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반서구주의에서 극단적 서구주의로
인문학 해외 통신/러시아 지성사 읽기
2009/11/27 11:30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 (1) - 차아다예프의 「철학 서한」편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 (2)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탄생 편
+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1) - '헤겔'과 러시아 편
+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2) - 벨린스키와 그의 시대 (상)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 (2)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탄생 편
+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1) - '헤겔'과 러시아 편
+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2) - 벨린스키와 그의 시대 (상)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3) ― 벨린스키와 그의 시대 (중)
최진석 (수유너머N)

비사리온 벨린스키(1811~1848)
_ 급진 개혁파를 자임하던 벨린스키가 어느 순간 체제 옹호의 극단적 이론가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_ 급진 개혁파를 자임하던 벨린스키가 어느 순간 체제 옹호의 극단적 이론가 자리로 옮겨 앉게 된다.
하지만 1836~37년간 벨린스키의 삶은 낭만적 이상에 가득차서 보편 속에 아늑하게 안길 수만은 없던 것이었다. 늘 돈이 궁하던 그는 러시아어 문법책이라도 써서 국비 지원을 받아 보려 했지만 사이가 좋지 않던 검열관들과의 불화로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고, 지병이던 폐결핵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37년 봄에는 돈을 꾸어서라도 남부 지역으로 요양을 떠나야 할 지경이었다. 궁핍한 개인사와 답답했던 사회생활은 '보편자에 전적으로 몸을 맡긴 행복한 개별자'라는 이상을 현실 속에 가져다줄 것 같지 않았다. 저열한 삶과의 충돌은 턱없이 높이 추켜세워진 이상과 이념 세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깊이 고민하도록 재촉했다. 벨린스키의 셸링 시대를 사로잡았던 이상적 예술관이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다. 1838년 10월경 미하일 바쿠닌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 보면, 그 시기 벨린스키를 애태우던 가장 중요한 물음은 그 자신이 세계의 진정한 본질로부터 소외된 것은 아닌가, 위대한 이념이 실현되는 무대에서 버려진, 낯설고 우연한 존재자로 남겨진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석고화된 이론이나 몽상적인 꿈으로서의 비평을 거부하고 '현실의 비평'을 선언하였던 벨린스키에게 삶에 체화되지 않은 개념이란 무익한 것이었다. 무언가 새롭고 획기적인 전환점이 요구되었다. 예술 비평의 방편으로서 철학이 아닌, 철학 자체에 관한 연구는 이러한 좌절감을 메우기 위한 시도였다. 이제 벨린스키에게 모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철학, 몽상으로서의 삶(가상)이 아니라 이념으로서의 삶(진리)이 된다.
“정치경제학도 통계학도 필요 없다. 모든 단편적인 앎은 인간을 저속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상, 이념만이 전 세계적인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 사상의 바깥에 있는 것은 전부 환상이요 꿈이다. 네 육체는 부패하고 말 것이지만 너의 자아는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환상이요 꿈이지만, 자아는 영원한 존재다. 자아를 탐구하는 철학이 앎의 시작이요 근원이 되어야 한다.”

벨린스키의 서신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다. 현실에 짓밟히고 모욕당한 이가 현실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치고 사상의 세계로 빠져들다니! 현실을 사상이라고, 사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다니! 하지만 벨린스키의 사상으로의 전환은 어떤 오해나 망상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사상의 전환이자 이데올로기적인 전향이었다. 예술을 버리고 철학을 통해 세계 이념을 인식하겠다는 선언은, 그가 당대 러시아에서 가장 유력한 사상가였던 헤겔당(黨)의 일원이 되었음을 보여 주는 증표였고, 벨린스키는 가장 급진적인 열혈당원으로 변신했다.
1837년을 기점으로 벨린스키의 언어는 온통 헤겔의 수사들로 장식되고, 헤겔의 논리학은 현실 판단의 최상위 기준이 된다. 러시아 최대의 예술 문학 애호가를 자처하던 벨린스키는 그 한 해 동안 아무런 비평 활동도 하지 않고 온전히 철학 연구에 매진함으로써 헤겔당의 열성당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렇게 '각고의 노력 끝에' 그가 도달한 결론은 바로 『법철학』에 나오는 저 유명한 문구 -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라는 ‘진리’였다.

니콜라이 스탄케비치(1813~1840)
_ 벨린스키, 바쿠닌 등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과 함께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시인.
_ 벨린스키, 바쿠닌 등 러시아 인텔리겐치아들과 함께 활동했던 철학자이자 시인.
화해란 무엇보다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승인이었다. 벨린스키를 비롯해 서구주의자들이 한결같이 증오하고 철폐해야만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치던 농노제와 전제정도 세계 이성이 도달한 역사의 합목적성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무조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편자는 개별자보다 언제나 옳고, 개별자는 그것을 자연법칙으로 인식하고 순응해야 한다. “사회와 화해하려 들지 않고 거기에 맞서 싸우려는 자에게 고통이 있으리니! 사회는 더 높은 현실성이어서 인간에게 화해를 요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짓밟아 버리고 말 것이다.”
한때 ‘성난 비사리온’(비사리온은 벨린스키의 이름이다)이라고 불리며 극악무도한 러시아의 현실에 결단코 타협하지 말 것을 주창하던 계몽주의 투사가 어느새 그 ‘현실’에 대한 가장 투철한 이념적 옹호자가 되어 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념과 보편성에 대한 총체적인 승인이 벨린스키가 겪었던 시대사적 고통과 그에 수반되던 계몽주의적 의무감도 덜어 주었던 것일까? 반(反)농노제를 다룬 희곡으로 퇴학당하고 갈수록 심해지는 정부의 검열과 감시, 탄압은 생활고와 더불어 그의 일상을 좀먹고 있었다.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고립된 영웅주의로는 현실의 단단한 벽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화해’는 현실의 중압에 대한 도덕적 저항이라는 의무를 차라리 면제해 주는 좋은 구실처럼 보였다. 게다가 이상적인/낭만적인 세계관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출로를 찾을 수 없던 그에게, 현실은 이성의 필연적 결과이며 따라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보편적 이념에 합치하는 행위란 논리는 다분히 ‘합리적’으로 생각된 게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벨린스키에게 화해는 심리적 좌절에 대한 (위선적) 보상책이 아니라, 오히려 (진심 어린) 논리적 결론에 가까웠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을 이해하고 견뎌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했고, 헤겔이 그것을 가르쳐 준 것 같았다. 현실은 ‘가장 위대한 학교’이며, 저항은 헛되다는 추악한 진실을. 이것을 ‘슬픈 화해’라고 부를 것인가?
벨린스키가 감행한 ‘현실과의 화해’는 러시아 문화지성사적으로 이른바 ‘40년대’ 인텔리겐치아들의 좌절과 한계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철권통치하에 자유롭게 정치적 의사표현을 할 수 없었던 지식인들은 문학과 예술 비평, 철학 연구 등을 통해 정신적 자위행위에 몰두하였고, 이런 지적 유희는 어느 순간 냉엄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가부간의 선택을 강요받았던 것이다. 체제에 순응하든지, 혹은 폭주하든지. 다른 길은 없었고, 그들은 비장한 영웅주의로 떨쳐 일어나기보다는 차라리 논리의 궁지를 택했다. 현실에 패배했으나 철학은 완성되었다는 벨린스키들의 결론은 ‘이성의 간지(奸智)’로서 그들의 열정을 순간 진정시켜 주었으나, 그 잠시간의 평정은 곧 다시금 폭풍 같은 반항으로 전화되고 말 운명이었다.
"러시아 지성사 읽기" 카테고리 글 모음
- 시대보다 너무 앞서 외로웠던 지식인, 라디셰프 (0)2010/03/12
- 헤겔에 대한 벨린스키의 열광과 결별의 스토리 (2)2010/02/05
- 러시아, 반서구주의에서 극단적 서구주의로 (2)2009/11/27
-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 '벨린스키'와 그의... (0)2009/10/23
- 서구주의·슬라브주의 논쟁사 - '헤겔'과 러시아 (0)2009/09/18
TAG 개별자,
계몽주의,
그린비,
그린비블로그,
그린비출판사,
논리학,
도서출판 그린비,
독일 철학,
러시아,
러시아 사상,
문학,
벨린스키,
벨린스키 사상,
변증법,
보편자,
비사리온 벨린스키,
사회,
서구주의,
셸링,
수유 너머,
수유 너머 N,
슬라브주의,
연구공간 수유 너머,
예술,
이념,
이데올로기,
인문,
인문학,
인문학 해외 통신,
인텔리겐치아,
지식인,
철학,
최진석,
헤겔,
헤겔당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러시아 지성사에 대해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차아다예프로부터 시작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간의 논쟁과 40년대/60년대 인텔리겐치아들 간의 확실한 연결고리를 찾고 있었는데 이 글에서 찾게 되어 기쁩니다.^^
이지은님 안녕하세요.
말씀하신 내용을 찾으셨다니 저희도 기쁘네요.
올해 근현대 러시아 문학과 철학을 소개하는 '슬라비카 총서'가 출간 예정인데, 이 시리즈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