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1
베네딕테 잉스타·수잔 레이놀스 휘테 지음, 김도현 옮김 | 2011-03-25 | 576쪽 | 23,000원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 1권. 케냐, 소말리아, 우간다, 보츠와나, 터키 등 다양한 지역에서 '장애'라는 개념이 어떻게 규정되고(혹은 규정되지 않고) 인식되는지를 탐구하는 장애의 문화인류학 보고서이다. 이를 통해 생물학적 손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장애’가 ‘근대 서구’라는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국가권력과 의료권력에 의해 구성된 개념임을 밝히고, 이 개념의 균열과 해체를 모색해 본다.
저·역자 소개 ▼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 일반의료·지역의료학과의 의료인류학 교수이다. 그린란드, 노르웨이, 보츠와나, 감비아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으며, 짐바브웨, 탄자니아, 가나, 루마니아, 니카라과에서 재활에 대한 고문직을 수행했다. 주요 연구 관심사는 비교문화적 관점에서의 장애, 가구 내 의존적인 구성원들의 돌봄 문제, 개발도상국들에서의 노령 문제, 민간치료사와 민간의학, 에이즈의 사회문화적 차원, 개발에 있어 여성 중심 접근이다. 최근의 주요 저서로는 『지역사회와 세계사회의 장애』Disability in Local and Global Worlds(공저, 2007), 『장애와 빈곤: 세계적인 도전』Disability and Poverty: A Global Challenge(공저, 2011) 등이 있다.
저자 수잔 레이놀스 휘테 Susan Reynolds Whyte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교 인류학연구소 교수이다.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에서 현지조사를 수행했으며, 주요 연구 관심사는 우주론과 인격, 젠더, 질환의 인지, 의약, 개발도상국들에서의 보건의료의 변환이다. 최근의 주요 저서로는 『사회적 의료생활』Social Lives of Medicines(공저, 2002), 『지역사회와 세계사회의 장애』Disability in Local and Global Worlds(공저, 2007) 등이 있다.
역자 김도현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의 발행인이자 노들장애인야학 교사. 노들장애인야학 부설 기관인 노들장애학궁리소에서 연구 활동가로도 일하고 있다. 《차별에 저항하라》,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 《장애학 함께 읽기》, 《장애학의 도전》 등을 썼으며, 《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장애학의 오늘을 말하다》, 《철학, 장애를 논하다》, 《장애와 유전자 정치》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차례 ▼
책머리에 4
서장 장애와 문화 _ 수잔 레이놀스 휘테·베네딕테 잉스타 13
장애에 대한 보편적 정의? 17 | 유럽-미국적인 장애 23 | 차이와 인격 30 | 사회조직과 장애 34 | 사회적 처지와 장애 44 | 장애 해석 과정들의 분석 50 | 역사적 변환들 55
1부 장애, 우주론, 인격 65
1장 인격체와 비인격체 : 보르네오 중부 푸난바족 사이에서의 장애와 인격 _ 이다 니콜라이센 71
푸난바족, 그들의 사회와 문화 79 | 몸의 이미지들과 장애 80 | 공간성과 가시성 89 | 인격과 장애 93 | 결론 101
2장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 케냐 마사이족 사이에서의 장애와 평등 _ 에우드 탈레 106
목축민 마사이족 108 | 누가 장애인인가? 111 | 질병과 장애에 관한 신념 115 | 파멜레우: 저주의 사례 124 | 장애인의 치료와 장애인에 대한 태도 128 | 차이들 내에서의 정상성 133
3장 불치병으로서의 장애 : 소말리아 남부에서의 건강, 건강추구의 과정, 인격 _ 베른하르드 헬란데르 137
장애인들 141 | 건강추구의 과정 149 | 의사소통과 평가하기 154 | 질환 -꼬리표들 159 | 자비 또는 재활? 167 | 결론 169
4장 왜 장애인이 되었나? : 한 아프리카 사회에서의 신체적 장애에 대한 문화적 이해 _ 파트리크 데블리허르 174
신체적 장애와 사회적 지위 177 | 송게족 사회에서의 장애에 대한 대처 181 |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장애 이슈들 182 | 물리적 환경 184 | 마법 186 | 조상들 189 | 신부대 190 | 신 191 | 결론 192
5장 병든다는 것 그리고 나를 찾는 것 : 다발성경화증 내러티브 속에서의 자아, 몸, 시간 _ 주디스 멍크스·로널드 프랑켄버그 196
연구의 배경 202 | 초기 204 | 중기 209 | 말기 229 | 장애인의 삶에 대한 전범으로서의 라이프스토리와 질환 내러티브들 243 | 결론 248
2부 장애의 사회적 맥락 253
6장 사회적 만남들 : 미국 사회의 침묵하는 몸 _ 로버트 머피 260
7장 눈이 보이는 애인과 맹인 남편 : 우간다에서 맹인 여성들의 경험 _ 나인다 센툼브웨 300
문제의 정의 301 | 맹에 대한 인식 303 | 맹인의 취약성 306 | 지속되는 병자 역할 307 | 우간다 여성의 가사 역할 309 | 성교 및 부부관계 312 | 맹인 여성들의 성교 및 결혼 기회 315 | 섹슈얼리티와 가정생활에서의 사회관계들 319 | 유능한 우간다 여성의 예로서의 맹인 여성들 321 | 눈이 보이는 남성들과의 성적 관계가 갖는 사회적 함의들 322 | 결론 324
8장 재활에 대한 공적 담론들 : 노르웨이에서 보츠와나로 _ 베네딕테 잉스타 329
노르웨이 332 | 보츠와나 344 | 재활담론들의 이전 357
9장 영웅, 거지, 또는 스포츠 스타 : 니카라과에서 장애인 정체성의 협상 _ 프랑크 잘레 브룬 368
배경 371 | 혁명적 보건의료 373 | 산악지대로부터의 귀향 374 | 거지와 영웅에 대한 신문 기사들 380 | 장애 관련 단체들과 장애인 스포츠 스타들 383 | 영웅과 순교자들 388 | 결론 391
10장 장애와 이주 : 하나의 사례 이야기 _ 리스베트 사크스 394
몇 가지 개념들 396 | 배경 400 | 서구 생의학과의 맞닥뜨림 403 | 되네의 이야기 405 | 되네의 아들에 대한 터키인 이주자 마을 여성들의 견해 414 | 되네의 아들에 대한 스웨덴 의사들의 견해 418 | 결론 421
11장 간질의 문화적 구성 : 동아프리카에서의 이미지와 맥락들 _ 수잔 레이놀스 휘테 424
하나의 문화적 범주로서의 간질 429 | 벌레와 오염에 대하여 436 | 원인과 치료법들 444 | 간질의 사회적 맥락 451 | 우리의 개념과 그들의 경험 458
12장 음포 야 모디모 - 신으로부터의 선물 : 장애인을 향한 ‘태도’에 대한 조망 _ 베네딕테 잉스타 462
신화의 형성 462 | 장애아동의 어머니라는 처지에 있는 인류학자 465 | 보츠와나 466 | 태도라는 개념 475 | 결론 491
종장 담론과 경험 사이에서의 장애 _ 수잔 레이놀스 휘테 496
장애의 서구적 구성 500 | 종족 -기형학: 이례적인 것에 대한 담론 504 | 불운으로서의 차이: 원인에 대한 담론 510 | 엘리펀트맨의 교훈 514 | 경험과 표상 518 | 현지조사, 담론, 경험 527
옮긴이 후기 541
참고문헌 550 | 찾아보기 568
편집자 추천글 ▼
‘차이’와 ‘손상’이 있을 뿐, ‘장애’가 존재하지 않는 곳들에 대한 보고서!
송게족에게 있어, 결함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송게족은 ‘왜 장애인이 되었나?’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으며, 인간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 간의 관계에 대한 탐색을 통하여 결함의 원인에 대한 답을 구한다. 서구적 맥락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제공될 수 있는 답변이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다. …… ‘왜?’라는 질문이 서구적 맥락에서는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는 것처럼, 장애인의 삶의 상태를 개선시키는 기법은 전통적인 송게족 사회의 맥락에서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이처럼 ‘왜?’라는 질문이 중심적이기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의 장애인에게는 많은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는다. 장애인들은 정상적인 생활 내에 평범한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다. 특별한 의식(儀式) 없이, 의학적으로도 크게 주목받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닌 채로 말이다. (본문 182~183쪽)
근대 서구사회에서 손상된 몸에 의미를 부여하고 치료를 결정하는 과정들은 현대 의학체계와 국가의 제도 안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러한 결정들은 통상적으로 생물학적 손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진 ‘장애’의 정의와 분류법에 기초하고 있으며, ‘장애’라는 진단을 받은 이들은 교육?노동 등 사회의 각 영역에서 배제되어 갔다.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의 첫번째 권으로 출간된 이 책『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 :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원제: Disability and Culture)은 문화인류학의 연구방법을 참조하여 ‘손상’이 ‘장애’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 즉 낙인과 차별을 부과하는 ‘장애’라는 범주 자체가 없는 다양한 사회 ― 남미, 아프리카에서부터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 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서술을 통하여 우리는 당연하고 본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장애’라는 개념이 특수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인식하며, 장애 개념의 균열과 해체를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개발도상국의 장애를 다루고 있는 연구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인식하에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연구자들이 수년간 기획한 현지조사의 성과물들이며, 그간 문화인류학 연구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주제이기에 의미가 더욱 깊다.
그린비출판사는 지난 2009년『장애학 함께 읽기』(김도현 지음)를 통해, 의료나 재활의 관점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장애 문제에 접근하는 ‘장애학’이라는 학문 분과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바 있다. 장애와 관련된 말들이 제대로 된 영향력을 갖기 어려운 현실에서, 현장과 이론의 접속을 도모하는 이 같은 시도는 장애의 새로운 담론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그린비출판사는 하나의 시도를 넘어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이라는 새로운 기획을 선보이려 한다. 문화인류학, 역사학, 철학, 사회학, 여성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장애라는 개념을 재조명하는 그린비 장애학 컬렉션은 장애 담론이 빈약한 한국 사회에 함께 읽고 성찰할 수 있는 공동의 텍스트(con-text)를 제시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장애관(觀)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이론적?실천적 담론을 구성해 나가고자 한다(도서목록은 책의 뒷날개 참조).
‘장애’는 어디에나 존재하는가 : 차이와 손상은 있되, 장애는 없다
서구사회에서 ‘장애’의 정의와 분류는 생물학적 손상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의료기관이 손상된 몸에 진단을 내리면 국가는 장애 관련 제도와 정책에 의거해 이에 합당한 재활과 복지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손상과 질병에 대한 진단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며, 같은 정도로 ‘장애화’되지도 않는다.
손상과 관련하여 주되게 관심을 두는 측면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푸난바족, 마사이족, 소말리족 등 다양한 부족사회의 사람들은 손상 그 자체보다는 손상의 원인과 종류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손상을 입은 자가 특정한 금기를 어긴 일은 없는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은 없는지, 악령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일은 없는지 등의 여부에 대해 말이다. 사람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손상의 원인에 대해 논의하고, 이에 알맞은 치료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장애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기를 꺼려하거나, 손상의 치료과정을 의료권력에 전적으로 내맡기지 않는다.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손상을 입은 이들(서구의 관점에서는 ‘장애인’)은 손상되었다는 그 자체만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손상을 입은 이들은 그들의 능력범위 안에서 생산노동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의례와 사교적 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들이 사회에 잘 통합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가족과 지역공동체의 의무이다.
이 책은 또한 한 사회 안에서도 장애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는 점을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로 변환되어 감에 따라 장애인들의 노동 참여가 이전보다 축소되기도 하고(1장), 유사한 정도의 손상이라 할지라도 젠더(gender)별로 부여되는 규범과 기대치에 따라 장애화되는 정도가 달라지기도 한다(7장). 더욱이 세계화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는 서로 다른 장애 관념들이 부딪치고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늘어가는 ‘국제 이주’로 인해 이 같은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10장). 이처럼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서술은 장애가 특정한 맥락을 떠나 다루어질 수 없으며, 본질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정되고 변화하는 관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 사회의 ‘장애’ : 침묵되거나, 재현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되거나
장애인들은 전과자, 민족적?인종적 소수자, 정신질환자와 마찬가지로 가치 절하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신체적 손상을 지닌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사회에 의해 부정적인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그의 사회생활 중 많은 부분은 이렇게 부여된 부정적 이미지와의 투쟁이 된다. 우리가 낙인화란 장애의 실체라기보다는 다소간 부산물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사회에 완전히 참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그의 신체적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그러한 결함에 덧붙인 일련의 신화?두려움?오해들이다. (본문 261쪽)
이 책은 서구화된 사회 안에서 ‘장애’가 이해되고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도 문화인류학적인 방식으로 고찰하고 있다. 우선, 장애는 많은 경우 침묵 속에 고립되어 있었다. 서구사회에서 장애는 발설되지 않아야 하는 것,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취급되며, 다른 이의 손상을 가리키거나 응시하거나 언급하는 행위는 일종의 무례함 혹은 금기처럼 여겨진다. 부족사회의 사람들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특정 손상에 대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이례적인 특성’과 ‘차이’들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를 매우 난감한 것이고, 많은 이들에게 침묵과 회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편, 장애인들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매체에 의해 특정한 이미지로 재현되기도 하는데, 그 중 한 예가 이 책의 종장에서 다루고 있는 조지프 메릭의 사례이다. 심각한 안면장애를 앓아 ‘엘리펀트맨’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던 그는 생전에 많은 사람들에게 오락거리로 ‘전시’되었으며, 이후에도 영화나 연극, 책 등을 통하여 다양한 이미지로 우리 앞에 ‘재현’되고 있다. 무수한 말들 속에서 정작 자신의 말을 잃은 조지프 메릭의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주체적인 힘을 부정당한 채 특정 주체의 필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재현되는 상황에 대해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특정 이미지의 재현은 비서구사회의 장애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장애인들은 자선단체나 연구자들에 의해 ‘가족들에게 학대받는 이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로 그려지고 있는데, 이 책은 그러한 이미지의 과장된 측면에 대해서도 조명하고 있다.
장애인들의 정체성은 또한 다양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협상되기도 한다. 이 책의 9장에서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가 혁명전쟁으로 인해 상해를 입은 군인들에게 ‘영웅’, ‘순교자’ 등의 이미지를 부과한 후, 최상의 재활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반정부파는 장애인들을 ‘혁명의 피해자’,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서 그려냈다. 니카라과의 사례는 장애인의 정체성이 다양한 정치적 목적과 수사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며, 얼마든지 다른 정체성으로 협상되고 변환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하여 우리는 ‘장애’가 특정 주체들에 의해 침묵되거나 재현되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달리 주장되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식할 수 있다.
장애인 차별 철폐를 넘어, ‘장애’ 그 자체의 철폐를 위하여
2010년과 2011년, 장애계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장애등급심사제도’이다. 정부는 2007년 4월부터 장애수당을 신규로 신청하는 중증장애인에 대해, 일선 의료기관의 장애판정 자료를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로 보내 장애등급을 최종 결정하도록 하는 장애등급심사제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사는 2009년 10월, 2010년 1월과 7월에 걸쳐 전면 확대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장애인들의 등급이 하락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본래의 등급에서 하락된 장애인들은 활동보조서비스를 비롯한 각종 복지혜택에서 제외되었으며, 하루아침에 손발이 꽁꽁 묶인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 책『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의 관점에 따라 우리는 장애등급심사제도의 일방성에 대해 비판하기에 앞서, 특정 손상을 장애로 범주화하고 여기에 등급을 매겨 차별적으로 관리하는 국가권력의 작동원리에 문제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국가권력이 정책의 수립과 효율적 시행을 위해 자의적으로 설정해 놓은 ‘장애’라는 범주와 등급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장애인의 개별적 삶은 제도 안에 꽁꽁 묶여 정책과 제도가 바뀔 때마다 무참히 잘려 나가고 말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정착되어 온 장애등급제는 과연 철폐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들 자신부터 장애등급제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볼 수나 있는가? 우리는 어떤 대안을 꿈꿔 볼 수 있을까?
우리의 익숙한 시각과 처지에서 벗어나 새롭게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다른 문화의 사례와 양상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문화인류학적인 관점에서 장애에 접근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어떤 사회에는 장애정책의 시행을 위한 등급제가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또 어떤 사회에는 ‘장애’라는 보편적인 범주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손상을 입은 사람이 모든 사회에서 배제되고 억압받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정체성은 한 사회의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될 수도 있다. 장애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접근방식은 이처럼 각 사회가 처한 맥락 속에서 다르게 구성되는 손상의 사례를 보여 줌으로써, 장애에 차별적인 우리 사회가 지금과는 충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 책『우리가 아는 장애는 없다』를 통해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장애’의 의미들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는 동시에, 차이가 차별로 구성되지 않는, ‘장애’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장애인 차별 철폐를 넘어, 장애라는 ‘보편적’ 범주의 철폐를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