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파괴 현대 철학자들과의 대담
철학의 정원 3
미하일 리클린 지음, 최진석 옮김 | 2009-07-20 | 448쪽 | 27,000원
소련 과학아카데미 수석연구원이라는 ‘제도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구 철학과의 접속을 꿈꾸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던 저자 미하일 리클린. 그가 당대의 서구 현대 철학자 10인과 만나 나눈 대담을 엮은 이 책은, ‘해체’(destruction)와 ‘파괴’(deconstruction)라는 다분히 의도된 대구적(對句的) 열쇳말을 중심으로 각 철학자들의 사유를 탐구해 들어간다.
자크 데리다, 펠릭스 가타리, 장 보드리야르에서부터 시작된 대담의 여정은 현대 해체주의의 가장 유력한 대표자로 꼽히는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를 거쳐 속도학의 창시자 폴 비릴리오, 슬로베니아 학파의 거두 슬라보예 지젝에 이른다. 미국의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와 맑스주의자 수잔 벅–모스가 뒤를 잇고, 미디어와 예술에 관한 미학적 담론들을 활발히 생산해 오고 있는 보리스 그로이스가 대미를 장식한다. 리클린은 이들과의 대담을 통해 서구 형이상학의 보편성과 러시아적 특수성 사이의 접점을 찾는 동시에 혼돈과 테러의 시대에 형이상학의 복원, 그리고 해체 혹은 탈구축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저·역자 소개 ▼
저자 미하일 쿠지미치 리클린 Mikhail Kuz'mich Ryklin
1948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1977년 레비-스트로스 연구로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마지막 시기에 유럽으로 건너가 데리다, 가타리, 보드리야르 등 당대 최고의 유럽 지성인들과 교우했으며, 귀국 후에는 해체론을 러시아 현실에 실천·적용하는 작업에 매진했다. 1975년 전위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안나 알추크(Anna Altschuk)와 결혼해 현대 철학과 예술이론의 접목에도 폭넓은 관심을 기울였으나, 2003년 안나가 조직한 ‘종교 조심!’이라는 전시회가 성물 모독죄로 기소되면서 오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된다. 2008년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후엔 독일로 건너가 저술과 철학 교육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테러의 논리』(1992), 『모스크바의 데리다』(데리다와 공저, 1993), 『저지물로서의 예술』(1997), 『해체와 파괴』(2002), 『환희의 공간: 전체주의와 차이』(2002), 『진단의 시대』(2003), 『침묵의 경계』(2003), 『철십자, 십자가, 별』(2006), 『자유와 금지. 테러 시대의 문화』(2008), 『종교로서의 사회주의』(2008) 등이 있고, 대부분의 저작들이 독일어와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역자 최진석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러시아 근대문학비평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구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던 우즈베키스탄 국립대학교 철학부 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2009년 러시아 국립인문대학교에서 문화와 반(反)문화의 역동성을 주제로 문화연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서울대 등에서 러시아 문학과 문화, 지성사 등에 관해 강의하는 외에, 2001년 이후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도 다양한 주제로 공부와 강의를 이어가는 중이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코뮨주의 선언』(공저),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등을 쓰고 옮겼다.
차례 ▼
서문 “당신이 항상 철학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했던 것들……”
01 해체와 파괴: 자크 데리다와의 대담
02 욕망하는 기계들과 단순한 기계들: 펠릭스 가타리와의 대담 I
03 “철학이란 무엇인가?”: 펠릭스 가라티와의 대담 II
04 투명성의 바이러스: 장 보드리야르와의 대담
05 민족 미학과 형이상학 전통: 필립 라쿠-라바르트와의 대담
06 참을 수 없는 표상/재현 불가능성: 장-뤽 낭시와의 대담
07 거대한 자동 기계: 폴 비릴리오와의 대담
08 논증 없는 철학: 리처드 로티와의 대담
09 외설적 보충물: 슬라보예 지젝과의 대담
10 유토피아를 위한 장소는 언제나 존재한다: 수잔 벅-모스와의 대담
11 미디어와 담론: 보리스 그로이스와의 대담
후기 Apocalypse Now?
옮긴이 후기 미하일 리클린과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사유
편집자 추천글 ▼
구소련 출신 철학자,
현대 철학자 10인을 만나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묻다
데리다 해체론과 가타리 분열분석에서 모색하는 해체의 실천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난 자크 데리다. 수천 년간 서구 철학을 지배해 온 ‘현전(現前)의 형이상학’을 뒤엎고 해체론이라는 혁신적인 사유방식을 열어젖힌 그의 사유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사유를 근거하고 확장하는 강력한 자장(磁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 역시 그러한 해체론에 기반하여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다듬고 정치화(精緻化)해 온 소비에트 연방 출신의 철학자이다.
전체주의 혹은 스탈린주의 사회를 경험한 리클린으로서는 “전체주의 사회의 욕망 구조는 어떤 것인가?”, “그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지속되기에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구소련 과학아카데미 수석연구원이라는 ‘제도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서구 철학과의 접속을 꿈꾸고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을 던져 왔던 그가 당대의 서구 현대 철학자 10인과 만나 나눈 대담을 엮은 이 책은, ‘해체’(destruction)와 ‘파괴’(deconstruction)라는 다분히 의도된 대구적(對句的) 열쇳말을 중심으로 각 철학자들의 사유를 탐구해 들어간다.
자크 데리다, 펠릭스 가타리, 장 보드리야르에서부터 시작된 대담의 여정은 현대 해체주의의 가장 유력한 대표자로 꼽히는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를 거쳐 속도학의 창시자 폴 비릴리오, 슬로베니아 학파의 거두 슬라보예 지젝에 이른다. 미국의 실용주의자 리처드 로티와 맑스주의자 수잔 벅–모스가 뒤를 잇고, 미디어와 예술에 관한 미학적 담론들을 활발히 생산해 오고 있는 보리스 그로이스가 대미를 장식한다. 리클린은 이들과의 대담을 통해 서구 형이상학의 보편성과 러시아적 특수성 사이의 접점을 찾는 동시에 혼돈과 테러의 시대에 형이상학의 복원, 그리고 해체 혹은 탈구축이 갖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이 책은 저명 철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 서구 철학의 텍스트들을 읽는 독자들이라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펼쳐 놓은 입장들이 내 삶과 사유의 경험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텍스트들과 엮인 나의 위치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나의 본래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 책은 리클린이 우리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과 답변들의 모음이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에서 싹튼 해체와 파괴의 씨앗
∙탈주를 꿈꾸던 소비에트 철학자, 해체의 실천을 고민하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항상 ‘탈주’를 꿈꾸어 왔다. 사회의 ‘최종심급’인 맑스–레닌주의에 겉으로는 순응하면서도 체제 너머를 향하는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조성하고자 했던 그들은 일찍이 제정 시대부터 체제의 감시망을 빠져나가는 여러 방법을 고안해 왔다. 자본론의 (의도된?) 지루한 번역이 검열관을 제풀에 나가떨어지게 만듦으로써 선뜻 출판 허가를 받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거니와, 19세기 초부터 발달한 근대 문학 비평은 당최 사회사상인지 문학 평론인지 애매모호한 글쓰기로 검열 기구의 발톱을 요리조리 빠져나갔으니 말이다. 소비에트 시기, 제도권 연구소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도 ‘공식적인’ 소비에트 철학의 지침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서구 철학과 접속해 온 이 책의 저자 리클린에게서 그 ‘유구한 탈주의 역사’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리클린은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직전인 1980년대 말 서유럽으로 건너감으로써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경험과 서구 철학의 접속’이라는 자신의 과제에 본격적인 시동을 건다. 그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데리다의 지도를 받고, 가타리·보드리야르 등과 교유하면서 ‘해체론’을 자신의 주된 이론적 기반으로 삼게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중의 가공할 힘과 지식인의 감상적 낭만주의가 영합할 때 빚어지는 폭력의 역사는 리클린이 ‘파괴’라는 주제보다 ‘해체’라는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선호하게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해체론의 이론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실천적’ 차원에 정향된다. 해체의 큰 틀, 즉 총론은 데리다가 이미 짜 놓았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각론, 즉 해체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실천적 해체’를 통해 포스트–소비에트 시대 러시아의 문화적 지형도를 추적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실천적 해체와 맞물린 그의 삶 또한 극적이다. 전위예술가이자 비평가인 그의 아내 안나 알추크(Anna Altschuk)는 2003년 열었던 ‘종교 조심!’이라는 전시회 때문에 성물 모독죄로 기소되었다. 오랜 법정 분쟁 끝에 결국 무혐의 판정을 받았으나 2008년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맞음으로써 사건은 파국으로 끝난다. 이를 통해 리클린은 이론의 바깥에서 해체적 실천 작업을 펼쳐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으며, 러시아에서 지적 활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깨닫고 베를린으로 이주하기에 이른다. 어느 대담에서 밝혔듯, 이 과정/소송(process)은 그로 하여금 한 사회의 의식 기저에 완고하게 자리 잡은 무의식과의 투쟁이었으며, 그에 저항하는 해체의 실천은 다양한 전략들을 통해 그 사회의 무의식적 심급에 파고들어야지, 논리적·법리적 공방을 통해 일거에 전복할 수는 없음을 깨닫게 해준 값비싼 수업이었다.
∙해체론과 분열분석의 도정 위에서 형이상학의 재건을 모색하다
이 책에서 가장 쟁점적인 것은 두 가지 담론적 흐름, 즉 자크 데리다에 의해 주창된 해체론적 패러다임과 질 들뢰즈 및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분석이다. 해체론적 패러다임은 전통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지속·심화시킨 반면 분열분석은 ‘니체적’ 노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이를 변형하는 데 주력해 왔다. 리클린은 이 두 가지 사유의 도정이야말로 전통 철학에 대한 현대적 사유의 관계를 규정짓는 가장 의미심장한 이정표로 보고 이 책의 제목을 ‘해체와 파괴’로 정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들은 자신의 사유를 이 두 가지 흐름 속에, 혹은 그것들과의 대결을 통한 긴장 관계 속에 위치시킨다. 가령 슬라보예 지젝은 데리다의 제자임을 자처하면서 데리다 사유의 다양한 측면들에 자신의 작업을 연관시키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대표적 맑스주의자인 수잔 벅–모스도 마찬가지이다. 장–뤽 낭시와 필립 라쿠–라바르트는 해체주의자로서 이미 자신들의 고유한 족적을 남겨 놓았다. 보리스 그로이스의 경우, ‘기호학적 전체주의’의 수장으로 데리다를 지목하며 그에 대한 중요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보드리야르는 ‘철학의 죽음’이라는 테제하에 자신의 입지를 비(非)철학적인 것이라 명기하고 있으나, 들뢰즈와 자신의 근친성을 강조하는 한편 데리다에게는 거리감을 표하고 있다. 분열분석적 노선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폴 비릴리오의 ‘속도의 철학’(질주학)을 통해 계속되는 한편, 해체론적 문학 운동 속에 꾸준히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리처드 로티의 ‘실용주의’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열 명의 철학자, 열한 편의 대담(가타리와는 두 차례 대담)에서 드러나는 것은 해체론의 현재적 의의이다. 해체와 파괴가 전체주의와 대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반목적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전체주의처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목적을 설정하는 어떠한 구축주의도 해체/파괴의 운명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러므로 문제는 구성에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목적론적 함의를 제거하는 것, 알튀세르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을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 돌리는 데 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광풍으로 모든 것이 황폐화된 러시아의 현실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형이상학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긍정이며 재건에 있다는 리클린의 주장은 이런 맥락에서 거듭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대담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나는 철학자들의 사유, 그리고 개성
때로는 공격의 날을 세우고 때로는 공감의 제스처를 보내는 리클린을 대담의 파트너로 맞아 철학자들이 내놓는 답변들, 그리고 그들이 현대의 철학적 경향·저작·인물에 대해 보여 주는 태도 또한 흥미롭다. 리클린의 표현을 빌리면, 대담이라는 장르는 서로의 윤리적 입장이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사유의 힘은 녹음된다고 해서 소진되는 게 아니며, 오히려 말과 행동 방식의 결합을 통해 더욱 통합적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사유의 힘은 ‘삶의 예술’로서 철학자들 각자의 사유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범적’해체주의자들의 고유한 전략
리클린이 해체주의자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대체로 ‘모범적인 대담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사유 체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타자를 위해 침착하게 주석을 달아 주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말의 권위가 인격적 현존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다른 이들의 텍스트를 인용할 땐 가능한 한 파토스를 배제하려 했고, 반복해서 설명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문화의 표층에 단단히 붙박여 있는 비논리적 모순을 밝히기 위해 굳이 해체와 같은 특별한 방법론을 동원할 필요가 있는가’라며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을 토로하는 리클린. 이에 데리다는 해체란 단순한 논리의 파괴나 모순에 대한 논리적 폭로가 아니며, 각자는 자신이 처해 있는 특수한 역사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황에서 해체의 고유한 방법을 발명해야 한다고 침착하게 대응한다. 섬세함은 때때로 상황에 부합하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하며, 이따금은 고지식할 정도로 강직한 슬로건을 휘두르며 가두시위에 나설 줄도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정교한 사유와 강력한 실천을 결합하려 했던 거장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공동 저작인 나치의 신화를 통해 전체주의의 개념과 구조를 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던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나치즘이 결코 비합리주의가 아니라 스스로 논리적인 구조를 갖춘 체제였으며, 스탈린주의에 관해서도 스탈린에 대한 민중의 광범한 지지를 결코 부정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낭시는 비결정성과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강조에 동의하면서도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고 그 결과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어떤 ‘진중한 근거들’이 요구됨을 역설한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 사이에서 드러나는 ‘분기점’도 흥미롭다. 라쿠–라바르트는 낭시가 ‘공동체’, ‘공동적 존재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혁명’임을 고백한다. 서구의 정치적 이념이 발전하는 순간은 그것이 혁명의 이념에 이끌려 갈 때뿐이라는 믿음이다.
또 다른 입장에서 해체론적 비판가라 할 수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중심 테제는 동일성/정체성 혹은 주체의 자기 동일성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해체에 있다. 사유의 절대적 주체는 본래적으로 분열된 주체이며, 우리는 동일성/정체성 따위를 애써 끄집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헤겔을 코제브와 라캉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읽고 있는 그는 헤겔과 라캉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가운데 ‘파괴로서의 해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있으며, 양자 간의 대립을 허물어뜨리는 중이다. 나아가 그는 (‘숭고’에 관한 그의 독특한 관점 때문에) ‘팝 문화’로의 근접성을 보여 주기도 한다.
∙분열분석적 파괴의 위상 재정립
당연한 말이지만 ‘분열분석적 파괴’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분열분석적 파괴’란 전통적 의미에서 이해되었던 형이상학 너머에 있는, 보다 본질적이며 상이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를 ‘소수성의 철학’이라 부른 바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파괴’는 그 위상을 다시 정의해야만 하는 전통적 사유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이 된다.
리클린에 따르면 가타리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끌어내기 위해 리클린의 말과 질문들을 필요로 했다. 물론 그가 실천적인 정신분석가였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으나, 담론에 대한 가타리의 태도는 ‘독백적’ 경향의 대담자들보다 훨씬 탁월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타리는 리클린의 질문에 부연 설명을 요청하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도 하는 한편, 자신이 들뢰즈와 함께 쓴 책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적 전통 철학으로의 회귀를 감지했다는 리클린에게 “책을 정확히 읽지 않았군요”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보드리야르가 ‘소비에트 출신’ 리클린 앞에서 공산주의를 옹호·찬양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공산주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모든 후진성과 관료주의, 경제적 낙후에도 불구하고 서구 세계를 능가하는 진일보한 사회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공산주의만이 자기 해체와 자기 해산의 위대한 역사적 행위를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한편 그는 앤디 워홀이나 제프 쿤스 같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업을 자신의 눈으로 평가하고, ‘느림’에 익숙한 자신의 리듬을 고백하기도 한다.
형이상학의 본질은 본래적으로 환상과 허구에 있다고 말하는 리처드 로티는 철학과 문학의 이분법적 구분에 반대한다. “철학과 문학의 구별이 필요한 사람은 다만 도서관 사서, 즉 교양 있는 공무원뿐”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철학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 역시 더 이상 불가능한 노릇인데, 가령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데리다는 기껏해야 독창적인 철학적 ‘저술가’에 불과한 것이다. 로티는 보드리야르가 미국에서 6주 정도 지내고 나서 미국인들은 이러저러하다 하는 식의 최종 결론을 내 버렸다며 ‘미국적 공동체’에 대한 유럽인들의 오해를 기각하려 하는 한편, 들뢰즈의 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끄집어낼 만한 게 없다”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테러의 시대, 형이상학은 무엇을 할 것인가?
2006년 10월, 체첸공화국에서 발생한 러시아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주력해 온 『노바야가제타』의 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가 모스크바의 아파트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 2007년 3월에는 러시아와 이란·시리아 사이의 비밀 무기거래를 추적하던 이반 사프로노프가 아파트 발코니에서 추락사했다. 러시아에서 이러한 의문사의 역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불과 며칠 전인 7월 15일, 체첸의 인권운동가 나탈리아 에스테미로바가 괴한에게 납치된 뒤 그날 오후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반체제 성향 인사들의 잇따른 피살을 전적으로 ‘전체주의의 망령’ 탓으로 돌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테러’의 심급에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자신이 일종의 테러에 의해 아내를 잃은 리클린은 이국(異國)에서 이 장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바야흐로 ‘테러’의 시대이다. 개인도 집단도 국가도 테러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9·11은 테러가 사회의 전면에 대두하는 하나의 결정적 국면이었다. 몸으로 직접 겪은 전체주의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치밀하게 사유하면서 ‘실천적 해체’를 고민해 온 리클린의 눈이 이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이 책의 ‘후기’로 덧붙인 「Apocalypse Now?」라는 제목의 글은 기왕에 이루어진 대담들을 ‘관념적 형이상학’의 세계에 가둬 두지 않고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려는 그의 노력의 산물이다. 이 글에서 리클린은 그와 대담을 나눈 철학자들이 9·11 테러를 두고 한 발언과 발표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현대 사회의 테러에 관한 분석을 시도한다.
철학자들의 입장은 (로티를 제외하고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배 체제에 의해 테러로서 규정된 것, 그리고 적의 이미지를 띠고 필연적으로 드러난 것은 바로 ‘그 자신의 본질’에 다름 아니었다. 이러한 본질을 그 자체로 인식하길 거부하는 한 지배 체제는 정확한 진단에 도달할 수 없을뿐더러 사태의 변화에 상응하는 섬세한 프로그램을 짤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테러에 대항하는 전쟁’이라는 슬로건은 ‘테러에 대항하는 테러’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테러의 본질과 메커니즘은 전 지구화 과정이라는 ‘비인격적 컨텍스트’로부터 유래한 ‘비인격적 귀결’과 다를 바 없다. 범죄자를 색출함으로써 사태를 일소할 수 있다는 희망은, “누군가 죄 있는 자가 있다”는 허구가 오직 상징계에서만 유효한 것처럼, 상상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들의 이러한 ‘분석’적인 태도는 리클린에게 그다지 만족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이 설정한 문제의식과 틀을 가지고 현상을 분석하는 데에는 열심이면서도 그것이 “종말론적 파국은 아니라며 태연하게 거리를 두는 철학자들을 보고 있자면, 학문적 관점에서는 평행선을 달리는 그들이 정작 사태의 자장으로부터는 한 발 물러선 채 테러 자체에 관한 평가와는 동떨어진, 오직 예견 가능한 결론만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의심스럽다. 마치 사태 자체에 대해 흥미를 잃은 지식인들이 사태를 ‘미학화’하면서도 그 결과를 처리하는 일은 망각해 버린 것처럼”(본문 429쪽)이라는 리클린의 일갈은 현실의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끊임없이 넘나들어야 했던 소비에트 출신 지식인으로서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형이상학이 어떤 해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그것을 자신의 분석의 도구 혹은 실천의 무기로 삼고 있는 미하일 리클린. 이 책이 단순히 ‘저명 철학자들의 인터뷰 모음집’이 아니라, (그 자신의 출신 때문에) 세계 철학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인물의 지적·실천적 투쟁기로 읽힐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