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에서 총서의 의미 2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총서가 학술 활동 및 출판 활동에서 갖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총서의 일차적 의미는 인문사회과학 연구와 출판을 연결하는 교량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출판”은 “publishing”이라는 원어가 가리키듯이 좁은 의미의 상업적 활동을 넘어서 사회 전체에 대해 지식과 정보의 내용을 생산ㆍ유통하고 그것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목표로 삼아왔으며, 또 마땅히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 더욱이 전자통신기술 및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오늘날의 “publishing”은 전통적인 의미의 문자 매체 및 활자 인쇄의 영역을 넘어 각종 전자 매체를 사용하는 영역까지 범위가 확대되었다. 게다가 웹사이트와 블로그 등을 통한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이 활성화되면서, “publishing”은 과거와 같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엄격한 구별과 위계를 더 이상 전제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출판이 지니는 의미는 훨씬 더 막중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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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공론의 장으로서의 출판
_ 인문사회과학 연구자, 지식인들의 비판적 사고와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교양 대중의 공론장이 되는 출판.

이런 사정을 감안해보면 그동안 우리나라의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는 모두 급격히 변화하는 여건 속에서 “publishing”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난 1990년대 초에 일부 지식인들이 전자출판이 열어놓을 새로운 미래에 대해 자못 기술결정론적인 낙관론을 펼친 적이 있으나, 새롭게 확장되고 변화된 출판 공간에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사유의 과제를 어떻게 심화하고 전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진지한 고찰이 수행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 한국 인문사회과학계는 신자유주의적인 학술 영역 재편 속에서 점점 비판적 사고를 위한 입지를 잃어갔고, 인문사회과학 출판계 역시 지적 시장의 개방과 학습 교재 및 실용서적 중심의 출판 흐름 속에서 대중적인 저술들의 출판에서 자신의 활로를 찾아왔다. 하지만 대중성 일변도의 출판만으로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인문사회과학 출판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뚜렷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만그만한 수준의 대중적인 교양서들의 출판만으로는 독자들의 지적 욕구들을 얼마간 충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지적 활동을 수행하는 교양 대중을 형성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의 형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 한 오늘날 “publishing”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와 출판계가 공통으로 직면한 과제 중 하나는 한국 사회 공론장의 강화와 교양 대중의 확장이라는 선순환 구조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학계의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고 뜻있는 출판인들의 선의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학계는 대학의 좁은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오직 등재지 논문 쓰기에 매달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사유의 과제를 감당해야 하고, 출판계는 “publishing”이라는 개념이 본래 함축하는 “공론 형성”이라는 의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양자의 노력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을 총서 체제의 구축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총서 체제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1편 보기>>)에서 본 것처럼 총서 체제가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의 생산과 유통, 소비를 좀더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긍정적인 경쟁 관계를 도모하는 장으로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총서 체제가 갖는 두 번째 의의라고 생각한다.

2000년대 한국 지식 사회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이전보다 공론장의 기능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학술계, 특히 인문사회과학계가 이른바 “학진 체제”로 재편되고 등재학술지 중심의 학술지원정책이 정착되면서, 과거 한국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했던 공론 학술지의 기능이 약화되고 그 대신 각종 전공 분야의 학술지를 내는 분과학회를 중심으로 인문사회과학은 점점 더 협소한 전공 분야로 축소되고 파편화되어갔다. 등재학술지 중심의 지원정책이 학술 평가 체계를 세우고 그것을 통해 개별 논문의 수준을 향상시킨 것은 긍정적인 기여라고 볼 수 있으나, 그 대가로 인문사회과학 고유의 비판적 기능이 약화된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87년 이래 한국 사회가 이른바 민주화의 시기로 접어든 이후 민주주의를 공고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또는 말하자면 “민주주의를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공론장의 확장과 내실화가 필수적이었지만, 9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에 편입되고 사회 전체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의 방향에 따라 재편되면서 사회적 공공성과 더불어 공론장 역시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물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화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공성과 공론장의 기능 약화를 피하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특별히 우리나라 인문사회과학계나 출판계를 탓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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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作 <구성 4>
_ 총서 출판은 한국 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의 비판적 지적 흐름을 형성하고 다양한 빛을 뿜어 낼 수 있는 프리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신자유주의에 저항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의 노력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고, 남미를 비롯한 주변부 국가들에서도 대안적인 세계화를 위한 움직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경우 개별적인 몇몇 사례들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비판적인 지적 흐름이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것이 인문사회과학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얼마나 연결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정권이 바뀐 이후에야 비로소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협소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비판적인 논의를 조직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정한 이론적 입장을 선도하거나 공유하는 지식인들이 총서를 조직하여 작업한다면 좀더 효율적인 이론의 생산과 유통 및 대중적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가능하며 또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나 미국 등의 사례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문제는 국내의 지적ㆍ물질적ㆍ제도적 조건 속에서 이러한 모범적인 사례들을 얼마나 독자적으로 수용하고 변용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총서 형식은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을 위한 의미 있는 장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지난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광범위한 교양 대중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경제 규모가 질적ㆍ양적 측면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1980년대 이후에는 고등교육 졸업자가 크게 증가하면서 교양 대중의 규모가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고 교양 대중의 증가는 인문학에 대한 수요의 증가로 이어져서 대학 바깥에서 다수의 인문학 연구 공간이 생겨나고 대중 교양 강좌들이 개설되었다. 또한 출판에서도 대중적인 인문학 저술의 수요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처럼 두드러진 교양 대중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정작 대학에서는 이러한 수요를 적절하게 수용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학 바깥의 사설 기관들에게 일임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인문학 위기에 대한 목소리는 바로 대학 영역 안에서의 인문학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이러한 목소리 속에 대학 바깥에 존재하는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의 문제에 관한 관심과 고민은 그다지 많이 담겨 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인문학 수요가 증가했다는 사실 자체는 반기고 있지만, 그러한 수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교양 대중과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 또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어떻게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출판계는 대중 교양서와 인문서 출간으로 “공론 형성”의 기능을 대신해왔다.

이러한 괴리를 넘어서 교양 대중과 좀더 의미 있는 지적 소통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총서 체제를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대학이 지닌 인문사회과학 역량을 좀더 효과적으로 교양 대중에게 제시하는 일이면서 출판사가 지닌 공론 형성의 기능을 좀더 충실히 수행하는 길이기도 하다. 교양 대중은 단지 지식의 객체, 교양 지식의 소비자인 것만은 아니다. 스피노자와 그람시 또는 랑시에르가 각각 강조했듯이 인간은 사고하며 대중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교양 대중과의 지적 소통은 대학의 연구자들이 대학 바깥의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지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일방적인 방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것은 대학의 인문사회과학 담론이 사회의 좀더 넓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에 대중들이 지닌 집단적인 창발적 능력이 새로운 지적 담론과 상상력을 고무하는 상호 구성적인 방식으로 작동해야 한다. 우리는 총서 체제가 이러한 관계 방식을 고무하기 위한 유용한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이 글은 그린비 <프리즘 총서> 기획위원이신 진태원 선생님께서 작성하신 총서 소개글 3편 중 2편으로, 3편은 금주 금요일(22일) 오전 포스팅됩니다.
+ 1편 <그린비 [프리즘 총서] 발간! - 인문사회과학에서 총서 출판의 의미> 보러 가기 >>

2010/01/21 10:52 2010/01/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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