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4일 메르세데스 소사가 7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아르헨티나의 국민가수이고, 라틴아메리카 음악의 대모이며, 월드뮤직의 신화였던 노래꾼이다. 1982년 아직 군부통치가 서슬 퍼렇던 시절에 망명에서 돌아와 강행한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에서》(Mercedes Sosa en Argentina) 공연의 라이브 음반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새로워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 떠나간 인류의 목소리

우석균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카네이션 레드카펫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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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소사
_ 칠흑 같은 머리 때문에 '라 네그라'(검은 여인)으로 불렸던 남미 음악의 대모, 메르세데스 소사.
1982년 2월 18일 밤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극장에는 강렬한 전류가 흐르고 있었다. 공연이 어서 시작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그리움과 공연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자아낸 자장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78년 마지막 국내 공연 이후 3년 4개월, 망명 3년 만에 열리는 메르세데스 소사의 귀국공연이 열리기 직전이었다. 그녀 역시 설렘과 만일의 사태에 대한 걱정으로 공연 시작 전부터 이미 초긴장상태였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애써 청중을 외면하고 발치만 내려다보면서 근근이. 남들은 그녀를 타고난 카리스마의 소유자라고 하지만 감정이 북받쳐오를 때마다 별안간 목소리가 잠겨 이따금 곤욕을 치렀기에, 고대하고 고대하던 그 공연 순간 그런 상황이 재연될까 똑바로 청중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모습이 보이자 청중은 5분 동안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문득 발밑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있었다. 주변이 온통 선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잠시 어안이 벙벙했고 잠시 눈을 의심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꽃이었다. 빨간 카네이션이었다. 꽃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도 서슬 퍼런 군부독재 치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연에 나선 메르세데스 소사에 대한 청중의 감사표시였다. 그녀의 노래와 함께 가슴에 깊이 묻어둔 분노를 폭발시키고, 하늘 끝까지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성이었다. 카네이션 레드카펫을 사뿐히 즈려밟고 선 메르세데스 소사는 말했다. “저는 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인입니다.” 아르헨티나인인데 아르헨티나에서 공연할 수 없었던 그녀의 공연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오페라극장을 휘어잡았다. 온몸으로 발산하는 열창이 거듭되었다. 청중은 혼연일체가 되어갔다. 갑자기 청중 속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이야. 군사독재는 끝날 거야.” 다시 모두가 하나가 되어 그 말을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모두 함께 열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모두 함께 최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모두 함께 신들린 사람들처럼. 1982년 메르세데스 소사의 귀국공연은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심장에서 군부독재를 뒤흔들어 놓았다.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
공연은 그녀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Canción con todos)를 부르면서 막을 내렸다. 메르세데스 소사를 아르헨티나와 라틴아메리카와 월드뮤직의 살아있는 신화로 첫 발을 내딛게 해준 노래였으며, 동시에 그녀를 죽음의 위협과 망명으로 몰아넣은 행보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곡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르세데스 소사의 시작은 아주 평범했다. 그녀는 1935년 7월 9일 투쿠만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노래꾼의 길을 걸을 생각은 결코 하지 못했다. 1950년 얼떨결에 라디오의 한 노래경연대회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노래 인생이 시작되었다. 1957년까지 메르세데스 소사는 그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을 뿐이지만, 이 해에 첫 남편이자 역시 음악인인 마투스를 만나면서 자신의 일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결혼과 함께 남편의 고향 멘도사에 정착해서 음악인, 예술인, 지식인들과 교류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노래를 예술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전통음악의 올바른 방향성에 대한 인식을 정립했다. 하지만 클래식음악이나 탱고 혹은 미국 대중음악의 벽은 너무 높아서 그녀가 설 자리는 대단히 좁았다. 결국 메르세데스 소사는 1958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1962년에는 몬테비데오로 이주해 새로운 도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카를로스 뉴녜스, 마리오 베네데티(관련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등 우루과이 지성들의 눈에 띠면서 예술가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투쿠만은 뿌리이고, 멘도사에서는 행복을 맛보았고, 자신을 인정해 준 몬테비데오에는 마음으로 감사한다고 말한다.

1963년 2월 메르세데스 소사는 멘도사로 잠시 돌아온다. 남편의 친구인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스를 비롯한 멘도사 음악인들의 누에보 칸시오네로(Nuevo Cancionero) 선언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아르헨티나 음악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선언은 그들이 추구하는 전통음악은 자연과 풍습이 아닌 인간을 그 중심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또한 전통음악이 골동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것임을 부각시켰다. ‘인간’을 중심에 두고 시대의 고민을 함께 하면서 현대성을 획득하고 음악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고, ‘변화’를 지향함으로써 특정 장르에 갇히지 않고 음악의 폭을 넓혀가면서 전통/현대의 이분법적 잣대로 이들의 음악을 ‘낡은 것’ 혹은 ‘시대의 변화에 뒤처진 것’으로 치부하던 이들의 편견을 깨뜨릴 수 있었다. 세사르 이세야 작곡, 아르만도 테하다 고메스 작사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는 누에보 칸시오네로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였고, 이를 부른 메르세데스 소사는 단번에 이 노래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972년, 소위 고급예술의 성전으로 대중문화에 배타적이던 콜론극장에서 청중의 열광 속에서 〈모두 함께 부르는 노래〉를 부르며 사실상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노래꾼으로 공식인정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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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_ 아르헨 군부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벌인 '더러운 전쟁의 한 장면' (출처: 아르헨티나 정부 역사자료)

하지만 좌우 갈등이 증폭되던 시점에 대중적 인기는 위험한 것이었다. ‘모두 함께’는 당시로서는 민중을 선동하는 지극히 불온한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1975년부터 우익 준군사조직 트리플A(Triple A)의 각종 위협과 공연 방해에 시달렸고, 결국 ‘추악한 전쟁’(La guerra sucia, 1976~1983) 시기인 1979년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망명은 그녀 인생의 또 다른 전기가 되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월드뮤직의 스타로 떠올라 부와 명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1982년 오페라극장 공연의 청중은 그토록 뜨겁게 메르세데스 소사를 환영한 것이다. 부와 명성을 다 뒤로 하고 목숨을 건 귀국공연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목소리, 아메리카의 어머니
그러나 메르세데스 소사가 신화가 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는 빼어난 가창력도 망명 경력도 아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았다는 점이 최고의 성공 비결이었다. 그것도 결코 자신의 명성에 취하는 법 없이 낮은 자리로 임하였다. 가장 인상 깊은 공연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그녀는 대답한다. 1982년 오페라극장과 1999년 3월 3일 산타카탈리나 공연이라고. 산타카탈리나는 볼리비아와의 국경 근처에 있으며 해발 3,800미터에 위치한 마을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공연이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을 정도로 하찮은 마을, 가는 길조차 변변히 없는 마을, 황량함과 빈곤 그 자체였던 마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던 마을이었지만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모여 마을 1킬로미터 바깥까지 나와 환영의 춤과 노래를 선사했을 때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단 400명의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공연을 베풀어주었다. 그녀에게 ‘인류의 목소리’(La voz de la humanidad)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인간에 대한 그런 사랑 때문이었다.

메르세데스 소사는 ‘아메리카의 어머니’(La madre de América)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다. 이 역시 인간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 때문에 굳어진 푸근한 모성적 이미지 덕분이다. 후배 음악인들을 향한 아낌없는 사랑은 모성적 사랑의 한 단편이다. 메르세데스 소사에게는 음악적 자식이 세 사람이나 있었다. 레온 히에코(León Gieco)와 찰리 가르시아(Charly García)와 빅토르 에레디아(Víctor Heredia)였다. 뜻밖에도 모두 전통음악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특히 앞의 두 사람은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력과는 전혀 무관한 록 나시오날(아르헨티나 록)의 기수들이었다. 이런 음악적 차이를 메르세데스 소사가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성과 예술적 완성도가 그녀의 첫째가는 음악적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메르세데스 소사는 히에코를 음반으로 먼저 접했다. 망명 시절인 1982년 초 프랑스에서였다고 한다. 그래서 오페라극장 공연 때 그에게 찬조출연을 요청했고, 갑자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신에게 오직 바라네〉(Sólo le pido a Dios)를 비롯한 그의 노래에 대해 벅찬 음악적 감동을 토로했다.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오른 메르세데스 소사의 이 진솔한 고백이 히에코로 하여금 그녀를 친어머니처럼 따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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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은 의리》(Alta fidelidad)
사람들은 세 명의 음악적 자식들 중에서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가는지 메르세데스 소사에게 자주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찰리 가르시아였다. 그런데 그 이유가 또한 작은 감동이다. 가르시아가 셋 중에서 제일 조금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곧 셋 다 친자식으로 생각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괴팍한 약물중독자로 여러 차례 사고를 친 가르시아의 행적을 감안하면 그녀의 사랑은 정말 친어머니 이상이다. 심지어 호텔 9층에서 수영장으로 뛰어내린 적도 있는 가르시아였다. 그것도 자신을 체포하러 온 사람이 찰리 가르시아건 누구건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는데 발끈하여, 자신은 다른 사람과 달리 용감한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쯤 되면 로커 특유의 저항정신을 운운할 단계가 아니라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다. 하지만 찰리 가르시아가 툭하면 사고를 쳐서 언론에 대서특필되어도 메르세데스 소사는 늘 그를 감싸고 위로하고 재기를 도왔다. 심지어 1998년에는 찰리 가르시아의 곡으로만 구성된 《드높은 의리》(Alta fidelidad)라는 헌정음반까지 냈다. 직전 해에 병으로 죽음 직전까지 이르러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메르세데스 소사가 또 한 번 ‘안쓰러운 아들’을 위해 크나큰 사랑을 베푼 것이다.

하나뿐인 내 가슴에 어쩌면 이렇게 큰 사랑을
메르세데스 소사는 자신의 삶이 불행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화려한 공연이 끝나고 난 뒤 혼자가 될 때 느끼는 고독을 몹시 싫어했다. 무대에 오르면 청중을 지배하는 그녀였지만 사실은 가까운 사람이 죽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는 여린 성격의 소유자였다. 특히 두 번의 결혼생활이 다 불우했다. 첫 남편은 새로운 음악세계를 열어주기는 했지만 남편으로서, 또 가장으로서는 무책임했다. 두 번째 남편 마시텔리는 그녀에게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주었지만 망명 직전인 1978년 사별했다. 그래서 메르세데스 소사는 자신의 삶이 고독했노라고 되뇌곤 했다. 하지만 세상이 다 행복한데 자신만 불행하다는 푸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반대로 그렇게 고독한 자신에게 사랑을 보내주는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말년에는 더 성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특히 1997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삶이라는 것 자체에 더욱 더 소중함을 느끼면서부터였다. 메르세데스 소사가 부른 수많은 노래 중에서 아마도 칠레의 노래꾼 비올레타 파라의 〈생에 감사해〉(Gracias a la vida)가 가장 큰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메르세데스 소사 외에도 존 바에즈 등이 즐겨 불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곡이다. 이 곡을 자살 직전에 만든 비올레타 파라가 과연 이 노래를 통해 어떻게든 삶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에서 상실한 것을 역설적으로 예찬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병중의 메르세데스 소사는 자신이 숱하게 불러 명곡의 반열에 오르는 데 일조한 이 노래의 아름다움, 이 노래가 예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새삼 절실히 느꼈다고 한다.

삶의 소중함을 새삼 느껴봐서일까? 말년에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보내주는 사랑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뿐인 내 가슴에 어쩌면 이렇게 큰 사랑을?” 하는 질문을 던지며 감격하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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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08 12:02 2010/01/08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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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풀처럼 2010/01/09 10:34

    이름만 겨우 알고 있던 사람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 고맙습니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주말 아침..
    문득 엇그제 주문하여 듣고 있는 우리네 소리꾼 김용우가 떠오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존재감을 줄 수 있는소리꾼이 있다면
    이 아침,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근무중 이상無 ^^;

    • 그린비 2010/01/10 18:00

      들풀처럼님, 안녕하세요.
      꼭 소리꾼이 아니더라도 이런 존재감을 주는 몇몇 얼굴들이 스치긴 하네요. ^^
      그나저나 어제도 오후에 눈이 내리던데.. 퇴근은 잘 하셨는지요. ^^;

    • 들풀처럼 2010/01/11 13:41

      (경남 김해에 10년째 살고 있는 사람의 대답입니다.)

      눈이 머예요? ㅋㅋ

      이곳은 김수로왕의 은공으로
      눈비로 인한 폭우 폭설은 좀체 없습니다.
      수도권에 계시는 분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표합니다.^^*

    • 그린비 2010/01/11 13:49

      으앗. 그곳엔 폭설따윈 없었던 거군요. 김수로왕의 은덕에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