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변명 혹은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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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하기 전부터 선물을 받았다. 알고 보니 선물이 아니라 숙제였다. 책 읽고 독후감 쓰기. 숙제로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에 놀랐는데, 입사 전부터 숙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고 쓰는 글을 대체로 서평이라 하지 않는가. 독후감을 마지막으로 써본 게 언제일까. ‘독후감’이라는 단어를 귀로 직접 들어본 건 또 얼마 만일까. 대학 땐 ‘리포트’, 졸업 후엔 ‘보고서’ 혹은 ‘보도자료’를 써야 했지 독후감을 써야 할 일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 봐도 (숙제로) 독후감 쓴 기억이 없으니 이게 도대체 몇 년만. 왜 주간님은 서평이 아니라 독후감이라고 했을까? 뭔가 큰 의미/의도가 있는 걸까? 아니면 별 뜻 없었던 걸까? 다시 한 번 편집자로 살게 된 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전을 찾아봤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서평(書評)은 “책의 내용에 대한 평”을 뜻하며(아주 간단하다). 독후감(讀後感)은 “책이나 글 따위를 읽고 난 뒤의 느낌. 또는 그런 느낌을 적은 글”이다. 사전이 항상 그렇듯이 두 단어의 뜻풀이가 모호하기만 한데, 미묘하게나마 차이가 느껴진다. 글자만 놓고 봤을 때 독후감에는 ‘평가’라는 딱딱한 요소가 없다. 그냥 ‘느낌’을 쓰면 되는 거다. 독후감을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사전에서 빛을 발견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의 그리고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써 보고자 한다. 체계 없는 잡글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건 독후감이니까(변명 혹은 정당화). 아참, 책 소개가 늦었다. 고미숙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가 독후감의 대상이다.

공부해서 남 주자!
그래도 한 권의 책을 읽고 쓰는 것이니 간략하게나마 책의 골격을 정리해야 할 듯하다. 호모 쿵푸스, 공부하는 인간이다. 부제는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존재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공부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하는 데는, 그러니까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수 있다(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지장이 있다). 그렇다면 부제를 다음과 같이 변형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지 않으면 존재다운 존재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해 인간답게 살려면 그리고 행복하게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질문이 없으면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가 없다. …… 공부란 세상을 향해 이런 질문의 그물망을 던지는 것이다.(7쪽)

공부 안에서라면 노인과 청년은 권위와 위계에서 벗어나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다.(49쪽)

책을 읽으면 …… 누구든 신체의 에너지와 기운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109쪽)

이성 간이건 가족 간이건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160쪽)

공부를 통해 삶을 통찰하는 힘이 생길 때 비로소 존재의 근원적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199쪽)

공부를 하면 이렇게 된다. 고미숙은 “인생역전”이라고 말한다. 신체, 관계 그리고 세계까지, 다시 말해 자기 자신에서부터 이 세상까지 바꿀 수 있게 해주는 활동이 공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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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 도서관 "지금 이 순간에도 적들의 책장은 넘어가고 있다"
이들도 인생역전을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일 텐데, 이들의 공부는 남에게 주어서도 안 되고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기본적으로 이는 ‘학교 교육’이 퍼뜨린 세 가지 거짓말 때문인데, 그 거짓말은 ‘공부엔 때가 있다’(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바로 그 ‘때’에 공부하지 못했던 걸 얼마나 한스러워 했던가), ‘공부와 독서는 다른 것이다’(“책 읽지 말고 공부해!”라는 이상한, 그렇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표현), ‘창의성과 자율성만 있으면 된다’(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각종 대안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해진 교육 시기(사실은 이 기간에도 진짜 공부를 하는 건 아닌데)를 지나면 공부에서 손을 놓으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책(물론 책다운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창의성과 자율성의 외피를 쓴 채 자기 포장과 방황에 몸을 맡긴다(그러니까 이 창의성과 자율성이라는 건 그 단어들의 진짜 의미와 한참 거리가 멀다). 물론 이는 단순히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근대성이라는 하부구조가 우리 시대에 이르러 극단까지 치달은 결과이다. 그렇다면 진짜 공부는 뭘까?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 걸까?

고미숙은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좋은 스승(이자 친구)을 만날 것. 비약적인 도약이 가능하다. 암송과 구술을 할 것. 지식을 몸 전체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고전을 읽을 것. 고전은 하나의 우주, 즉 ‘모든 것’이다. 글쓰기를 할 것. 글쓰기는 공부를 신체에 각인시켜 운명까지도 바꿔준다. 기타 등등. 이것이 그가 제안하는 공부법이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신체와 일상이 혁명을 맞이한다. 즉 나의 몸과 일상을 비롯해 모든 것이 공부가 되고, 또 그 공부가 내 삶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살수록 불행해지기만 하는 삶에서 탈출하게 해주는 유쾌한 선순환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공부의 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 책을 통해 존재와 세계의 심연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와 세계의 모든 것을 책으로 변환하는 것. ……  쉽게 말하면, 책을 읽으면 삶이 보이고, 일상을 잘 관찰하면 책의 지혜가 확연해지는 식으로.”(146쪽)

고미숙에게 공부는 이런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 우리를 억압하는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평생, 언제 어디서나 해야 하는 것이 바로 공부다.

문체를 바꿔라
고미숙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예전 책들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제대로 안 읽었나 보다. 뭐, 사실 나하고 그를 이어줄 만한 끈이 별로 없었다. 그가 대결하는 주제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그렇다고 내가 다른 거창한 주제와 씨름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의 말과 글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인물들과도 별 인연이 없었다(물론 나와 인연을 맺은 학자도 그리 많지 않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글을 읽는 데 시큰둥했던 것 같다. ‘감염과 촉발’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근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는 게 『호모 쿵푸스』를 읽으면서 기억났다. 그가 글 쓰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다채롭고 생기발랄한”(136쪽) 건 『호모 쿵푸스』에서도 여전해 보인다. 거칠지만 ‘문체’의 차원이라고 해두자.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139쪽) 내가 좋아하게 된 문장이다. 고미숙의 책을 읽으면 다른 텍스트들을 이해하고 그걸 자양분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능력에 감탄하게 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우선 빠르다. 읽고 있으면 속도감에 숨이 찬다. 그렇다고 단조롭게 일직선으로 전력 질주하는 건 아니다. 온갖 사상을 가로지르며 지그재그로 달린다. 그렇기 때문에 가볍다. 그리고 보폭이 넓다. 성큼성큼 여러 분야를 넘나든다. 그 사이사이에 생겨나는 빈틈을 적절한 인용과 사례들로 메워주는 센스도 발군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과 닮아 있다. …… 연구실의 동료들을 보면서 늘 그걸 확인한다. 그들의 문체는 그들의 말투와 동선, 그리고 삶의 패턴과 나란히 간다.”(139쪽) 고미숙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 그가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보게 된다. 대담한 필치로 크게 밑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 그러면서 세부적인 배치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 마지막으로 몸을 움직이는 사람. 내가 그리는 고미숙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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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굼프 作 <자화상>
_ 내가 그리는 나의 모습은 어떤 사람일까? 거울처럼, 그림처럼, 문체 또한 나를 닮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글을 쓰는 거 자체를 힘들어하는 나지만(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가끔 끼적이는 글들도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논리나 글맛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항상 머뭇거리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의지도 없고, 중간부터는 힘이 빠지고, 자괴감이 가득하고, 얼마간 어설픈 농담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덧칠하는 글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글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문체는 그 사람을 닮아 있다.” 그래, 참으로 놀랍다. 언제부턴가 글이 내 모습을 닮아 있었구나. 나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말이다. 하지만 고미숙은 곧바로 너무 큰 낙담은 금물이라고 말한다.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이 말에서 얼른 희망을 챙긴다. 문체를 바꾸도록 노력할 것. 그러나 문체는 ‘그 사람’의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나만의 문체를 만들 것. 이것이 내가 얻은 교훈 중의 하나다. 물론 그 전에 글부터 쓰기 시작해야겠지만 말이다.

나에겐 공부란?
공부해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책을 읽으면서 공부에 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건 저자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틈틈이 생각해봤다. ‘나에게 공부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과연 내가 공부라는 걸 정말로 한 적은 있느냐는 중요한 질문은 일단 제쳐두기로 하자.

사실 공부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말이 좀 이상해 보인다. ‘시작한 지’라니. 그럼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과거 이전에는 공부를 전혀 안 했단 말인가. 물론 그런 건 아니지만, 고민을 안고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공부를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자본과 권력, 나아가 습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비로소 공부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40쪽)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공부 혹은 책을 너무나 사랑했다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이 생기기도 한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욱 “강도 높은 학습”(65쪽)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진 못했다. 여전히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다는 증거.

여하간 나에게 공부란, “아름다움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다”라는 브레히트의 문장(「무엇이 아름다운가?」)을 차용해 말하면, 해결하는 것이다. 공부하고 있다는 건 내가 맞닥뜨린 문제들 혹은 어려움(그게 어떤 종류건)이 무엇인지 인식하고 그걸 해결하는 과정 ― 머릿속에서만이든 실천적으로든 ― 속에 있는 것이다. 그냥 배우고 익히는 게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아쉽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나는 박학한 사람이 부럽다). 나와는 무관해 보이는 텍스트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경지에 이르는 게 나의 목표 중 하나다. 그런 날이 오면 공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도 달라질 것이다.

공부를 꼭 책으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책 말고도 무수히 많은 매개물이 존재할 거다. 고미숙도 세상 만물이 다 텍스트라고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나 역시 책이 가장 좋은 동반자라는 생각을 하는데, 가장 손쉽게 그리고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책이 없다면 그 많은 어려움들을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매개물인 책을 읽을 땐 열심히 읽어야 한다. 편리한 도구라고 해서 마음까지도 너무 편하게 먹고 다가가선 안 된다. 독서는 책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일이다. 저자와 대화한다는 마음을 갖고 그가 쓴 것, 쓰고자 한 것과 쓰려 하지 않은 것, 잘못 쓴 것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 또 너무 긴장하거나 주눅 들어선 안 되고(위대한 저자들의 이름이 갖는 권위) 즐겁게 읽어야 한다. 그래야 더 잘 읽을 수 있고, 비판적으로 읽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독서다(실제로 그렇게 읽고 있느냐고 묻지는 마시길).

공부와 변화
나도 책을 읽으면서 변했다. 그중 하나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진 것이다. ‘겸손’해졌다고 말해도 될까? 그전에는 망나니였고, 지금은 극도로 겸손하다는 말은 아니다. 요즘도 여전히 교만하고 성급한 태도로 사물을 대하곤 한다. 그렇지만 적어도 그 안에 나에게 의미 있는 혹은 내가 보지 못한 뭔가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려고 한다. 이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역사를 주름 잡은 지성들의 직관, 통찰, 논리를 보면서 어떻게 조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조심스러운 태도, 텍스트를 존중하는 습관, 겸손함이 꼭 좋은 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지나치면 수동적 자세,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감 없음이 몸에 밴다(잠깐, 그렇게 되면 그건 이미 겸손이 아닌 건가). 최근까지 내가 그런 상태에 근접해 있었다. 훌륭한 책을 읽고 있는데, 해방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꾸 작아지는 것이다. 이런 게 또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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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과 말, 말과 광야 사이의 경계조차 사라진 '고요한 질주'
_"책과 몸 사이, 공부와 삶 사이의 경계가 문득 사라져버리는, 책도 없고, 책 아닌 것도 없는 그런 질주를. 실은 먹거리와 사랑, 병과 죽음, 운명과 호흡까지도 다 '책'이니까. 생명이 사건이자 운동인 것처럼, 공부 또한 사건들의 흐름일 뿐이니까. 하여, 공부를 한다는 건 그저 이 흐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 뿐이니까."(143쪽)

이는 내가 어느 한쪽에만 비중을 둔 결과였던 것 같다. 공부를 한다는 건 단순히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이 아니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할 듯하다. 내가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뭔가를 산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말, 글 혹은 행동으로. 이는 배운 내용에 대한 윤리적 책무(“공부해서 남 주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잘 알기 위해, 알게 된 것을 몸에 새겨 넣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또 그 과정에서 아마 뭔가를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이 중요한 과정을 소홀이 했고, 그러다 보니 그나마 공부했던 것들도 몸 안에 오래 남아 있지 않았다. 점점 더 많은 텍스트를 대할수록 더욱더 큰 자괴감에 빠졌던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텍스트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복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모 쿵푸스』의 미덕 중 하나는 독자가 공부를 하도록 강제한다는 것이다. 대놓고 이야기한다. 공부만이 살 길이라고. 이런 책을 읽으면 한편으로는 그간의 게으름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자극을 받고 의욕도 갖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살짝 바꿔 표현하자면 『호모 쿵푸스』는 “곁에 두고 때로 곱씹을 만한” 책이다. 덕분에 알고 있었던 것(이기보다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도 알게 되었다. 또 공부를 해야겠다는 열의도 다시 한 번 다졌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이 책에 ‘감염’된 게 아닐까? 앞에서도 슬쩍 말했듯이 앞으로 더욱더 공부하는 인간, 더 구체적으로는 글 쓰는 인간이 되기로 다짐해본다.

그 외의 단편들
너무 길어졌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체계 없이 써내려간 글, 느낀 점들을 몇 개 덧붙인다.
우선, 제도로서의 교육에 대한 비판이 재밌었다. 제도 교육 비판이야 그간 여러 사람이 제기한 거라 크게 새로운 건 아니지만, 고미숙은 특유의 문체와 개념틀을 통해 그들과는 또다른 통찰을 보여준다. 특히 흥미로웠던 건 ‘대안 교육’ 비판이었는데, 평소 (현존하는) 대안 교육에서 별다른 전망을 확인하지 못했던 터라 많이 공감하면서 읽었다. 그 외에 대학 교육을 비판하는 곳에서는 몇 년 전에 읽은 강명관 교수의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공장의 침묵」을 떠올렸다. 대학 교수도 자신이 속한 영역을 엄격하게(사실은 거의 절규하듯이) 비판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 글이다. 이 글도, 고미숙의 책도 모두 대학 졸업 후에 쓰였다. 대학 시절에 이 글들을 읽었다면 대학 생활이 바뀌었을까? 쓸데없는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 다음으로, 스승에 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나는 특별히 기억나는 스승이 없다. 또 이 책에서 정의하는 ‘스승’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지는 오래됐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 조언을 해주는 이, 같이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는 (운 좋게도) 몇 명 만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이 자리를 빌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고미숙의 말처럼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찾아 나서야 한다. 이젠 정말 찾아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호모 쿵푸스』가 계속 나를 자극한다.

마지막으로, 사실은 이 글에서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이지만, 글쓰기가 매우 힘든 일이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책을 읽으면서 혹은 글을 쓰면서가 아니라,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길게 혹은 짧게, 진지하게 혹은 가볍게 글을 쓴다. 그런데 그렇게 쓴 글은 대체로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것이다. 그럴 때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번에 내가 겪은 어려움은 그와 조금 다르다. 나를 아는 사람, 앞으로 함께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글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이게 (그것도 직장인에게) 흔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나는 신입, 이 공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이다. 어떤 식으로 써야 할지 막막했다. 너무 딱딱해도 안 될 것 같고, 너무 가벼워도 안 될 것 같고. 앞에서 ‘독후감’과 ‘서평’ 운운한 것도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글쓰기에 자신이 없다는 걸 돌려 말하기 위해 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로 독후감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이기도 했다.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위치, 내 글을 읽는 사람과의 관계에 따라 무슨 말을 할 것인지와 어떻게 말할 것인지가 크게 달라진다는 걸 실감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웠다. 누구를 향해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앞으로 종종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길 것 같다. 아마 두번째, 세번째에도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면 지금보다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서 좀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느끼는 이 어려움에서 비롯된 고민을 이어나가는 것(즉 잊지 않는 것), 더 잘 해나가면서 어려움을 줄이는 것 그리고 다음에 만나는 새로운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또다시 고민하는 일인 듯하다.

- 편집부 김재훈

+ 새식구의 독후감입니다.
그린비에서는 새식구가 들어오면, 그린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도록 합니다. 이 글은 갓 입사한 김재훈 님이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를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그린비 블로그에 새로 등장한 뉴페이스, 기대해 주세요. ^^
2009/12/15 11:20 2009/12/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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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비출판사 :: 다채롭고 생기발랄한 공부의 달인이 나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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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캐러멜대장 2009/12/15 14:00

    어쩐지, 낯선 문체의 향이 느껴졌습니다(...응?!).
    안녕하세요. ^-^

    • 그린비 2009/12/15 19:43

      하핫. 맡으셨나요? 낯선 문체의 향기..ㅎ
      앞으로 요 향기 많이 맡을 수 있도록 운영자가 힘써 보겠습니다. (응?ㅎ)

  2. 해피엔드 2009/12/15 14:14

    와, 신입사원이시군요 ㅎㅎ
    우선 입사를 축하드립니다 .

    그리고 글도 매우 잘 읽었습니다-
    '독후감'과 '서평'의 미묘한 뜻 차이만큼이나
    기존 그린비 운영진들의 글맛과
    미묘하게 다른, 신선한 맛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

    많은 부분 공감하고 갑니다 -
    앞으로 새로운 공간에서의 생활,
    즐겁게 해나가시길 바랄게요~

    • 그린비 2009/12/15 19:50

      신입이라기보다 신인이랄까요.^^
      그러고보니 얼마전 해피엔드님께서 쓰신 씨앗문장과 일치하는군요.
      신기합니다요리~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