간에게 화해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짓밟아 버리고 말 것이다.”

한때 ‘성난 비사리온’(비사리온은 벨린스키의 이름이다)이라고 불리며 극악무도한 러시아의 현실에 결단코 타협하지 말 것을 주창하던 계몽주의 투사가 어느새 그 ‘현실’에 대한 가장 투철한 이념적 옹호자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념과 보편성에 대한 총체적인 승인이 벨린스키가 겪었던 시대사적 고통과 그에 수반되던 계몽주의적 의무감도 덜어 주었던 것일까? 반(反)농노제를 다룬 희곡으로 퇴학당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정부의 검열과 감시, 탄압은 생활고와 더불어 그의 일상을 좀먹고 있었다.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고립된 영웅주의로는 현실의 단단한 벽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는 현실의 중압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라는 의무를 차라리 면제해 주는 좋은 구실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상적인/낭만적인 세계관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출로를 찾을 수 없던 그에게, 현실은 이성의 필연적 결과이며 따라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보편적 이념에 합치하는 행위란 논리는 다분히 ‘합리적’으로 생각된 게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벨린스키에게 화해는 심리적 좌절에 대한 (위선적) 보상책이 아니라, 오히려 (진심 어린) 논리적 결론에 가까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이해하고 견뎌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했고, 헤겔이 그것을 가르쳐 준 것 같았다. 현실은 ‘가장 위대한 학교’이며, 저항은 헛되다는 추악한 진실을. 이것을 ‘슬픈 화해’라고 부를 것인가?

벨린스키가 감행한 ‘현실과의 화해’는 러시아 문화지성사적으로 이른바 ‘40년대’ 인텔리겐치아들의 좌절과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철권통치하에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문학과 예술 비평, 철학 연구 등을 통해 정신적 자위행위에 몰두하였고, 이런 지적 유희는 어느 순간 냉엄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가부간의 선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든지, 혹은 폭주하든지. 다른 길은 없었고, 그들은 비장한 영웅주의로 떨쳐 일어나기보다는 차라리 논리의 궁지를 택했다. 현실에 패배했으나 철학은 완성되었다는 벨린스키들의 결론은 ‘이성의 간지(奸智)’로서 그들의 열정을 순간 진정시켜 주었으나, 그 잠시간의 평정은 곧 다시금 폭풍 같은 반항으로 전화되고 말 운명이었다.

2009/11/27 11:30 2009/11/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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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지은 2011/06/13 08:50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러시아 지성사에 대해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차아다예프로부터 시작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간의 논쟁과 40년대/60년대 인텔리겐치아들 간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 찾게 되어 기쁩니다.^^

    • 그린비 2011/06/13 09:36

      이지은님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내용을 찾으셨다니 저희도 기쁘네요.
      올해 근현대 러시아 문학과 철학을 소개하는 '슬라비카 총서'가 출간 예정인데, 이 시리즈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