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전체주의란 이렇게 손쉽게 만들어진단 말인가, 영화 「디 벨래

조효원 (문학평론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직면했을 때, 느닷없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파도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이야.” 그렇다. 인생은 세월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이루어져 간다. 하므로 인생의 흐름, 세월의 물결에 파도가 없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짙은 감상에 젖어 ‘인생무상’을 읊조리기도 하고, 체념의 씁쓸함을 맛보며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위로의 단어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처럼 오래 묵은 지혜의 말들마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도 있다. 그것은 파도가 한 개인만을 덮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의 큰 부분을 공유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그것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광포하게 휩쓸어 버릴 때이다. 불과 얼마 전에도 지구의 연약한 피부 곳곳에 쓰라린 상처를 남긴 지진과 쓰나미처럼 말이다. 도무지 헤어 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파도가 덮칠 때, 우리의 모든 의지와 이성은 한낱 물에 젖은 휴지처럼 간단히 뭉개져 버리고 만다. 역사를 통해, 그리고 날마다 보도되는 뉴스들을 통해 우리는 이처럼 광포한 자연의 파괴의 힘에 의해 찢어진 인생들의 비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자연의 파괴는 우리에게 지옥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잔인하고 무자비한 위력으로 우리를 덮친다 해도,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다만 비극의 기억일 따름이다(물론 이 비극은 너무나 슬프고 아픈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을 넘어서 정말이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을 선사해 주는 거대한 파도가 있다. 이 파도의 거대함은 가히 마법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로 압도적인 거대함인 동시에 집요한 거대함이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휩쓰는 파도인 동시에 뇌세포 하나하나를 모조리 썩게 만드는 파도. 우리는 이 파도의 역사를 알고 있다. 나치즘과 파시즘, 요컨대 전체주의라는 무서운 파도의 역사를. 이 악마의 파도에 휩쓸렸던 사람들은 결코 인생무상이니 새옹지마니 하는 한가로운(?) 말들을 내뱉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얼굴에 짓눌려 유령처럼 살았고, 죽인 자들은 ‘인간’이라는 명함을 반납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파도가 휩쓸고 간 뒤 태어난 아이들은 그것과 관련된 이름들조차 결코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무거운 금기 아래 자라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독일의 데니스 간젤(Dennis Gansel) 감독이 만든 영화 「디 벨레」(Die Welle, 2008)는 바로 이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매우 특별한, 가여울 정도로 어리석었던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어리석었다는 것은 그들이 저 무겁고 무서운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고, 가여운 것은 그들이 저 금기의 땅에서 자란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탓이다. 대강의 이야기는 이렇다. 라이너 벵어라는 김나지움(고등학교) 교사는 특별 세미나 기간에 아이들에게 ‘독재정치’에 대해서 가르치게 되었다. 벵어는 아이들에게 지루하고 따분한 수업이 아니라 강렬하고 생생한 체험학습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럽게 조금씩 아이들을 선동하여 ‘독재’라는 것의 무서움을 실제로 맛보게 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확고하게 심어 주려 했다. 이러한 벵어 선생의 선동에 이끌린 ‘독재정치’ 세미나의 참석자들은 마침내 ‘디 벨레’(‘파도’, ‘물결’이라는 뜻이다)라는 조직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다 함께 리듬에 맞춰 호흡하고 체조를 하면서 조금씩 싹튼 ‘집합 정신’은 흰 상의와 청바지를 유니폼으로 착용함에 따라 한껏 고양되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그저 무료함과 따분함에 몸을 뒤틀던 아이들의 눈에 생기가 돌고, 그에 따라 이제 ‘디 벨레’의 활동은 교실 밖으로까지 확장되기에 이른다.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조직의 제스처(물결 표시)를 만들고, 상징(덮쳐 오는 파도의 모양)을 디자인하여 도시 곳곳에 흩뿌리고 다니면서 점점 더 ‘조직의 힘’에 대해 강력한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들은 매일매일 벨레(물결)를 상징하는 몸동작으로 서로 인사함으로써 유대감을 강화해 나갔다. 이렇게 되자 ‘독재정치’ 세미나에 참여하지 못했던 주위 학생들도 하나둘씩 ‘디 벨레’에 가입하고자 모여들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발전(?) 과정을 지켜보는 관객의 눈동자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득 서리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치즘의 상징 <하켄크로이츠(게르만족의 십자가)>와 파시즘의 상징 <릭토르>

벵어 선생의 조직적 선동——그는 조직의 영도자(Führer)를 자처한다——에 강력한 의구심을 품은 유일한 학생인 ‘카로’는 ‘디 벨레’의 폭력성에 맞서 투쟁하기 시작한다. 카로의 중뿔난 행동을 미심쩍게 여긴 ‘디 벨레’의 조직원들은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나중에는 너무나 노골적으로 카로를 배제하고 따돌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긴장 관계를 바라보는 관객의 마음은 더욱 조마조마해진다. 더욱이 이 긴장감은 선생 벵어의 예기치 못한 변모(?)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동료 교사이기도 한 아내가 아이들을 선동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난하자 벵어는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깔보다가 이제 아이들이 자신을 잘 따르니까 시샘하는 거냐고 아내에게 도리어 언성을 높였던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면 이제 관객의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아이들은 그렇다 쳐도, 성숙한 성인인 벵어, 그것도 고급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인 그마저도 이렇게 순식간에 변하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강력한 힘을 ‘조직’과 ‘집합 정신’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진정 이런 것이 ‘독재’의 힘인가 하고 말이다.

마침내 그날이 다가왔다. 여러 곳으로부터 항의를 받아 수업을 못하게 된 벵어 교사는 비밀리에 ‘디 벨레’의 멤버들을 강당으로 불러 모은다. 빼곡히 들어찬 아이들은 한결같이 흰 상의와 청바지를 차려 입고서 가지런하게 배열을 맞추어 앉아 있다. 연단에 올라선 벵어 선생은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을 통해 서서히 ‘벨레의 정신’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그의 연설은 썩어빠진 독일과 추잡한 탐욕으로 비틀거리는 기업, 그리고 자본에 대한 독설과 비난을 지나 마침내는 전 세계를 갈아엎자는 강력한 선동으로까지 치닫는다. 흥분한 ‘디 벨레’의 조직원들은 함성을 지른다. 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는 관객들은 온몸의 피부 세포가 일순간에 오롯이 일어서는 오싹함을 경험한다. 이런 것인가, 독재란, 전체주의란 이토록 손쉽게 만들어지는 것이란 말인가. 아무런 범죄나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러한 집회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관객은 충분한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차마 뭐라 말하기 힘든 지옥의 광경이…….

사용자 삽입 이미지
_ 나치즘과 파시즘은 극악무도한 독재가 아니라, 대중의 열정과 광기가 낳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영화를 본 뒤 나는 이렇게 자문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덮쳐오는 지옥의 파도는 어디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실로 하나의 작은 물방울에 불과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임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그러나 어쨌든 자발적으로(!) 광기의 대열에 합류하여 다른 수많은 물방울들을 삼키는 파도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치즘과 파시즘, 전체주의라는 파도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으며, 따라서 앞으로도 언제 어디서 순식간에 덮쳐 올지 아무도 모른다. 즐거운 파도타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끔찍한 괴물의 힘에 휩쓸린 것임을 깨달았을 때,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우리는 사소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가끔씩 밀려드는 작은 파도들을 넘을 수 있고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만드는 거대한 파도, 거대한 해일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 일단 그 파도를 타기 시작하면, 그것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때에는 아무리 잘난 이성, 아무리 강한 의지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하므로 나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길 원하는 여러분께 토마스 만의 이 말을 항상 가슴에 새겨 두길 권한다. “세계가 정말로 완벽한 지옥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삶에 대한 맹렬한 의지가 아직도 완전히 거기에 이르지 못한 까닭일 뿐이다. 의지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 더 큰 삶에의 의지였더라면, 지옥은 완벽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염세주의의 한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삶과 저주받은 의지에 대한 살을 뜨는 아픔의 비난일 따름이다. 이는 언젠가 쇼펜하우어가 농담으로 삶이란 ‘바로-아직도-존재-할 수 있음(das Eben-noch-sein-Könnnen)’이라는 칼날 위에 서서 아주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한 말과 유사하다.”(『쇼펜하우어·니체·프로이트: 토마스 만, 현대 지성을 논하다』, 원당희 옮김, 세창미디어, 2009, 31쪽)
2010/03/19 10:45 2010/03/19 10:45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96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들풀처럼 2010/03/19 15:47

    이 글을 읽는 것마능로도 머리끝이 쭈빗쭈빗 서는군요.
    특히나 요즘같은 침묵이 강요되는 우리 현실과 겹쳐지면...
    더욱 아득합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 만으로는 안되는 날들이 자꾸 다가옵니다....쩝..

    • 알라 2010/03/19 17:12

      저두 오싹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는 것만이 아니라, 아예 흐름을 바꿔 놓지 않으면 영화 속 인물들이 되어 버릴 것 같아요.

  2. 하늘아래 2010/03/27 02:22

    오... 내친김에 영화까지 봤습니다. 살짝쿵 무섭죠. 일주일간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 정말 전체주의가 이렇게 쉽게 이루어질까 의문이 들 정도였죠. 유튜브에 1980년대 동명의 영화가 있네요. 아마 2008년도 영화는 리메이크였나봅니다. 1980년대 영화 말미에 1967년도에 미국에서 있었던 실제 사건을 구성한거라고 나오던데요. 흠냐.. 오싹...

    1980년대 영화처럼 파시즘이 이렇게 쉽게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모두들 깨달음을 얻은 듯 울며 집으로 돌아가는... 착한 영화가 현실이길 바랍니다. 2008년 영화는 너무 비극적이죠.

    오싹해 하고만은 있을 수 없죠...!

    • 그린비 2010/03/29 10:29

      우와앙. 영화까지 보시고 요런 자세한 정보까지 전해 주시다니 훈늉하십니다. (포스팅의 목적 달성? +ㅅ+ㅎㅎ)
      아..근데 현실은 착하지 않을 것 같아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