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어느 곳에나, 어떤 상황이든 언니는 있다!

여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다양한 주제를 만났습니다. 타자의 정치학, 오이디푸스 구조를 벗어난 가족 질서, 해석에 따라 자신의 얼굴을 달리하는 텍스트 등. 이론으로 공부할 땐 한없이 어려웠던 말들이 낯선(뜬금없는) 책 속에서 이해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었습니다. 여기 소개된 책들은 그렇게 난관(?)에 갇혀 있던 저에게 그건 요런 거란다~라고 말해 줬던, 저의 스승님들입니다.

:: 아버지의 덫 | 지그리트 슈타인브레허 | 이승은 |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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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가 문제라니깐뇨!
저 인정 욕망이 참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직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아집과 욕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었다고나 할까요. 관계 속에서 일을 한다란 이야기, 말은 잘 했으나, 실제로 그게 어떤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몰랐을 겁니다.

한 가족 안에서 아버지의 지위는 특수합니다. 배치 자체가 그러하죠. 엄마가 아무리 능력이 많고,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하더라도, 아빠가 없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니까요. 이러한 생각들은 그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어쨌거나 아빠(가부장)의 자리를 강조하는 이런 태도들은 아버지가 만들어 내는 규범들을 당연한 것들로 생각하게 만들고, 그 규범의 승인을 받는 일이 성장의 중요한 과정인 것처럼 보이게 하죠. 이 책은 그런 가부장제의 덫을 벗어나지 못하면, 여성들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남성적 승인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여성들의 삶은 허망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보여 주죠.

:: 죽음의 행군 | 빌 맨틀로․장 피에르 디오네․피카레(글)․장 클로드 갈(그림) | 문신원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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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낯선 그림!
고3 올라갈 무렵, 학생회관이 버스 잘 안 다니는 동네로 이전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이 아니면 가기 힘들었던 그곳을 저는 버스를 타고 한참 걸어서 갔답니다. 거기 도서관 목록이 엄청 좋다는 소문을 들었거든요. 도서관에서 한참 새 책들을 마치 제 책인 냥 살고 있었는데, 그동안 제 눈에 띄지 않던 도서관 하단에 엎어져 있는 그림책들을 발견했습니다.

전쟁 만화는 질색팔색이었지만, 이 책은 여는 순간 반해 버렸습니다(대학 와선 이 만화 찾겠다고 난리법석이었는데, 제목을 몰라 못 찾았었죠). 한 컷 한 컷 어찌나 섬세하게 그렸는지, 넉넉 잡아 한 컷당 8시간 이상 걸렸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대성당의 비밀」,「정복자의 군대」,「아른의 복수」 이렇게 3가지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전 그 중에서도 「대성당의 비밀」을 좋아합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거의 쾌감(?) 수준이었습니다. 아마 스스로도 불편한 허무주의에 대한 열광은 그때부터 있었나 봅니다.

::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 로사리오 페레․릴리아나 에케르 외 | 송병선 |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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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복간하라!
라틴아메리카 여성작가들이 쓴 소설이라, 호기심은 생겼지만 내용이 재미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그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상충하고 부딪히는 이야기들을 그냥 한 권에 묶어 놓은 것은 아닐까 의심했었죠. 역시나 그건 기우였습니다. 역사적 맥락을 다 파악하지 못했는데도, 이야기 자체가 사람을 휘감아 버리는 묘한 책이었거든요.

젊은 여성으로 대표되는 여성성을 파괴하고 미끄러지고, 끊임없이 변형되는「할머니와 황금다리」, 여성작가가 남성의 관점으로 여성을 보는 3중 시점의 소설 「시네 프라도」, 마지막 반전으로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타인의 축제」등. 그 넓은 라틴 아메리카를 그저 삼바 축제와 축구, 와인 정도로 축소시켜 버리는 일이 얼마나 폭력인지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면 저 오바일까요? 오바라도 좋습니다. 함 읽어 보셔욤.

:: | 배수아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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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는 독자 수만큼의 주인공이 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 안 해보셨나요? 누가 내가 사는 걸 들여다보고 있나? 같은 뭐 이런 생각이요.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람들 역시 우리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저에겐 가상의 인물과 제가 늘 교차하는 지점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이후로 배수아에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그녀가 자기 소설에서 인용했던 쿳시의 소설들까지 모조리 읽었었죠. 『당나귀들』, 『동물원 킨트』 같은 책을 읽다가 『훌』을 만났습니다.

성별도, 연령도, 국적도 어느 하나 주인공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가 나오지 않는 이 소설은 다 읽고 나서 독자의 기분을 묘하게 만듭니다. 주인공을 설명해 주는 묘사가 없는데도, 저는 훌을 20대 여성이며, 노동자라고 단정 짓고 있었거든요. 저에겐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자신의 맥락에서 재규정된다고 생각했었으나, 몸으로 경험했던 건 「훌」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항상 읽는 ‘나’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 ‘읽는 나’는 매번 다르기에, 책 역시도 항상 달라질 수밖에 없죠. 전 그래서 읽었던 책이 언제나 똑같이 읽힌다고 하면, 그땐 저자가 죽은 게 아니라 독자가 죽은 거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 마녀 | 이가라시 다이스케| 김완 | 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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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생을 살아가는 여자들이 바로 마녀!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고,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악마와 내통하는 “마녀”. 마녀사냥이 지닌 다른 맥락들(비혼 여성의 재산을 갈취하려고 만든 재판, 나이 든 여성들의 지혜가 두려워 발생시킨 일 등등)이 조금씩 알려지고 있긴 하나, 여전히 우리에게 마녀는 여전히 코가 구부러진 못된 마법사의 대명사인 듯합니다.

독특하고 낯선 그림체만으로 저를 홀랑 반하게 했던 이 책은 읽어 보니 내용이 더 훌륭하더군요.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고, 언어에 의한 교감이 아니라 직관으로 이해하려는 태도. 거기다가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있는 남성들(가톨릭 수사들)과 달리 성찰과 여행으로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가는 마녀들의 삶은 그 자체로 매혹이었죠. 전 이 책을 읽으며 이제 마녀는 재정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의 생을 만들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가부장적 질서에 끊임없이 균열을 내는 사람으로 말입니다.

- 편집부 강혜진

+ 이 글은 3월에 발간될 인문 스트리트 매거진 『gBlog 3호』 북섹션에 수록될 글입니다. 더욱 풍성한 글과 책들로 가득한 gBlog 3호! 다음주부터 예약 신청을 받을 예정이니 잊지 마시고 꼭 신청해 주세요. ^^* gBlog 2호는 내일! 배포를 마감합니다. 아직 못 받아 보신 분이 계시다면 서둘러 신청하세요~ gBlog 2호 받아 보기 >>

2010/02/04 10:50 2010/02/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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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뿡 2010/02/04 13:45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절판된 걸 아는 분이 출판사에 부탁해서 구해주셨어요. 읽고 싶어서 애가 탔었거든요. 두어 편을 제외하고는 제 기대에 그닥 못 미쳐서, 살짝 아쉬웠긴 한데 그래도 만족은 합니다. 그만큼 좋았던 단편들이 워낙에 매력적이었어야 말이죠. 아, 그리고 좋은 책 추천 감사합니다!!! g blog는 제 콜렉션이라는~

    • 그린비 2010/02/04 13:56

      와, gBlog 콜렉터'0' 딸뿡님 반갑습니다~^^!!
      <난 여자들이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 빨리 복간 되었음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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