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라디셰프와 러시아 계몽주의의 정신

최진석 (수유너머 N)

그럼 여기서 서구주의의 정신적 계보를 더듬어 올라가 18세기 러시아로 떠나 보자. 차아다예프를 다루는 자리에서, 19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정신과는 다른 의미에서 ‘최초의 인텔리겐치아’로 손꼽히는 라디셰프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19세기 러시아인들이 서구와 러시아의 단절감에 상처받았다면, 역설적이게도 18세기 러시아인들은 서구와의 연속성 및 동질감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어떻게 된 노릇인가?

알렉산드르 라디셰프(Aleksandr Radishchev)는 1749년, 중간 정도의 전통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알다시피 18세기 초반은 표트르 사후, 그의 개혁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가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서구를 배우고 따라잡으려는 국가 시책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으며, 라디셰프는 국비 유학생의 자격으로 라이프치히 대학에 파견돼 4년간 법학과 철학을 공부한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에 깊이 경도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지만, 역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당대를 주름잡던 프랑스 계몽사상이었다. 볼테르와 디드로는 러시아의 여느 귀족 지식인들에게나 마찬가지로 라디셰프의 영웅이 되었고, 그가 귀국한 후 집권한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는 프랑스 사상을 찬양하며 스스로 계몽 군주임을 자처했다. 순박했던 라디셰프는 이 계몽된 여황제가 자신과 뜻을 함께하는 진정한 철학자-군주라고 믿어 마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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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라디셰프

하지만 라디셰프는 영락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유학을 마친 후 돌아와 봉직했던 직위도 고만고만한 것이었다. 당연히 여제를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고, 자기가 맡은 직위에 합당한 공무를 수행하며 계몽주의자의 이상(理想)을 키워 갔다. 가령 프랑스 역사가 마블리(Gabriel Bonnot de Mably)의 『그리스 역사론』을 번역해 출판하는가 하면, 1773~1775년간 푸가초프가 일으켰던 농민 반란군들에 대한 관용을 선처하다가 해고당할 뻔하기도 했던 것이다. 러시아의 18세기를 흔히 ‘귀족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표트르가 개혁의 와중에 기세등등하던 과거의 대귀족들을 황제의 수하에 꽁꽁 묶어 두었던 것을 예카테리나 2세가 다시 복권시켜 준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자기 남편을 몰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오른 이 외국 출신의 여황제는 권력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귀족들을 달래 줄 필요가 있었고, 그게 바로 표트르 때 박탈당한 귀족 권리의 반환이었다. 볼테르를 직접 페테르부르크로 초빙하기도 하고,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나눈 서신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했던 예카테리나 2세였지만,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는 노골적으로 반동 정치로 돌아서 버렸던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라디셰프가 계몽의 정신 운운하며 반란군을 용서해 주자고 지껄였을 때, 당장 그의 목을 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다.

계몽이 요구하는 사회사업을 벌이기보다 공무원으로서 국가 시책을 정비하고 또 연구에 정진하기를 좋아한 라디셰프는 시인이기도 했다. 물론, 글줄이나 읽던 당대 귀족들에게 시란 고귀한 출신이라면 누구나 한 구절 정도 읊을 수 있어야 하는 소양이었기에 그의 시작(詩作)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정신에 입각한 라디셰프의 시가는 확실히 다른 구석이 있었다. 당대의 궁정문학 장르이던 송시(ode)의 수신자는 으레 국가나 군주이어야 했는데, 라디셰프가 선택한 송시의 수신자는 바로 ‘자유’였다. 태생의 귀천도, 배움의 많고 적음도 상관없이 자유가 억압받고 있다면, 우리에겐 피와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자유를 쟁취할 권리가 있다.

도처에서 용맹한 무리들이 들고 일어나
희망은 모든 이들의 무기가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왕관을 쓴 고문자의 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씻어 내고자 서두른다.
나는 번뜩이는 칼날을 도처에서 목격하노니
갖가지 모습을 한 죽음이
자랑스런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구나.
기뻐하라, 족쇄를 찬 민중이여
자연의 복수의 법은
왕을 단두대로 보내리라!

시도 과격했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더 안 좋은 것은 이 시 「자유」가 프랑스에서 대혁명이 벌어진 다음 해에 유럽 계몽주의 최대의 문제작인 『페테르부르크로부터 모스크바까지의 여행』(이하 『여행』)에 끼어서 출판되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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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로부터 모스크바까지의 여행』(Puteshestvie iz Petersburg v Moskve)
『여행 』은 소피아로부터 체르나야 그랴즈에 이르는 스물네 개의 도시를 돌아다니는 여행자의 눈을 통해 러시아 농민들의 삶을 관찰한 책이다. 여행자는 어디까지나 관찰자로서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잇는 촌락들의 일상 풍경을 묘사하고 그 실상을 전하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강화된 농노제의 현실은 목가적 전원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리 한 톨까지도 낱낱이 착취해 가는 지주들의 탐욕 및 사적인 체형과 그로 인한 죽음, 빈곤과 병마에 시달리다 끝내 미쳐 버린 농군의 이야기들은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여행객조차 분노하게 만든다. 그의 눈으로 볼 때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낫과 쟁기로 무장하고 귀족의 목을 자르고 관청에 불을 지른 사건은 결코 ‘과격한 난동’ 따위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인권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훼손된 데 따른 마땅한 결과에 다름 아니었다. 계몽 군주가 천명하던 이성과 법에 의한 통치란 어리석은 자기기만이자 민중에 대한 악질적인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볼테르조차 감동시킨 러시아 제국의 이면에는 그 어떤 이성이나 법도 지켜지지 않는 맹목만이 버티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에겐 사법적 세계관(juridical world view)이란 것이 있었다. 마치 초월적 세계의 형이상학적 원리처럼, 현실 세계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법칙을 구현하는 게 일종의 존재 임무처럼 부여되어 있다. 소위 현실의 모순이란 그런 법칙과 원리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생겨나는 파열이며, 모순에 대한 유일한 처방에는 법의 전면적인 준행 이외엔 다른 길이 없다. 자연법은 최상위의 원리이며, 불변하는 유일의 원칙인 셈이다. 철학자들의 소명은 현실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자연법에 빛을 비추어 그것이 현실 속에서 자신의 빛을 발하도록 촉진하는 데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법의 내용이 명확히 알려져 있어도 정확히 준행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러시아와 유럽 계몽 군주들의 정치 현실이 그런 것이었다. 해결책은 이미 알려져 있으니, 유일한 처방은 법의 정신으로 돌아가 그것을 지키는 것뿐이다.

『여행』은 결코 명문(名文)으로 가득 찬 훌륭한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의 가치와는 별도로, 어휘와 문체는 고루하고 케케묵은 것이어서 당대인들의 눈에도 한 세대는 더 낡은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농노제와 전제정에 대한 라디셰프의 고발과 규탄은 너무나 솔직하고 직설적이어서, 여제를 순식간에 분노 속에 몰아넣었다. 라디셰프는 푸가초프보다도 더 나쁘다는 것이다. 그는 곧 재판에 회부되었고 참수형을 언도받았으나, 귀족 신분을 고려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게 된다.

10년의 유형이 끝나자 세상이 바뀌었다. 여제가 세상을 떠난 후 즉위한 파벨 1세(재위 1796~1801)는 선대의 정책들을 증오하던 참이라 곧 라디셰프를 사면했고, 1801년 황제가 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새로운 입법위원회에 앉혔다. 새 황제는 개혁에 관심이 많았으며 서구적 법제도의 정비를 명령했다. 라디셰프는 가슴이 떨렸다. 어쩌면 그가 소망하던 새로운 시대, 진정한 계몽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다시 한번 사법적 세계관을 현실 속에 이식하기 위해 진력했으며,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굽히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도가 지나쳤다. 황제도 입법위원들도 전제군주 국가가 감당할 만한 유연한 제도의 개선을 원했지, 계몽주의의 이상에 입각한 혁명을 바라던 게 아니었다. 위원장이던 자바도프스키 백작이 반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당신에게 시베리아 생활이 아직 충분하지 않았나 보군요?” 껄껄대는 이 한 마디에 충격을 받은 라디셰프는 귀가 후 서재의 문을 걸어 잠갔고 이튿날 자살했다. 다소 슬프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이 결말은 대시인 푸슈킨이 전하는 것으로(「알렉산드르 라디셰프」)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라디셰프의 불행한 운명을 기리기 위해 자주 인용되었다. 아직 인텔리겐치아의 관념도 그 실체도, 아무것도 싹트지 않았던 척박한 땅에 홀로 이성과 계몽의 전사가 되어 싸워 나가야 했던 그의 삶에는 말 못할 비극적인 정조가 서려 있다. 그는 ‘너무 빨랐고’, ‘너무 외로웠던’ 것이다.

문예 기호학자인 유리 로트만은 라디셰프의 자살을 다르게 해석한다. 그가 시대를 너무 앞서갔고 외로웠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설명은 그가 시베리아 유형의 공포 때문에 자살했다는 설명이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차라리 보다 설득력 있는 해석은 18세기 러시아인의 심성 구조를 파고들 때 가능하다.

알다시피 표트르의 개혁 이후, 러시아인들은 서구인이 되기 위해 전력질주하던 참이었다. 서구적 교양과 가치가 최고의 선이었고, 서구적인 것은 무엇이든 곧잘 모방의 대상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이 쌓았던 지식과 교양, 일상생활의 관습에서 무언가 연극적인 요소가 묻어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다시 말해, 18세기 러시아인들은 ‘계몽의 기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마치 파리에 거주하는 것인양, 파리지엥인양 스스로 행동하고 생각하곤 했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모두가 유럽인이라도 되는양 처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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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 입상
_ 로마 공화정 말기, 부패가 만연한 정치 상황에서 카토는 완고하고 올곧은 정치인이자 철학자였다. 오랜 적이었던 카이사르에게 항복하지 않고 자결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공화정 혁명시기에 카토는 공화정의 우상으로 역사의 각광을 받게 된다.
계몽의 투사였던 라디셰프의 영웅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였다.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독재의 위험이 상존하던 로마를 지키고자 분투하던 고대의 영웅은 그가 따르고 본받아야 할 유일한 사표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영웅은 자신의 뜻이 현실 속에서 거부되자 의연히 죽음을 택했다. 핵심은 여기 있다. 고결한 의지가 좌절될 때 구차하게 타협하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영웅의 자세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라디셰프의 자살은 선구자의 비애나 두려움의 발로가 아닌, ‘모방’이라는 시대정신에 가장 적합한 귀결은 아니었을까?

로트만의 이 해석과 별도로, 나는 유럽 계몽주의의 극한으로서 러시아 계몽주의의 정신을 지적하고 싶다. 유럽 계몽주의의 본체인 자연법은 비역사적 이념이다. 역사에 따라 발전하거나 퇴화하기도 하는 그런 가변적 이념이 아니라 절대 불변하는 이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태초부터 원형 그대로 존재하는 완전한 원리이며, 발견되는 즉시 준행되기만 하면 되는 절대적 요청이다. 변화의 여지를 수용하는 19세기의 역사주의와 구별되는 18세기 계몽주의의 요체가 여기 있다. 불변하는 원리의 무조건적 적용과 반복만이 중요하다고 본다면 라디셰프의 자살은 원형(카토)의 충실한 재현과 다르지 않다. 로트만의 말대로 그는 숭상하던 카토를 기리며 그를 모방했을지 모르지만, 또한 마찬가지로 그는 계몽주의의 정신에 입각해 그 원리를 일말의 타협도 없이 곧장 실천했던 것이다. 그렇게 유럽의 계몽주의 정신은 북구의 마지막 땅, 러시아에 와서 절정에 도달한 게 아니었을까? 자연법이란 보편 이념에서는 더 이상 서구도 러시아도 없다는 이 동질감과 동등감. 그것이야말로 18세기 러시아 귀족 계몽주의자가 가졌던 자부심의 원천은 아니었을까?

2010/03/12 15:59 2010/03/12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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