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먼저, ‘동양의 중세’라는 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게 좋겠습니다. ‘고대-중세-근대-현대’식의 시기 구분은 참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구분입니다. 무엇보다 역사적 시대가 그렇게 무 썰듯이 나눠질 리도 없을뿐더러, 어디까지를 고대라고 하고 어디까지를 중세라고 할 것이냐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의상 대략 서양의 중세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밀라노 칙령(313년)의 공표 이후부터 면죄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한 루터의 반박문이 발표된 시점(1517년)까지로 잡곤 합니다.(물론 말씀드린 대로 여기에도 참 다양한 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문제가 많은 이러한 시기 구분을 동양으로 가져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서양 중세를 기독교 공인에서 루터의 반박문 발표까지로 잡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시기 구분은 기독교의 역사나, 맑스주의에 근거해서 생산력 발전 모델을 기초로 잡거나, 어쨌든 서구 역사를 기준으로 잡은 것인데, 이러한 시기 구분이 동양에 찰떡처럼 들어맞을 리 만무하니 말입니다. 서양 중세를 기준으로 당시 동양에 어떤 나라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수나라의 성립이 6세기(500년대), 명나라의 성립이 14세기(1300년대)였으니, 대략 한나라 멸망 이후부터 명나라 초기까지입니다. 한반도로 치면 통일신라부터 조선 중기 정도가 되겠네요. 사정이 이러하지만, 지금 역사학적 논의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니, 이 구분을 대략 따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철학사’를 개괄적으로 훑어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동시대적으로 대조해 보는 것도 유용할 테니 말입니다. 더불어 이번 주에 다룰 주제가 저런 시대 구분의 유용성이 적절히 발휘될 만합니다.

왜 동양의 중세는 서양처럼 ‘암흑시대’라는 규정 속에 있지 않은 것일까요? 물론 인간들이 사는 곳이니 권력관계는 당연히 있었을 테고, 그러한 곳이니 온갖 억압과 착취도 있었을 테지만, 중세 유럽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어떤 전 사회적인 침묵, 또는 교회권력의 공격성 같은 것이 동양 중세의 이미지에는 빠져 있습니다. 요 부분을 동양 전통 사상에는 없고 서양에는 있는 일자(一者) 개념과, 유학과 불교의 착종으로서의 성리학의 성립이라는 동양 정신사의 내부적·외부적 사건을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번 회의 주제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_ 근대 이전까지 동양화와 서양화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시선의 중심, 그러니까 전체를 조망하는 시선의 자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서양화의 원근법의 소실점의 철학적/신학적 표현이 바로 일자이다.

‘일자’는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요? 서구 정신사에서 그것은 만물의 근본원인, 세계의 본질 등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가령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를 예로 들면, 키보드는 대만 어디 공장에서, 모니터는 한국 어디 공장에서, 다른 각종 부품들은 어디 공장에서 만든 것이죠. 또 그것들은 아프리카 어느 광산에서, 중앙 아시아의 어느 사막에서 채취된 광물을 원료로 하구요. 그럼 그 광물은 또 수십만년 전 식물이 땅 속에 묻혀서 생겨난 것이고, 그 식물은 또 어느 식물의 씨앗에서 생겨난 것이겠죠. 이렇게 어떤 사물의 원인에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모든 것의 최종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한 겁니다. 이런 관점은 사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도 관찰될 수 있습니다. 그가 세계 만물의 본질로서 사물의 이데아를 생각한 것은 현상 너머의 본질이 있을 것이라는 관점에 기초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개체들의 본질로서 4원인설이나 에이도스 같은 것을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는 이러한 태도가 서구인의 정신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죠. 얼마나 대단했는지 로마인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철학을 발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이 관점은 그나마 ‘개체들’의 본질이라는 구체적인 내용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독교 신앙, 그러니까 유일신을 숭배하는 신앙과 결합되게 되면서 서양철학의 추상화는 한 발 더 나가게 됩니다. 사태의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담고서, ‘말씀으로’ 세계를 지은 ‘유일자’가 나타나게 된 것이니까요. 말이 쉬워서 그렇지, 있으라는 명령만 가지고 세계 만물을 창조하는 ‘신’의 관념은 고도의 추상화 과정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어쨌든, 동서양 사유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동양에서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사상도 이렇게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인 ‘신’을 상정하지는 않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부처 역시 신은 아닙니다.

“스물 아홉이라는 젊은 나이로 가정 생활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해탈의 경지를 향해 열정적으로 나아갔던 붓다의 개인적인 삶은 그가 힌두인 중의 힌두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불교와 인도사상』21쪽)

위의 인용문은 그가 한 사람의 수행자로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점은 비단 불교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 역시 한 사람의 수행자였고 그 길을 걸었을 뿐입니다.(더불어 이들은 누구의 말씀을 전하는 예전자도 아니었죠.) 동양 사상의 출발이 이러하다 보니, 서구의 그것에 비해 동양에서는 ‘수행’ 즉, ‘이루어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불교의 고승들이나, 대쪽같은 선비들 모두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 즉 수행자였던 셈이죠.

물론 동양철학에도 세계만물을 꿰뚫는 원리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개념들이 있습니다. 도(道), 리(理) 같은 개념들이 그것이죠. 하지만 이것들은 뭔가를 산출하는, 그러니까 만물의 근본 원인으로 제시된 개념들이 아닙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통해 파악된 이치들인 것이죠. 그래서 이것들은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여 알게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 모두의 수행을 통해 수행자 자신이 그것들을 체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죠.

동양의 중세가 서양의 그것처럼 사회적인 공격성을 띠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를 하나의 원리로 관장하고, 인격적인 모습으로 구현된 신이 없는 상태에서, 공부하는 모든 이가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이루는 과정’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상의 내용들이 ‘도그마’로 전환될 위험이 훨씬 적었던 것이죠. 더불어 학습의 방식 역시 어떤 지고한 진리의 ‘계시’가 아니라 ‘수행’이었기 때문에 신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이름으로 벌어진 온갖 만행들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신’이 없다는 것은 두 사상체계 사이에 이렇게나 큰 차이를 낳습니다. 믿어야 할 대상이 없다는 점은 어쩌면 그 시대를 살았던 동양인들에게는 아주 큰 축복이었던 셈이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학십도 중 태극도설 _ 성리학의 정수를 담은 그림이다. 일설에 따르면 도가의 영향이 짙게 보인다고도 하지만, 이 그림이 출현하기 전까지 유학은 우주의 발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동양사유에 ‘도그마’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분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지되었던 성리학적 질서는 ‘도그마’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었는가 하는 지적인 것이죠. 물론 그것이 ‘도그마’로 작용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성리학 자체의 성립과정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성리학은 동양의 중세 한복판, 그러니까 북송 시대에 태어난 유학의 한 갈래입니다. 하필 왜 이때 이것이 나타났느냐 하면, 송나라 이전 당나라 시대의 불교의 융성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진나라의 시황제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이후 유방이 한나라를 열면서 유학은 여타 학문에 비해 굉장한 지위를 구축해오고 있었습니다. 국가권력의 지원 속에서 주도적인 사상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당나라 시대에 오면서 전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것은 오히려 불교였습니다. 유학은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정리하고, 옛글에 주석을 붙이는 형식의 훈고학이 발전하고 있었구요. 훈고학이 발전했다고 하는 것은 1차 텍스트가 정리되었다는 의미와 함께, 특별히 새로운 무언가가 출현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지시해줍니다. 1차 텍스트들(유학의 경전들)이 정리되었던 것도 송나라 시기에 유학이 재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틈에 민간영역에서 불교의 영향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는 점도 성리학의 성립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성리학’이라는 것이 불교와 유학의 착종으로 태어난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영향력에서 지속적으로 후퇴하던 유학은 새로운 문제의식을 갖게됩니다. 다름 아니라 유학의 기초를 튼튼이 할 수 있는 개념적인 원리, 혹은 형이상학적(?) 지반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인 것이죠. 이전까지 유학은 예법, 생활윤리, 국가경영이론을 중심으로만 작용하였는데, 이러한 각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상체계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북송의 유학자들은 유식불교('유식사상'이란?)에서 모티브를 얻어 유학에 원리적인 지반을 마련합니다. 이러한 사상적인 흐름을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 부릅니다. 이 흐름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북송 5자라고 불리는 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북송 5자는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를 일컫는 말인데, 이들이 유학의 뉴웨이브, 그러니까 ‘신유학’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들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유학에 불교적 사유를 접목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교의 사유까지 접목시켜서 송나라 시대에는 이미 낡을 대로 낡아버린 훈고학적인 유학을 일신하는 것이죠. 남송대의 주희는 그들 속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신유학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북송 5자의 사상체계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사람인 것이죠. 이를테면 서구의 중세에 아퀴나스가 했던 역할을 그가 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학은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존재론부터 윤리학, 정치학까지 하나의 완결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으로 불리는 그 학문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성리학, 주자학은 기본적으로 우주, 자연과 같은 초월적인 질서가 인간 자신의 내면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태도를 취합니다. 리(理)와 기(氣)가 하나라고 보는 입장이 바로 그것이죠. 이렇게 통일적으로 파악된 자연과 인간은 결국 사상에 일관성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우주론(존재론)과 윤리학이 통일적으로 사고되는 것이죠. 인간이 바로 우주라는 입장.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바로 불교의 교리와 상당히 유사한 내용인 것입니다. 어쨌든 성리학은 이러한 입론 위에서 정치론, 수행론 등등 포괄적인 이론체계를 구축해 갑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유학의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러한 ‘착종’적인 노력 덕에 강력한 토대를 구축한 성리학은 이후 동아시아에서 관학으로서의 입지를 획득하게 됩니다. 시작은 다질적이었지만, 이것이 하나의 중심으로 작동하면서 다른 학문이나 사상들은 점점 주변으로 몰려가게 된 것이죠. 조선 건국 당시에 있었던 불교의 배척이나, 중국의 역사에서도 발견되는 여러가지 사례들이 그런 점을 일정 정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사상체계 내부에도 신과 같은 전일적인 ‘존재자’는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격적인 도그마로 작동할 수 있는 요소가 아주 적었던 것이지요. 더불어 이 학문 역시 뭔가를 ‘이루어가는’ 수행성을 강조하는 학문이었던 덕에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작동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적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면, 모든 것을 산출하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일자의 존재 유무, 그리고 타 사상체계와 결합 가능한 개방성이 공격적인 도그마를 생산하지 않는 데 더욱 유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점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습니다. 다양한 중심을 갖는 탈중심성, 혼종가능성이 오래가고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제도나 장치들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것이 단숨에 계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늘 특정한 수행을 동반해야 한다는 점일 것입니다.

관련 도서 보기


■  <철학 VS 철학>에서는? [ 동양편 ]
2. 자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아지타 VS 싯다르타
5. 집착과 고통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나가르주나 VS 바수반두
6. 불교의 공(空)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니야야 학파 VS 나가르주나
14. 수양하려는 생각도 집착일 수 있을까? 신수 VS 혜능
15. 깨달은 자가 바라본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원효 VS 의상
18.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장재 VS 주희
19. 인간을 초월한 이(理)는 존재하는가? 육구연 VS 주희
20. 이(理)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주희 VS 왕수인
22. 윤리적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황 VS 이이

알라딘 링크
2010/03/17 15:50 2010/03/17 15:50
RSS를 구독하시면 더욱 편하게 그린비의 글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 | ]

trackback url :: http://greenbee.co.kr/blog/trackback/983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캐러멜대장 2010/03/19 20:09

    완전 추천합니다!!!

    • 그린비 2010/03/22 09:44

      아, 감사합니다!!
      (관심 가져 주시는 분이 계시군요. 아흙흙ㅋ)

  2. nanginks 2010/04/23 03:59

    역시 철학하시는분이라 서구역사도식 개판논리를 잘 아시네요

    • 그린비 2010/04/23 10:24

      하하....^^;

  3. 쏘니 2010/05/23 11:04

    아. 성리학이 이렇게 출현한거군요.. 잘 배우고 갑니다..

    • 그린비 2010/05/24 10:49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