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말하는 사람, 법을 공부하는 사람

조효원 (문학평론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야겠다. “당신은 권력자인가, 아닌가?” 곧 밝혀지겠지만, 이 물음은 “당신은 인간인가, 그렇지 않은가?”라는 음흉한 물음의 커튼이 가리고 있는 진짜 목소리이다. 우리는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래 전『빈곤의 철학』Philosophie de la misère의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말하는 사람은 기만하려는 자이다.” 200년 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 1809~1865)이 마셨던 것과 똑같은 공기와 물을 받아먹으며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그러나 저 말을 고쳐 써야 한다. “신이 아니라 법을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기만하려는 자”라고. 우리는 더 이상 ‘법의 보호 아래’ 있지 않으며, 법의 질서 따위를 신뢰하는 것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여전히 법을 무서워하며 살고 있다. 법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랐다. 더 정확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법 자체가 아니라, 법의 (신출귀몰한) 변신과 법의 (유령과도 같은) 힘이다. 요컨대 우리는 변법(變法)의 효력(效力)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변신하면서 출몰하는 법. 따라서,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법은 (그것의 가장 심원한 본질에 있어서) 권력이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 이처럼 커다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이 두려움 앞에서 우리가 던져야만 하는 물음이 바로 저것이다. “당신은 권력자인가, 아닌가?” 이 물음을 가슴 깊은 곳에 갈무리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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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라는 권력
_ 무엇을 위한 법이고,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법 앞의 평등이란 곧 모든 사람이 국가 권력 앞에서 평등하게 무력함을 의미한다.(출처: 오마이뉴스)

「권력과 살아남음」(『말의 양심』Das Gewissen der Worte에 수록되어 있음)이라는 탁월한 글에서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1905~1994)는 권력의 본질이란 모든 사람의 죽음 앞에서 홀로 살아남기를 원하는 욕망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에 따르면 권력자란 “그의 동료 인간들에 관한 한, 그들은 모두 이미 파멸했고 그 자신만이 그가 원하는 바대로 유일한 자이다. 바로 이것이 권력의 가장 극단적이고 최종적인 단계이다.” 이 문장은 호흡의 리듬을 흐트러지게 할 정도로 날카로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흩어진 숨을 가다듬고 더없이 차분한 상태에서 물어보자. 오늘날 저 권력의 본질을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혹은 누가 저 ‘홀로 살아남기를 원하는 욕망’을 충족하고 있는가? 모호함을 극복하고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이라면, 금방 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라고. 그렇다. 바로 ‘국가’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국경은 우리의 공간적 움직임을 (말 그대로) ‘가두고’ 있고, 주민센터(이 얼마나 희귀한 말인가?)는 우리 생의 시간적 흐름의 처음과 끝을 (다시 한 번 말 그대로) ‘장악’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국가 그 자체는 이 모든 가시적 제도와 질서를 ‘초월’해 있다. 바꿔 말하자면, 신을 죽인 장본인인 우리 인간은 여전히 모종의 ‘초월적’ 질서 아래 엎드리고 있는 셈이다.

나는 여기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한 명의 오스트리아인과 한 명의 독일인, 즉 한스 켈젠(Hans Kelsen, 1881~1973)과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저 가공할 욕망의 화신인 ‘국가’에 대해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켈젠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국가라는 “통일체를 구성시키는 것은 특수한 법질서이며, 이러한 통일체를 초-법률적으로, 즉 사회학적으로 근거 지우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는 본질상 하나의—비교적 중앙집권화된—법질서이고, 그러므로 국가와 법의 이원주의는—그것에 도움을 받아 국가의 법률적 통일성이 설명되는—의인화(擬人化)의 애니미즘적 실체화에 의거하고 있는 하나의 의제(허구)일 뿐이라는 주장은 내 법이론의 본질적 요소가 되었다.”(『켈젠의 자기 증언』Hans Kelsen im Selbstzeugnis, 심헌섭 옮김, 법문사, 2009, 85~86쪽) 저 물음에 대해, 마치 선배에게 정면으로 대들기라도 하려는 듯이, 후배 법학자는 저 선배가 거부했던 ‘사회학적’ 설명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근대 세계의 “발명자들은 그와 같은 파괴수단을 발명함으로써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새로운 리바이어던을 발생시키는 일에 착수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미 16, 17세기에 있었던, 잘 조직된 유럽의 근대 국가는 기술적인 인공생산물이었습니다. 인간에 의해 탄생되었으면서 인간으로 성립된 초인간(Übermensch)인 셈이지요. [……] 이런 의미에서 근대에 잘 조직된 유럽의 국가는 최초의 근대적인 기계였으며, 동시에 계속되는 모든 기술적인 기계들의 구체적인 전제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국가는 기계들의 기계였으며 인간들로 성립된 초인간이었습니다.”(『유럽 법학의 상태』Die Lage der europäischen Rechtswissenschaft, 김효전 옮김, 교육과학사, 1994, 201~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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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켈젠(좌)과 칼 슈미트(우)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순수법학을 향한 열정을 한 번도 버리지 않았던 강인한 정신—20세기는 그를 세계 최고의 법학자로 인정했다—의 소유자 한스 켈젠은 ‘법질서’의 규범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걸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가 이미 보았고, 보고 있으며, 또 볼 것인바, 국가와 법이라는 짝패—켈젠은 이것들이 둘이 아닌 하나라고 보았지만—는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고귀한 이념을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그리고 가장 철저하게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켈젠 자신도 불안해했던 것 같다. 법을 국가의 근본적 구성 원리로 천명한 저 문장들 바로 아래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내가 이러한 견해에 이른 것은 특히 나와 가장 가까이 놓여 있었고 또 내 개인적 체험으로 가장 잘 알았던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명백히 하나의 법적 통일체일 뿐이었다는 것에 연유되었을 것이다.”(『켈젠의 자기 증언』, 85~86쪽) 그와 반대로, 민주주의라는 가상에 단 한 번도 현혹됨 없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가공할 괴물의 탄생을 지칠 줄 모르고 저주했던 법학계의 이단자(Häretiker) 칼 슈미트는 마치 구약 시대의 예언가처럼 다가올 미래의 파국에 대해 심중한 경고를 던졌다. 그리고 그의 예언에서 ‘기계들의 기계’라고 표현된 것의 핵심 작동 원리는 다름 아닌 권력이었다. 우리가 ‘당신은 권력자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슈미트는 현대의 권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다.

현대의 파괴수단이 지닌 힘은 현대적인 기계와 조처들의 가능성이 인간의 근육과 뇌의 힘을 능가하는 만큼 그것을 고안하여 사용하는 인간 개인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지요. [……] 현대에서의 개개 권력자들의 힘은 단지 믿을 수 없을 만큼 극도로 발달된 분업체제에서 생겨난 상황의 분비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 권력은 기술보다도 훨씬 더 인간의 손에서 벗어나 있지요. 따라서 그러한 기술적인 수단으로 다른 인간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그 권력에서 제외된 사람들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럽 법학의 상태』, 200쪽)

권력은 다른 모든 이들의 죽음 앞에서 자기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려는 열망의 산물이라 했다. 이는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극단의, 그러나 어쩌면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뜻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는 어떻든 자기 주위를 둘러싼 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만약 그가 ‘버튼을 누르는 행위’만으로 세계 인구의 절반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라면, 그에게 주변의 목소리는 더할 수 없이 절박하고 소중한 정보가 아닐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홀로 살아남기를 열망하는 권력은 역설적으로 다른 살아 있는 목소리에 계속해서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권력의 역설적 구조 때문에 우리의 물음은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고 멀어 보이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결국 권력자의 귀로 흘러들어가는 정보가 된다면, 우리는 어쨌거나 권력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칼 슈미트의 경고를 들어보자. “절대군주라 하더라도 보고된 것과 정보들에 의지하거나 자신의 고문관들에게 의존하지요. 다량의 사실들과 보고된 것, 제안과 추측 고문들이 날마다 시간마다 그에게로 밀려듭니다. 아무리 현명하고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사실과 거짓, 현실과 가능성 등 끊임없이 범람하는 물결 속에서는 기껏해야 얼마 안 되는 물을 퍼낼 수 있을 뿐입니다. [……] 권력자에게 보고하거나 정보를 주는 사람은 그가 책임 있게 보고하는 장관이든 아니든 간에, 또는 그가 권력자와 직접 통할 수 있는 인물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 권력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유럽 법학의 상태』, 185쪽) 스스로 법을 공부한다고 믿었던 한스 켈젠 역시 법에 대한 자신의 전문가적 견해로써 ‘이미’ 권력에 참여하고 있었다. 물론 명확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서 (나치라는) 권력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갔던 칼 슈미트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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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_ "1930년대 초반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일에서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데 동원한 최고의 수단은 바로 '법치주의'였다."

21세기 최고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의 진단에 따르면, 세계는 지금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로 변해 가고 있다고 한다(어쩌면 ‘~있다’라는 진행형의 표현은 틀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칼 슈미트가 극도의 공포 속에서 저주했던(그러나 그도 역시 피할 수 없었던) ‘기계들의 기계=초인간=국가-기계’의 권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전면화되었음을 뜻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태어나는 순간 벌써 권력의 공모자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탄생의 첫 울음을 우는 순간 곧바로 ‘법을 말하는 자들’이 되게끔 운명 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에게 가능성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가능성만큼이나 멀고 아득할 것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법을 말하는 대신, 오로지 법을 공부하기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권력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 권력자의 욕망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니까 결국 괴물-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마도 지금 나의 이 말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는 사람은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서 카프카의 소설들을 집어들 것이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바로 그 카프카의 책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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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5 10:50 2010/01/15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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