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씨에게

조효원 (문학평론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
친애하는 게오르크 씨(이렇게 무례하게 부르는 것을 용서하세요. 당신에게 느끼는 저의 친밀한 감정은 저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도록 한답니다). 갑작스러운 편지에 놀라셨겠지요? 당신이 느낄 법한 놀라움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평범한 인간의 수명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아주 긴 시간이 흐를 경우에는 이처럼 예기치 못한 놀라운 사건들도 종종 일어나는 법이라고 말해두지요.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으로서는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을 낯선 언어인 한국어로 당신의 글을 읽고 있는 저의 독서 체험 또한 지금 당신의 놀라움 못지않게 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긴 어쩌면 오래 전에 이 불완전한 ‘동경’의 세계를 떠나 영원한 충족의 세계로 날아간 당신은 이미 모든 문자와 모든 소리를 초월해서 소통/교감하는 천사의 언어를 습득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니 겨울비처럼 착잡했던 제 마음이 적이 누그러지는군요. 이런, 서두가 너무 길었네요. 저는 극동 지방의 한 작은 나라에서 당신이 공부했던 바로 그 독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오늘 당신께 이 편지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아마도 메마른 슬픔의 음조를 띠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슬픔은 당신에 관한, 당신에 의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슬픔입니다. 그 슬픔이 메마른 것인 이유를 이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당신은 아마 이 문장을—어쩌면 약간은 겸연쩍은 느낌을 가지고서—기억하실 겁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패배자들(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당신은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요)이 당신의 이 문장을, 마치 상이용사가 무공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듯 그렇게 자신들의 글머리에 (염치도 없이!) 써먹곤 합니다. 오, 이 문장을 읽는 당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모습이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네요. 미안합니다. 만년의 당신은 저 문장으로 시작되는 당신의 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다시 말해 20년대와 30년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이데올로기의 전사(前史)를 깊이 알기 위해서 『소설의 이론』을 읽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비판적인 읽을거리로부터 유익한 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책을 자신의 방향정립을 위해 손에 든다면, 그것은 단지 방향상실을 상승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따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오르크 루카치(1913)

그렇지만, 게오르크 씨,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우려는 당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에서 맞아떨어졌습니다. 적어도 이곳, 21세기의 한국에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말했듯, 지금 제 눈앞에서는 “현재 속에서 위대한 인간이 현존하고 또 삶에 속하게 되는 것, 즉 현재 속에서 자기 위치를 설정하고 삶에 대해 자기 입장을 취하는 일은 점점 더 위험에 처하게 되고 또 불확실한 모습을 띠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 이곳은 이미 끝장이 난 상태입니다! 아무도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누구도 ‘비판적인 읽을거리’ 따위를 더 이상 찾지 않습니다. 무거운 몸을 추스르지 못한 시커멓고 뿌연 구름들이 빽빽하게, 그리고 한없이 낮게 깔린 이곳의 하늘에서는 언젠가 당신의 영혼을 밝고 날카롭게 비춰주었던 ‘정신의 해시계’와 같은 것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는 당신이 존경한 키에르케고르의 영혼을 잠식했던 것과 같은 우울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지만, 아무도 그와 같이 대담한 도약을 시도하지 않으며 심지어 꿈꾸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무겁게 짓누르는 하늘 밑에서 젊은이들은 정신적인 것의 위대한 작품들 따위는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어깨를 한껏 웅크리고는 다만 끝없이 계속되는 파괴와 건축(당신도 아시다시피, 이 두 단어는 정확히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의 순환만을 지켜볼 따름입니다. 바로 이것이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며 느끼는 저의 메마른 슬픔의 원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혼과 형식』
그래요, 문제는 당신이 말했던 바로 그것입니다. 방향상실! 이것과 관련해서 저는 당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영혼과 형식』을 쓰던 젊은 루카치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 책에서 당신은 독일의 낭만주의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대담무쌍한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그 목적(문화를 창조하려는 목적)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러한 순진무구함이란 병적일 정도로 의식에 차있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진무구함은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삶에 있어서의 단 한 가지 일에만, 그리고 단지 한두 번의 짧은 순간 동안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불 뿜는 화산 위에서 추는 춤이었고 도저히 믿기지 않는 찬란한 하나의 꿈이었다.” 게오르크 씨, 저는 당신의 만년보다는 당신의 젊음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당신이 당신의 선배들인 낭만주의자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던 저 ‘순진무구함’이라는 특성은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젊은 시절의 당신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고, 또한 바로 그 ‘순진무구함’이야말로 늙은 당신이 우려했던 ‘방향상실’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는 확신이 저를 휘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서사시가 그 자체로 완결된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한다면, 소설은 형상화하면서 숨겨진 삶의 총체성을 찾아내어 이를 구성하고자 한다”고 말했지만, 오늘날의 소설은 ‘숨겨진 삶의 총체성’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가치도 두지 않습니다. 당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비유컨대 신들린 예언자의 목소리로 했던 말이지만, 그 말은 정확했습니다. 그것도 무서우리만치 정확했습니다. 당신의 예언대로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는 어마어마한 수다의 “분위기는 모든 것을 정조와 중얼거림 속에 해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밀스럽고 감추어진 모든 요소들이 다시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제가끔 지식의 우주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수한 지식의 우주로부터 매순간마다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처리 불가능한 수다와 지껄임의 쓰레기들 말입니다. 지식과 말들이 오늘날처럼 우주적인 차원으로 팽창한 시대는 일찍이 없었을 겁니다. 이런 시대에 도대체 누가 ‘순진무구함’ 따위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도저히 믿기지 않는 찬란한 하나의 꿈’이지요. 그러나 저는 바로 저 믿기지 않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비록 이 기분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쓰디쓴 체념의 감정이지만 말입니다. 

게오르크 씨, 이렇게 낭만적인 어조로 감상적인 말을 늘어놓는 것을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디기가 힘들군요. 당신이 그립습니다. 아득한 하늘을 향해서 높이 쌓이는 것이 아니라 저 멀고 어두운 가나안 땅을 향해 수평으로 넓게 뻗어가던 당신의 ‘정신의 바벨탑’이 너무도 간절히 보고 싶습니다. 모든 방향이 사라지고 서로 뒤섞여 버려서 심지어 ‘방향상실’이라는 말 자체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른 암울한 시대에 빈약한 정신의 힘으로 어설프게 ‘순진무구함’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삶의 위대한 완성으로서의 ‘형식’을 꿈꾸는 저로서는 다만 당신의 젊은 영혼을 동경할 밖엔 별다른 수가 없습니다.

게오르크 루카치 씨! 언젠가 멀리서 따뜻한 바람이 희미하게 불어올 때가 되면 한낮의 꿈처럼 몽롱한 저의 의식 속에 살짝 답장을 떨어뜨려 주고 가세요. 끝없이 끊임없이 동경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입니다.
우정을 담아.
당신의 후배로부터.

추신.
게오르크 씨! 오래 전에 절판되었던 당신의 『소설의 이론』이 다행히도 얼마 전에 복간되었더군요. 그런데 아쉽게도 제가 더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는 『영혼과 형식』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 먼지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이 책도 멋지게 부활하면 좋겠군요. 그때가 되면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알라딘 링크
2009/12/11 11:00 2009/12/11 11:0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85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비밀방문자 2010/04/04 04:5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그린비 2010/04/05 09:27

      네,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