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

조효원 (문학평론가)

바야흐로 ‘평생 교육’의 시대다. 이는 오늘날 ‘자본의 신’께서는 돈이 아니라 ‘배움’의 영역에서 더욱 무자비한 위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신의 뜻에 따라,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옛말이 극단적인 역설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배우는 자들은 이르게는 유치원 시기부터, 혹은 평범하게는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쉴 새 없이 지식과 지침들을 주입받고, 문제 유형과 정답을 외우며 성장한다. 그런 다음 대학생이 되어서는 다시 취업에 필요한 영어 단어와 시사 상식, 그리고 경영 원리와 회계 기술들을 씹지도 않고 마구 삼켜대야만 한다. 그러나 ‘배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가서는 다시 국제화와 경쟁력이라는 재빠른 두 마리 토끼를 포획하기 위해 출근 전이나 퇴근 후의 시간을 쪼개 학원 강의를 들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회사에 적응해서 업무를 스스로 처리할 때가 되어도 ‘배움’의 기차는 멈추지 않는다. 회사가 요구하는 성공적인 ‘자기계발’을 위해서는 유창한 외국어와 능숙한 업무 능력뿐 아니라 무엇보다 마음을 다스리고 자존감을 키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 슬픈 사실은, 이렇게 숨 가쁘게 돌아가는 배움의 쳇바퀴가 멈췄을 때 어디에 다다르게 되는지, 그리고 거기에서 이제껏 ‘계발된 자기’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것은 배움의 체인이 돌아가는 구조 자체에서 유래하는 현상이다. 즉 배움의 구조 안에서는 한 가지 목표가 눈앞에 세워지면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쫓아가야 하고, 이 목표가 달성되면 곧바로 또 다른 목표가 닥쳐오는 것이다. 목표는 언제든 저 앞에 있는 것이므로, 배우는 자는 그저 그것을 열심히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 ‘평생 교육’의 체제에서 필요한 것은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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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쳇바퀴
_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이 시대의 배움에는 끝이 없다. 평생 교육, 자기계발에 매진해야 하는 이러한 구조, 체제를 벗어난 배움은 없는 걸까?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문득 ‘분별없는 열정’이라는 책 제목이 생각난다. 이어서 ‘분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다음과 같은 독설도 떠오른다. “분별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체계가 그것을 극복해 버린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분별 같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편력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소크라테스는 그의 독특한 분별로 인해 그처럼 마음이 순박한 현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입으로 말하고 몸으로 나타내었으나, 그 분별은 2천 년이나 지난 뒤에야 저 괴짜인 하만(Johann Georg Hamann)에 의해 겨우 되살아나 이렇게 감탄을 받았다. ‘생각건대 소크라테스의 훌륭함이란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한 데 있다’라고.”(『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09, 제사 전문) 무한히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배운 것을 재빨리 써먹고, 그렇게 써먹은 지식 덕에 끝없이 이어져 있는 목표의 과녁들을 하나씩 하나씩 경쾌하게 넘어뜨리면서 달려 나가는 ‘배우는 자’들의 모습에서 소크라테스의 ‘순박한 분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분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힘들여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어쨌든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가? 나는 어째서 ‘배움’에의 열정을 불태우는 성실한 사람들을 매도하고 있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아무런 배움도 주지 않는 이상한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막 읽은 터라 그런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이 이상한 학교,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성실한 태도로 꾸준히 배우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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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멘타 하인학교』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학교다. 이 이상한 학교를 다니는 어느 학생이 일기를 썼는데,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가 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내면서 “야콥 폰 군텐Jakob von Gunten”(이 책의 원제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벤야멘타 하인학교: 야콥 폰 군텐 이야기』, 홍길표 옮김, 문학동네 2009, 7쪽)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니. 이름부터가 기이하기 그지없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전근대적 신분 계층의 하나인 ‘하인’—물론 이것은 변형되고 약화된 형태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은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는 존재다. 학교란 기본적으로 교양(Bildung)을 전수하는 제도-공간이므로, 교양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인에게 학교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장소(utopia)인 것이다. 그런데 로베르트 발저는 ‘하인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우습게도 가르치는 교사도 없고, 아무것도 배울 게 없는 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야콥 폰 군텐의 ‘하인학교’만이 그런 게 아니라 실로 모든 학교, 나아가 학교 자체가 사실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곳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벼운 농담처럼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학교에서 배운 건 아무 쓸모도 없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않은가?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깊은 생각에 의한 ‘분별의 작업’이다.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야콥 폰 군텐』을 읽어 나가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바로 ‘분별’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야콥의 일기에는 무수히 많은 사변과 통찰, 그리고 기괴한 사고 실험(experimentum)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생각. “하지만 순응하는 것, 그건 생각하는 일보다 훨씬, 훨씬 더 고상한 일이다. 생각을 하면 저항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은 항상 꼴사납게 일을 망쳐버린다. 철학자들,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망쳐놓았는가를 알기나 할까.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들이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학술적으로 다루고, 이해하고,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인류는 삶에 대한 용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다.(101쪽) 또 이런 역설.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두 배로 하라는 것을 뜻한다. 무심하고, 신속하게, 가볍게 내려진 허락보다 더 따분한 것은 없다. 나는 모든 것을 얻고 싶다.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다. 웃음도 그야말로 극단적인 경험을 필요로 한다. 웃음으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을 때, 타들어가는 화약을 모두 어찌해야 좋을지 모를 때, 그때 나는 비로소 웃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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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 作 <명상에 잠긴 철학자>
_ 이해하고, 생각하고, 머리로만 일하는 철학자(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정작 삶에 대한 용기는 잃어버린 채 행동하지 않는다.
야콥 폰 군텐은 배움으로써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경험함으로써 배울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것이 진정 철학'하는' 자의 모습이 아닐까?

만약 야콥이 위의 이야기들을 문자로 쓰지 않고 실제 목소리로 발화하는 것을 듣는다면, 그때의 느낌은 아마 전율에 가까울 것 같다. 생각이 많은 철학자, 삶에 대한 용기를 잃어버린 채 쓸모없는 머리만을 달고 있는 인류 전체를 싸잡아 비난하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순응하기를 권했던 그의 목소리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심오한 철학자의 목소리로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두 배로 하라는 것을 뜻한다.’ 게다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학교를 다니는 야콥이 어떻게 해서 저토록 깊은 성찰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뭔가 스멀거리는 느낌을 주는 이 의아함은 나로 하여금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기상천외한 작가의 머릿속은 온통 음모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세상의 모든 학교를 일거에 폭파시킨 뒤, 마치 신과 같은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채 이 세계를 유유히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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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는 사회
학교에 대한 반감 혹은 반항심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감에 적절한 연료가 되어주는 책들이 있다. 이반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가 대표적이다. 나도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었다.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 모든 가치가 제도화된 사회로서,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건강은 병원에 의해, 존엄은 사회복지제도에 의해, 신앙은 교회에 의해, 그리고 공부는 학교에 의해 관리된다. 그러나 일리히의 책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 책을 읽던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야콥 폰 군텐』을 읽고 나니 알겠다. 학교를 없애자고 이야기하는 일리히의 책은 그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또 하나의 강압적인 학교였던 것이다. 야콥이라면 아마도 일리히에 대해 자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망쳐놓았는지도 모르는 철학자라고 비난했을 것 같다. ‘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강력한 목소리를 내지르기 위해 일리히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을 해야만 했을까?

그런데 지금 야콥의 목소리를 빌려 철학자 일리히를 매도하는 나는 나 자신이 앞에서 매도했던 ‘배우는 자들’의 분별/생각없음을 다시금 칭송하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일리히의 철학이나 배우는 자들의 열정을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다만 나도 저 이상한 학교,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벤야멘타 하인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소망을 갖게 된 것은 야콥 폰 군텐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 노력해 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하찮은,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는 소중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학교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없는 학교’를 다니면 된다는 것. 이것은 내게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철학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철학을 공부하되, 학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오직 ‘이 세상에 없는 이야기’만을 써야 한다는 것. 소크라테스가 그랬듯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분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러한 분별이 나 자신에게 아무리 소중할지라도 이것을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저 이상한 학교의 더욱 이상한 학생, 야콥 폰 군텐에게 나는 배웠다. 비록 그는 내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인생에서 의미 있는 것을 기대해야만 하는 거지? 꼭 그래야만 하나? 나는 그저 미미하기 짝이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내가 작디작은 아무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것을, 그것을 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집한다.”(1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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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1 16:57 2010/02/11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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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이 세상에 없는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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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브홀릭 2010/02/12 16:26

    일리치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요. 일리치는 이 사회가 '학교화'됨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배울 수 있는 다양한 기회와 배움들이 사라지고 있음을 비판한 것입니다. 경쟁과 성장(발전)이 지배하는 이 사회가 모든 가치를 이에 종속시키 모습을 일리치는 평생 천착하게 비판해 왔을 뿐, 누구에게 강압적인 주장이나 가르침을 하지 않았습니다.

    로베르트 발저의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가 보기엔 오히려 일리치의 생각과 일치되는 점이 많아 보입니다. "개인을 집단사고의 노예로 훈련시키는 것", "규격에 맞는 삶 이외의 대안에 인색한 획일주의적 발전논리" 등에 반대하는 것은 분명 일리치의 생각과 일맥상통하니까요.

    • 그린비 2010/02/12 15:44

      포스트에서 이야기되는 책도 일리치의 책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어떤 텍스트를 보는 시차는 모두 다르다는 점은 다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ㅋㅋ 어쨌든 학교와 사회의 관계, 성원들의 의식에 주늠 영향은 다시 생각해봐야겠네요.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