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2010-11-30 | 288쪽 | 18,000원
‘그린비 프리즘 총서’ 다섯 번째 책. 정치철학자이자 여성주의 이론가로 유명한 낸시 프레이저의 저서 중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되는 책이며, 저자가 그동안 정의론을 숙고한 성과를 집약하고 있다. 저자는 기존의 정의론들이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 문제’라는 틀에 갇혀 있었음을 비판하고,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에 관한 새로운 틀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세기의 주요 사상가들과 사회운동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해, 지구화 시대에 걸맞은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을 규정한다. 그리고 정의 문제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있어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비판적·제도적 이론을 제시한다.
저·역자 소개 ▼
뉴욕에 위치한 뉴스쿨 사회과학 대학원(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교수이며, 주된 연구 분야는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 여성주의 이론, 유럽 현대철학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Talking about Needs: Interpretive Contests as Political Conflicts in Welfare-State Societies”(1989), “From Redistribution to Recognition?: Dilemmas of Justice in a ‘Postsocialist’ Age”(1995), “Mapping the Feminist Imagination: From Redistribution to Recognition to Representation”(2006) 등이 있으며, Unruly Practices: Power, Discourse and Gender in Contemporary Social Theory(1989), Justice Interruptus: Critical Reflections on the “Postsocialist” Condition(1997)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그 외에 현존하는 대표적 사회철학자인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와 공동집필한 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A Political-Philosophical Exchange(2003)와 그녀의 작업에 대한 비평들에 응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Adding Insult to Injury: Nancy Fraser Debates Her Critics (2008)를 통해 여러 학자들과 논쟁 및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역자 김원식
국가안보전략연구소(INSS) 연구위원, 서울여자대학교 강사.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 「계몽의 자기파괴와 의사소통 이성」(2002)을 썼고, 이후 「인권의 근거: 후쿠야마와 하버마스의 경우」(2007), 「근대성의 역설과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전개」(2007), 「다중(Multitude)이론의 비판적 검토』(2008), 「인정과 재분배」(2009), 「생활세계 식민화론의 재구성: 배제, 물화, 무시」(2009), 「한국사회 갈등구조와 민주적 연대」(2010)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공저로 『한중일 시민사회를 말한다』(이학사, 2006), 『이성의 다양한 목소리』(철학과현실사, 2009),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옹기장이, 2010) 등이 있으며, 『이성의 힘』(동과서, 2000), 『하버마스와 현대사회』(동과서, 2007)를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주된 관심은 한국사회를 위한 종합적 사회비판 이론을 모색하는 것이며, 이와 관련해 사회 철학의 최근 논의들을 폭넓게 검토하고 있는 중이다.
차례 ▼
옮긴이 서문 5
2판 저자 서문 8
감사의 말 5
1장 정의의 스케일, 균형과 지도: 논의를 시작하며 13
2장 지구화하는 세계에서의 정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 29
삼차원적 정의론: 정치적인 것의 특수성에 관하여 36
정치적 부정의의 두 수준: 일상적인 정치적 대표불능에서 잘못 설정된 틀로 40
틀의 설정에 관한 정치: 국가-영토성에서 사회적 영향력으로 46
탈베스트팔렌적 틀의 설정 50
메타-정치적 정의 53
독백적 이론과 민주적 대화 55
3장 평등주의의 두 가지 독단 59
‘내용’에서 ‘당사자’로 그리고 ‘방법’으로 61
두번째 독단을 넘어서: 표준 사회과학에서 비판적-민주적 ‘방법’으로 72
‘당사자’ 문제에 관한 논쟁의 민주화: 제도적 문제들과 개념적 문제들 81
4장 비정상적 정의 89
지구화하는 세계에서 나타나는 비정상성의 마디들 95
비정상적 시대의 정의론을 수립하기 위한 전략들 103
정의의 ‘내용’: 세 차원에서의 동등한 참여 105
정의의 ‘당사자’: 잘못 설정된 틀과 종속 111
정의의 ‘방법’: 메타-민주주의의 제도화 120
새로운 정상성?: 성찰성, 논쟁, 헤게모니에 대하여 127
5장 공론장의 초국적화: 탈베스트팔렌적 세계에서 공론의 정당성과 유효성에 대하여 135
고전적인 공론장 이론과 그에 대한 급진적 비판: 베스트팔렌적 틀의 주제화 139
탈국민국가적 상황: 베스트팔렌적 틀에 대한 문제제기 150
공론장을 다시 한 번 새롭게 사유하기 162
6장 여성주의의 상상력에 대한 지도 그리기: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다시 대표로 173
여성주의의 제2의 물결에 대한 역사적 고찰 175
사회민주주의의 젠더화: 경제주의 비판 177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문화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불행한 결합 180
인정의 지형: 탈공산주의, 탈식민주의 그리고 제3의 길 183
미국의 젠더정치, 9·11 이후 185
복음주의: 자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기술 188
여성주의에 대한 새로운 틀의 설정: 대표와 관련된 초국적 정치 192
7장 훈육에서 유연화로?: 지구화의 그림자 속에서 푸코 다시 읽기 197
포드주의적 훈육에 관한 이해 199
훈육에서 유연화로? 208
지구화된 통치성 211
8장 지구화 시대의 인류에 대한 위협들: 21세기에 대한 아렌트적 성찰들 219
9장 틀의 설정에 관한 정치: 케이트 내시·비키 벨과 낸시 프레이저의 대담 235
옮긴이 후기 261
참고문헌 264
찾아보기 283
편집자 추천글 ▼
지구화 시대의 정의란 무엇인가?
―비정상성의 시대, 정의론의 틀을 새롭게 설정하는 정치철학!!
우리는 지금 ‘비정상적 정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정의의 주체(당사자)는 ‘누구’인지, 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한 의견 일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핵심적 부정의는 무엇인가? 경제적 불평등인가, 소수자에 대한 무시인가, 민주주의 제도의 퇴화인가? 부정의를 해소하고자 할 때 고려해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영토국가의 국민인가, 세계시민적 개인인가? 전 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통치자들의 조직인가, 자본에 반대하는 초국적 대중운동인가? 기존의 정의론들은 이런 질문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전제들 속에서 무의미한 논쟁만을 벌이고 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질문들에 답하는 데 필요한 ‘원칙’을 재설정하는 일이다.
그린비출판사에서는 미국의 사회·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의『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Scales of Justice: Reimagining Political Space in a Globalizing World)을 ‘프리즘총서’의 5번째 책으로 출간했다. 이 책에서 프레이저는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라는 한계에 갇혀 있었던 기존 정의론들이 현실의 변화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지구화하는 우리의 세계에 부합하는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을 규정하고, 정의에 관해 상충하는 견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성찰적˙민주적 정의론을 정초한다.
낸시 프레이저는 뉴욕에 위치한 ‘뉴스쿨 사회과학 대학원’(The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의 교수이다. 미국에서 진보적인 학문이 허락되는 얼마 안 되는 공간 중 하나인 이곳에서 그녀는 여성주의 이론과 현대 정치철학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악셀 호네트(Axel Honneth),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tler) 등 오늘날을 대표하는 사상가들과의 활발한 논쟁을 통해 비판이론과 정의론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프레이저의 저작으로, 그동안 그녀가 쌓아 온 이론적 성찰을 집약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녀는 과거의 자신뿐 아니라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위르겐 하버마스(J?rgen Habermas),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같은 여러 선배 사상가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정의론을 구축하고 있으며, 여성주의 운동과 세계사회포럼 등의 실천적 저항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자신의 이전 이론이 지니고 있었던 약점을 성찰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현재 한국은 어느 나라 못지않게, 아니 그 어느 나라보다 더 비정상적 시대를 겪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차별, 대의제의 위기 등 사회 거의 모든 차원에서 부정의가 전면화되어 있으며, 이 차원들 간의 복합적 상호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틀도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 얼마 전에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전체 베스트셀러 수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체계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기존 정의론들을 비판하고 차별화된 관점으로 정의 문제에 접근하는 『지구화 시대의 정의』는, 우리 시대/사회 특유의 부정의들을 이해하고 해소하려는 노력에 강력한 이론적˙실천적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다.
‘지구화 시대’에 걸맞은 다차원적 정의론 수립 전략!
‘비정상성의 시대’, 정의의 문법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베스트팔렌적?케인스주의적 틀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근대 영토국가가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기에 적합한 단위이고 그러한 국가의 시민들이 적절한 주체들이라는 생각은 이제 공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정치적 요구와 관련된 기존 구조는 불안정해졌으며, 그 결과 우리가 사회정의에 관해서 논쟁하는 방식도 변화하게 되었다(2장, 32쪽).
이 책 전반부(1~4장)에서 낸시 프레이저는 오늘날 정의론이 처한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제시한다. 그녀는 우리가 ‘비정상적 정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정의의 내용˙당사자˙실현방법 등 모든 면에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정의론은 여전히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Keynesian-Westphalian Frame)을 고수하고 있다. 이 틀은 오랫동안 사회정의론의 암묵적 전제 역할을 했으며, 정의의 범위와 문제를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에 한정시켰다. 하지만 ‘지구화 시대’에는 국경과 영역을 초월한 부정의들로 인해 베스트팔케인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이 파열되고 있다. 초국적 기업의 전 지구적 약탈, 강대국의 패권적 일방주의, 급증하는 이주와 이주자에 대한 차별, 지구온난화, 에이즈의 확산, 국제 테러리즘 등 현실에서 혹은 잠재적으로 우리 삶을 파괴하는 해악들 중 ‘영토국가’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한 ‘경제적’ 부정의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적˙민족적˙인종적 차별도 우리 시대의 핵심적 부정의이며, 나아가 정의 문제가 이처럼 다양한 공간과 영역을 포괄하게 됨에 따라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기존 정의론들은 변화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영토국가와 경제적 재분배를 넘어서는 이론도 산출하지 못하고 있다.
프레이저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현재 정의론이 처한 위기를 진단한다. 그녀에 따르면 지구화 시대의 ‘비정상적 정의’ 상황이 완전히 임의적인 것은 아니며, 정의론은 중심적인 세 가지 마디(node)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 그 마디들이란 바로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의의 ‘내용’에 관한 공유된 이해를 갖고 있지 않다. 어느 사람이 분배부정의를 확인하는 문제에서 다른 사람은 문화적 차별을 감지하며, 또 다른 사람은 정치적 지배를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정의의 ‘당사자’에 관해서도 공유된 관점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어느 사람이 국민국가적 당사자를 통해 정의 문제의 틀을 설정하는 데 반해, 다른 사람은 초국적 혹은 지구적 당사자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에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어느 사람이 국가의 법이나 국가 간 조약이 갖는 권위에 호소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국제연합이나 (앞으로 고안되어야 할) 세계시민적 민주주의에 주목한다. 이처럼 정의의 주요한 세 차원이 확실성을 결여한 결과, 사람들은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지구화 시대의 정의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구화 시대에는 정의의 틀 자체를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비정상적 시대’는 기존의 정의 원칙들을 파괴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그동안 은폐되었던 부정의들을 폭로하고 그것들까지 해소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구축하도록 자극받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 안에서 정의론은 주로 경제적 재분배만을 정의의 ‘내용’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시민만을 정의의 ‘당사자’로 간주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정의에 관한 논쟁들이 아무리 치열했어도, 이 전제들은 문제시되지 않은 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반해 프레이저는 현실의 변화와 선배 사상가들의 통찰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들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써 기존 정의론들의 암묵적 전제를 비판하고 오늘날 현실에 부합하는 독창적인 정의론을 구축한다.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비정상성의 세 마디’ 모두를 고려하는 새로운 정의론을 정식화한다. 정의의 ‘내용’ 측면에서 그녀는 정의 요구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이 내용들을 동등한 참여라는 규범적 원칙 아래 포괄할 것을 주장한다. 그녀에게 정의는 ‘동등한 참여’(participatory parity)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당사자로서 참여할 권리가 있는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배제되는 경우 ‘부정의’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때 ‘배제’는 경제적 불평등, 소수자에 대한 문화적 무시, 정치적인 대표 불능이라는 세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프레이저에 따를 때 정의론은 이 세 차원 ‘모두’가 독자적인 정의의 내용이며 그것들 각각이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모든 요구자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다.
‘당사자’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떤 단위’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정의의 당사자로 봐야 하는가? 그 단위가 국가인지, 전 세계인지, 특수한 협치구조(유럽 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과 같은)인지에 관해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의견 일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프레이저는 당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찰적(reflexive)이면서도 확정적(determinative)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이론은 특정한 ‘하나의’ 틀(예컨대 국가)이 정의의 당사자를 결정하는 데 언제나 합당하다는 가정을 거부하며, 당사자를 설정하는 ‘복수의’ 틀들(예컨대 국가와 초국적 시민사회)이 병존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이다. 나아가 이 이론은 당사자를 결정하는 원칙까지 제시한다는 점에서 확정적이다. 그 원칙은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으로서, 이 원칙에 따르면 “특정한 협치구조에 종속된 모든 사람은 그 구조와 관련된 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주체로서의 도덕적 지위를 갖는다”(4장, 117쪽). 그리고 이때의 ‘협치구조’(governance structure)는 국가뿐 아니라 중요한 사회적 상호작용을 결정하는 기구들―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과 같은―도 포함한다. 프레이저는 이처럼 유연성을 견지한 이론만이 비정상적 시대에 당사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들을 해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과 관련해 대화적(dialogical)이면서도 제도적(institutional)인 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흔히들 우리 시대를 민주주의 시대라고 말하지만, ‘무엇을 정의 문제로 규정하고, 그것을 누구에게 적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대부분 권력자들 및 엘리트들에게 위임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주로 기득권자의 관점과 이익을 보호하는 데 복무한다. 이런 상황을 비판하면서 프레이저는 정의 문제를 다루는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보다 더 ‘대화적인’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화 그 자체가 해결책은 아니다. 그녀는 이런 대화를 통해 결정된 사안이 ‘구속력 있는 해결책’이 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론은 ‘제도적’이어야 하며, 제도적 과정은 대화적 과정과 역동적인 상호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규범적이고, 성찰적이면서도 확정적이며, 대화적이면서도 제도적인 이론이 그녀가 제시하는 새로운 정의론이다. 이 정의론은 매우 강력한 개념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정의의 내용˙당사자˙방법과 관련한 상충하는 견해들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다양한 실천과 사상을 흡수해 더욱 풍부해진 정치철학
낸시 프레이저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의론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실천들과 사상들에서 받은 영향을 비판적으로 계승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후반부(5~8장)에서 그녀는 자신이 구축한 정의론에 기초해 그녀에게 영감을 주었던 실천과 사상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여성주의와 세계사회포럼: 정의의 새로운 차원을 일깨워준 실천들
그녀 사유의 특징 중 하나는 추상적인 사고실험을 통해서만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현실에서 생겨나는 부정의의 새로운 양상들과 이에 맞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들을 주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삼으며, 이런 태도가 그녀의 정의론을 한층 더 현실적이고 비판적으로 만들어 준다. 예를 들어 여성주의를 통해 이론적 실천을 시작한 그녀에게 여성주의가 맞이한 위기와 이를 타개하기 위한 여성주의자들의 노력은 기존 정의론들의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보다 정합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녀가 정의의 내용뿐 아니라 당사자와 방법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겪은 부침이었다. 여성주의 운동의 패배를 목격하면서, 이 패배를 이론화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정의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던 것이다.
또한 이 책에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안지구화’를 주창하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활동가들의 움직임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국경을 초월해 부정의를 저지르는 세력들에 지구적 빈곤층이 대항할 수 있는 국제적 공론장을 만들고자 한 이 활동가들에게서 그녀는 초국적 연대성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를 통해 영토국가라는 암묵적 전제를 넘어설 수 있었다. 이렇듯 독백적 전제들에 근거해 관념적인 정의론을 구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역동적인 움직임들을 포착해 자신의 이론체계 속에 포함시키려 노력했기 때문에, 그녀의 정의론은 살아 움직이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한 이론이 될 수 있었다.
하버마스,푸코,아렌트: 새로운 정의론을 사유하기 위한 교두보
다른 한편으로, 지구화하는 세계의 정의론을 구축하면서 프레이저는 다양한 선배 사상가들의 통찰을 비판적으로 계승한다. 5장 ‘공론장의 초국적화’에서 그녀는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그것에 가해진 비판들 모두가 ‘영토국가’라는 베스트팔렌적 틀을 당연시했던 것을 문제 삼는다. 나아가 그녀는 단순히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성을 지니고 있는 ‘공론장’ 개념을 초국적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구성하고자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7장 ‘훈육에서 유연화로?’와 8장 ‘지구화 시대의 인류에 대한 위협들’에서 그녀는 미셸 푸코의 ‘통치성’ 개념과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 분석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지구화 시대에는 부적합한 이론들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부정의들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공했음을 강조한다.
이렇게 프레이저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이론들을 반성 없이 수용하거나 오늘날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손쉽게 내버리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역사화한다. ‘공론장’, ‘통치성’, ‘전체주의’는 모두 ‘케인스주의적?베스트팔렌적 틀’ 속에서 의미를 지녔던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다. 반대로 이 개념들은 ‘정의’와 관련해 우리가 어떤 문제들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기 때문에 여전히 숙고할 가치가 있으며, 우리의 과제는 그것들이 현재 어떤 양태 속에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넘어서기 위하여
현재 정의론이 처한 위기에 관한 프레이저의 진단과 해결책은 현실적인 동시에 이상적이다. 그녀는 지구화가 정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으며 부정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함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정의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러한 노력 속에서 형성된 그녀의 정의론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현재 한국 사회 역시 비정상적 정의 상황에 처해 있다. 기존의 부정의와 지구화가 유발하는 부정의가 결합되어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국은 이미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포섭되어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성˙동성애자˙장애인˙이주노동자 등 소수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도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또한 정당들은 시민의 의지를 제대로 대표하고 있지 못하며, 시민사회 차원의 운동들도 정책 결정 과정에 별다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우리 사회에서 핵심적인 정의의 내용을 무엇인가? 국내뿐 아니라 해외 강대국들의 정책이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서 정의의 당사자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반대로 우리 사회를 기반으로 한 초국적 기업이 저발전 사회의 노동자˙자원을 약탈하는 상황에서 그 사회의 시민들을 어떤 방식으로 정의의 당사자로 구성할 것인가? 진보정당의 의회진출, 대규모 촛불시위 등 놀라울 정도의 민주주의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발전이 사실상 구속력 있는 조치까지 이어지는 경험을 하지 못한 우리는 앞으로 어떤 방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해 나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으며, 만족스러운 해답을 내리는 것은 당분간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구화 시대의 정의』를 통해 우리는 이러한 부정의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방안에 대한 실마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