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정직한 기록자가 된다는 것


뿌리서점에서 건져 올린 횡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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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몽각, 『윤미네집』(1990, 시각)
2010년 1월 1일, 故 전몽각 선생의 『윤미네집』이 드디어 복간되었다. 20년 전, 사진작가 주명덕 씨의 손으로 엮어진 이 사진집은 누군가는 ‘전설’이라고 표현할 만큼 아마추어 사진작품 중의 최고라 할만 했다. 이 사진집을 갖고 싶어한 수많은 사람들이 딱 1천 권 발간돼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는 윤미네집을 찾아 지난 20년간 헌책방을 뒤지고 다녔다.

이 사진집은 큰딸 ‘윤미’가 태어나고 결혼할 때까지의 기록인데, 아버지의 사랑이 책갈피마다 묻어 있는 실로 정겨운 작품들이다. ‘빼어난 구도도 번쩍이는 아이디어도 선명한 화질도’ 없는 이 사진집이 주목받는 까닭은 그 어떤 것도 ‘렌즈 너머 대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따뜻함’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생을 통틀어 자신이 애정을 쏟은 한 가지 주제에 그토록 변함없는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의 ‘끈기’까지도.

10년 전, 존경하는 한 선생님의 소개로 이 사진집을 처음 알게 된 이래로 나 역시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던 중 용산의 ‘뿌리서점’에서 결국 윤미네집을 ‘낚았다’. ‘민족의 이름으로’ 책값 깎아 주는 것을 즐기는 그곳 사장님의 ‘은혜’ 덕으로 싼 가격에, 그것도 저자의 친필 서명이 남겨진 책을 샀으니 주변의 부러움을 살만도 했다. 하여간에 윤미네집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사진계의 ‘수작’이자 ‘희귀본’으로 존재했다. 그러다 20년 만에 복간이 되었으니 이 책을 찾아 헌책방을 헤매던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성매매를 경험한 여성들과 글쓰기

막달레나의집에는 문화적 역량을 키우는 여러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중 사진 프로그램과 글쓰기 프로그램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전시회를 두 번이나 가졌고 사진집도 제작할 정도로 활동이 왕성한 막달레나의집 사진 프로그램은 이후 다른 기관에서도 모델로 삼을 정도다. 사진 프로그램은 서로 간에, 혹은 세상과 소통하고, 즐기는 꽤나 유쾌한 프로그램이다. 반면 글쓰기 프로그램은 자기의 인생(과거와 미래를 이어가며)을 들춰보는 제법 ‘매운’ 프로그램이다.  

참여자들은 이 프로그램에 관한 수다로 하루를 이어가고 열정을 다해 수업준비를 했다.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여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늦었지만 자기도 같이 공부하면 안 되냐고 묻곤 했다. 그렇다고 참여자들이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소설이나 시를 쓸 줄 알았는데 이상한 걸 쓰게 됐다며 불만을 늘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참여자들은 울었다, 웃었다를 되풀이하며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글쓰기에 열중했다.

자신의 삶 자체가 이 수업의 주제이며 살아온 과정 굽이굽이가 다 소재다. 안건모 아저씨의 버스기사 이야기, 홍영녀 할머니의 ‘가슴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 괭이부리말 아이들, 어느 초등학생의 ‘찢어진 란닝구’ 등이 이 수업의 좋은 보기들이 되었다. 글쓰기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진자료와 음악이 활용되는데, 그 중 참여자들이 제일 처음 만나는 사진자료가 바로 윤미네집이다.

‘참 잔인한’ 윤미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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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몽각 作 윤미네집 중에서

윤미네집의 일상사를 보여 주면 누구는 감동받아 울고, 누구는 그리워 울고, 누구는 서러워서 운다. 지금은 마흔 중반이 넘었을 ‘윤미’의 해맑은 얼굴이며, 어느덧 동생들이 생겨나 팬티바람으로 한방에 뒤엉켜 잠이 들거나 찌그러진 양푼에 담긴 음식을 나눠먹고, 그 한켠에서 때로는 고단하게 때로는 행복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지키는 엄마, 그리고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 모습을 담아내는 아버지... 그 아버지는 딸이 성장하여 연애하는 모습까지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으니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야했던 여성들에게, 특히나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지닌 사람들에게 이 사진집은 참으로 야속하기 그지없다.

함께 글을 쓰다보면 즐겁고 슬프고 화나는 다양한 사건과 추억들이 떠올려진다. 누군가는 다들 성매매 공간에서 벗어난 이들이니 성매매 관계에서 겪은 일들이 가장 힘겨운 기억이 아니겠냐고 할 법도 하다. 나 역시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을 해 왔던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여성들과 오랜 동안 관계를 이어오며 그들의 인생 궤적과 함께 하다보면 그 일상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드러나지 않은 상처와 만나곤 한다.

업소에서 극심한 인권유린을 경험하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여성이라 해도 이 안에서 겪었던 부당하고 참혹했던 기억보다는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소리 내어 울어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에 더 아파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글쓰기 프로그램에서도 그랬다. 어린 시절 회상을 거부하거나, 마치 지우개로 그 부분만 쓱싹쓱싹 지워낸 듯 아예 그 시절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며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모든 인생기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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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의집 두 번째 사진전 '모든 것이 되는 시간 - 위풍당당 그녀들'
_ 공동작품 <셀카열전>. 사진 프로그램 초반에는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는 것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했지만, 프로그램이 진행될수록 자신을 가두어 두었던 틀을 깨고 사진 속에 자신의 온전한 얼굴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출처: 오마이뉴스)

그 여성들이 긴 시간 동안 갈등하고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뒤 용감하게 그 시절을 꺼내 보면 어린 날의 상처는 가난, 방치, 폭력, 성적 학대, 과도한 책임 부여 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버지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자신을 무시하고, 짓밟고, 이용했던 성매매 공간의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보다 때리고 고함치며 외롭고 두려운 곳으로 내몬 그 오래 전의 아버지를 미워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버지가 전하는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따스한 포옹, 예쁜 추억의 조각들은 어디에도 없다.

어린 시절 가족관계 안에서 얻은 상처는 참으로 뿌리 깊은, 해결되지 않은 과제였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비록 성매매 공간에서 생활하기는 하지만 부모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훈훈해지는 그런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며 사는 여성들이 왜 없겠는가. 그 여성들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빠지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자기만의 에너지가 있었다.

어린 시절 회상을 두려워한 여성들은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어느덧 자신의 상처받은 ‘내면아이(inner child)’와 만난다. 그리곤 스스로의 상처를 위로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을 용서하며 비로소 자신의 현재 삶과 마주한다. 여성들은 그런 시간을 거치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글을 꺼내 보이며 불행하다고, 하찮다고 여겼던 자기 인생의 기록 작업을 이어간다. 이제 그 여성들은 비록 故 전몽각 선생과 같은 ‘좋은 아버지’를 두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며 비로소 ‘좋은 인생’을 꿈꾼다.

여성들이 쓴 글을 읽으며, 그 행간을 차지하는 숱한 인생이야기와 만나며 나는 이런 바람을 갖게 되었다. 열악한 조건에 놓인 여성들의 삶이라는 것이 그 고단함에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다고 해도 이 모든 종적들이 결국은 온전히 자기 삶을 이룬다는 것을 여성들이 알아가길. ‘전몽각’이라는 한 아마추어 사진작가에 의해 윤미네집이 남겨졌듯, 여성들 또한 자기 인생의 주체로서 정직한 기록자가 되어 ‘아무개 이야기’, ‘아무개네 집’의 저자가 되기를 말이다.

+ 뱀꼬리: 이 사진집을 볼 때 권하는 음악 하나. 스티비원더의 노래 「Isn't she lovely?」를 함께 들으면 어떨까. 책갈피마다 깃들어 있는 그 사랑의 흔적이 더 절실히 다가올 것이니.
알라딘 링크
2010/01/13 10:47 2010/01/1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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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topnlook 2010/01/13 11:52

    사진집의 전설... 좋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뱀꼬리의 말씀처럼 노래를 구해 들으며 다시 한번 넘겨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그린비 2010/01/13 11:58

      stopnlook님, 반갑습니다~!
      글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자주 뵈어요. ^^*

  2. 울보 2010/01/13 11:53

    이 글을 읽는데 또 눈물이 훌쩍..엄상미 선생님 글 평소에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윤미네 집 꼭 한 번 읽고 싶네요.
    저도 가끔 아이 사진을 찍어 주는데, 일부러 추사(추한 사진)로만 골라서 찍어 줘요.
    나중에 너한테 이런 미운 오리 시절이 있었다고 알려 주려구요.

    글쓰기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가끔 육아일기를 쓰는데, 아이를 위한 기록이라고 생각해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그걸 쓰면서 제가 더 성장하는 기분이 들거든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토닥이고, 상처와 경험들을 제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들이 아마도 글쓰기가 가진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그린비 2010/01/13 12:02

      울보님, 감사합니다.
      글쓰기도 사진도 그저 기록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삶 속에서 묘한 힘을 발휘하곤 하죠. 울보님의 사진과 글도 보고 싶네요. ^^

  3. 리브홀릭 2010/01/13 14:12

    사진계의 전설이란 낯간지러운 수식어는 좀 그렇지만...저도 <윤미네 집>이 복간된 것이 너무나 반가워요.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이 복간될 때면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런데.... 김기찬 선생님의 <골목안 풍경>도 좀 누가 복간해 줬으면 해요 ㅠㅠ

    • 그린비 2010/01/13 14:21

      리브홀릭님, 오랜만이네요~
      김기찬 선생님의 <골목안 풍경>은 눈빛에서 선집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