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석 (수유너머 N)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다.” 헤겔의 이 마법 같은 속삭임에 푹 빠져든 벨린스키는 1838~1840년을 ‘현실과의 화해’라는 수렁 속에서 허우적댔다. 농노제와 전제정이라는, 당대 러시아 사회의 ‘극악무도한’ 질곡을 고발하고 규탄하는 데 앞장서던 이 진보적 비평가/비판가는 어느새 삶의 아름다움을 상찬하고 비뚤어지고 모순된 현실 속에 숨겨진 합리성을 찾으라고 독려하는 보수적인 논객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벨린스키의 ‘전향’이 차르 정부의 관제 이데올로기에 직접 섞여 들진 않았다는 점이다. 왕년의 골칫덩어리 반항아에게는 국가를 위해 봉사할 메가폰이 결코 쥐어지지 않았다. 비밀경찰은 여전히 그를 의심스러워했고, 벨린스키는 아직 가난한 채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성마르고 올곧은 인간의 전향은 시(문학)와 철학, 관념 속 세계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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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와 헤겔
_ "맑스를 읽으며 끊임없이 헤겔로 되돌아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맑스로" 갈 수밖에 없는 맑스와 헤겔의 사상.

맑스의 사상적 뿌리가 헤겔이었고, 헤겔을 넘어섬으로써 맑스는 세계의 ‘해석’으로부터 세계의 ‘변혁’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었기에 구소비에트 사상계에서 헤겔이라는 계단은 경멸감을 수반한 매혹과 필연의 대상이었다.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되기 위해 단연코 거쳐야 할 관문이 헤겔이며, 맑스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시험대가 헤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루카치(György Lukács)가 맑스를 읽으며 끊임없이 헤겔로 되돌아가고, 헤어졌다가 다시 맑스로 가는 길의 이정표를 헤겔에게서 더듬어 봤던 것도 전혀 우연은 아니다. 러시아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1917년의 혁명 이전까지 헤겔의 망령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머릿속을 떠돌아다녔으며, 혁명 이후 러시아 맑스-레닌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헤겔의 논리학과 역사철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그들이 찾아낸 러시아 헤겔주의의 비조(鼻祖)가 바로 벨린스키였다. 헤겔에 대한 그의 열광과 결별의 스토리는 러시아 맑스주의의 정통적 노선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벨린스키의 헤겔 연구에는 여러 가지 의혹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벨린스키가 활동하던 시절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헤겔의 저작은 거의 전무했다. 몇몇 잡지에 실린 짧은 소논문이나 헤겔 사상에 대한 (몹시 인상적인!) 개괄적 소개글이 그 대부분이었으며, 벨린스키에게 지대한 영향과 감흥을 주었다는 『미학』의 경우 완전한 러시아어 번역은 그의 사후에나 이루어진 일이었다. 독어 실력이 짧았던 벨린스키가 의존할 수 있는 원어 자료도 드물었으며, 이런 그의 헤겔 연구를 지도하고 도와주었던 이들은 대개 독일에 유학을 다녀와 헤겔의 강의를 직접 수강했던 그의 친구들이었다. 유럽의 전통대로 대학 노트에 빽빽이 적어온 강의록을 빌려 읽으며 벨린스키는 헤겔을 이해하려 고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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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의 연설
여기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은 그 의 가장 훌륭한 교사 역을 자임해 주었다. 훗날 극단적 아나키스트로 이름을 떨치는 바쿠닌 역시 청년기에 조국에 몰아닥친 ‘화해의 열풍’을 비켜설 수 없었는데, 1838년 『모스크바 관찰자』지에 헤겔을 좇아 “전(全) 방면에서 현실을 수용하는 게 이 시대의 막중한 임무”라고 피력함으로써 급진적 비판가들을 일제히 전향시킨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바쿠닌에게 자주 의지하던 시절의 벨린스키가 헤겔을 받아들인 통로도 바쿠닌이었고, 이런 점에서 우리는 벨린스키의 헤겔주의에 미묘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서구의 비평가들은 벨린스키의 헤겔 연구가 ‘간접적’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면서, 그의 헤겔 이해가 막연한 추론과 공상에 입각한 ‘사이비 신앙’에 불과했음을 성토하곤 했다. 애초에 체계적인 지식에 기반한 신념이 아니었으니 그 이탈 역시 별반 대단한 사건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는 나아가 러시아 급진주의 운동의 이념적 공허함을 비판하는 쓸 만한 빌미가 되었다. 하지만 사정은 과연 어떠했을까?

1841년 3월 1일 벨린스키는 오랜 친구 보트킨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이른바 탈(脫)헤겔의 징표를 보여 준다는 글이다.

“헤겔에게 인간 주체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보편적 이념을 표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네. 이 보편자란 주체에게 무조건적인 희생만을 강요할 뿐이지……. 경애하는 헤겔 선생, 난 당신의 철학자의 관모(冠帽)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당신 철학에 대단한 존경심을 갖는 한편으로,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영광스레 알리는 바입니다. 만일 내가 역사의 발전이라는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올라선다 할지라도, 거기서 난 당신에게 삶과 역사에 있어서의 온갖 희생들, 우연과 미신, 종교재판과 전쟁 등등의 희생에 대한 답변을 요구할 거란 말입니다. 납득할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난 기꺼이 그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내 머릴 던져 버리고 말겠습니다. 만일 나와 피와 살을 나눈 형제들 그들 각자의 행복을 모른 척해야 한다면, 나 혼자만의 행복 따위는 전혀 바라지 않소이다!”

『역사철학』의 유명한 경구에 의하면, 절대정신이 이끄는 ‘역사’라는 이름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무심히 전진에 전진을 거듭할 뿐이어서, 그 행로에 놓인 작은 꽃이 짓밟히는 불운을 피할 수 없다. 작은 희생 하나하나는 역사라는 커다란 수레바퀴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감수해야 하는 비극이란 말이다. 이 비극의 관찰자가 역사의 입장(‘보편자’)에 선다면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거기엔 애석해할 것도 노여워할 것도 없다. 그게 역사의 필연이요, 운명이니까. 헤겔에게 역사의 이성성이란 바로 이런 희생의 불가피성, 불가피한 희생들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었다.

하지만 벨린스키는 이제 짓밟히는 작은 꽃들 하나하나를 대변하려 한다. 그 어떤 위대한 소명과 대의도 보잘것없는 꽃(개별자)에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 지상주의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가라는 이름의 추상적 괴물에 항거하는 집합적 대중의 자기의식, 즉 ‘사회적 개인들’의 반란이었다. 자기 시대에 대한 비평/비판(criticism)이라는 반란! 이로써 벨린스키의 문학 비평은 더 이상 우미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도 아니요, 현실 속 보편자의 형상을 궁구하는 사변도 아니게 되었다. 그에게 비평/비판 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현실의 폐해를 신랄하게 파헤치며, 그로써 현실을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변형시키도록 촉구하는 데 있었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객관적 미(美)란 곧 사회적 선(善)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으로 선한 것이 객관적으로도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움이 사회적 복리와 연관된다면, 아름다움의 이데아가 따로 있을 턱이 없다. 현실의 아름다움이란 언제나 교정되어 그보다 더 나은 아름다움, 곧 사회적 선에 이어져야 하고, 이 운동은 헤겔식으로 말한다면 역사의 종점에 다다를 때까지 부단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항상 변화할 수 있는 의지와 추진력이지 현실은 이미 이성적이라느니 하는 따위의 헛된 위안(‘화해’)이 아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헤겔-맑스주의자들은 바로 이 후자의 논리, 즉 항상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헤겔의 진면목이자 맑스의 진정한 토대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벨린스키는 헤겔의 ‘신앙’으로부터 벗어나서야 비로소 헤겔의 ‘논리’에 접속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헤겔주의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그는 여전히 헤겔주의자/근대주의자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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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근대문학의 세 대가 <푸슈킨, 레르몬토프, 도스토예프스키>

사회적으로 연대한 개인들의 집합을 벨린스키는 민중(narod)이라 불렀고, 그의 비평 활동의 마지막 시기(1842~1848년)는 문학의 민중성 혹은 민중문학의 싹을 러시아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발견하는 데 온통 바쳐진다. 소박하고 진실한 민중 생활에 바탕을 둔 (계급적으로는 귀족이었으나) 푸슈킨(Aleksandr Pushkin)과 레르몬토프(Mikhail Lermontov)의 작품들을 러시아 근대문학의 위대한 출발점이라 선언하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 하층 민중의 눈물과 희망을 본 것도 이 마지막 전회가 없었다면 정녕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남겨 두자.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1846)은 벨린스키의 전폭적인 성원과 지지를 받으며 문학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후속작들이 연이어 범타에 머무름으로써 벨린스키의 조소를 샀고 둘의 관계는 영 껄끄러워졌으며, 그가 갑작스럽게 타계함으로써 영원히 단절되고 말았다. 더구나 사회주의적 음모 혐의로 유형을 다녀온 다음, 도스토예프스키가 우파로 전향함으로써 사상적으로도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의 전향 이유는 다름 아닌 자유에 대한 사랑이었다. 전체 속에 몰각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모두가 2×2=4를 외쳐도 홀로 2×2=5를 외칠 수 있는 권리가 바로 자유다. 이런 자유야말로 벨린스키가 말했던 보편자를 거부하는 개별자의 자유가 아닐까? 그 해답은 다음 꼭지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2010/02/05 10:53 2010/02/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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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지은 2011/06/13 08:54

    글 잘 읽었습니다^^

    • 그린비 2011/06/13 09:36

      블로그에서 자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