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8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변학수 옮김 | 2020-07-20 | 208쪽 | 18,000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18번째 책.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마지막 저서로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갔을 당시 집필한 책이다.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모세가 이집트인이었고, 그런 모세가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가설을 활용해 유대인의 집단 심리를 추적한다. 프로이트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의 트라우마 이론이 집단심리학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며, 히브리의 역사에서 아버지 살해의 트라우마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지크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
마르크스, 니체와 함께 현대 3대 혁명 사상가다. 프로이트는 의식 일변도의 심리학을 해체하고 종래에는 은폐되었던 무의식의 세계를 들추어냄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추구하고 건강한 정신 상태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1856년 5월 6일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과 빈 대학 의학부에서 학업성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학생이었다. 대학에서 브뤼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해부학과 생리학에 심취했다.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1886년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했으며, 개인 병원을 개원하고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치료와 동시에 정신 신경증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 등 두 권의 방대한 저서를 출판하면서 심리학을 넘어서 메타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독자적으로 창안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카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신봉자가 되었으나 1914년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반대해 프로이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쾌락 원리의 저편≫(1920), ≪자아와 이드≫(1923), ≪환상의 미래≫(1927), ≪문화에서의 불안≫(1930) 등을 출판했다. 1938년 프로이트는 딸 아나 프로이트와 함께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다. 1923년부터 1939년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서른세 번에 걸친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연구와 저술에 온 생애를 바쳤다.
역자 변학수
헤세가 좋아 슈바르츠발트, 마울브론 수도원, 마르바흐, 하이델베르크, 빈으로 여행하며 독문학을 시작하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 통번역 대학원을 거쳐,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독어교육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 프리츠 펄스 연구소에서 문학치료사 훈련가 자격을 취득하였고,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프로이트 프리즘》, 《문학적 기억의 탄생》, 《문학 치료》, 《내면의 수사학》, 《감성 독서》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보리스를 위한 파티》, 릴케의 《시작 노트》, 쇼펜하우어의 《논쟁술》,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프로이트의 치료 기법》, 《문화 속의 불쾌》, 《기억의 공간》, 《이집트인 모세》, 《시와 인식》, 《신들의 모국어》, 《니체의 문체》 등이 있다. 그리고 평론집으로 《잘못 보기》, 《토르소》, 에세이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을의 언어》, 《다이달로스의 슬픔》 등이 있다.
마르크스, 니체와 함께 현대 3대 혁명 사상가다. 프로이트는 의식 일변도의 심리학을 해체하고 종래에는 은폐되었던 무의식의 세계를 들추어냄으로써 의식과 무의식의 균형을 추구하고 건강한 정신 상태를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1856년 5월 6일 모라비아의 프라이베르크에서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과 빈 대학 의학부에서 학업성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학생이었다. 대학에서 브뤼케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해부학과 생리학에 심취했다. 1885년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장 샤르코 밑에서 장학생으로 약 5개월간 연구하면서 히스테리와 최면술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이것은 장차 정신분석학을 창안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된다. 1886년 프로이트는 마르타 베르나이스와 결혼했으며, 개인 병원을 개원하고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프로이트는 치료와 동시에 정신 신경증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꿈의 해석≫과 ≪정신분석학 입문 강의≫ 등 두 권의 방대한 저서를 출판하면서 심리학을 넘어서 메타심리학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독자적으로 창안하게 되었다. 1906년에는 카를 구스타프 융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신봉자가 되었으나 1914년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이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론에 반대해 프로이트와의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쾌락 원리의 저편≫(1920), ≪자아와 이드≫(1923), ≪환상의 미래≫(1927), ≪문화에서의 불안≫(1930) 등을 출판했다. 1938년 프로이트는 딸 아나 프로이트와 함께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했다. 1923년부터 1939년 죽을 때까지 16년 동안 서른세 번에 걸친 구강암 수술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연구와 저술에 온 생애를 바쳤다.
역자 변학수
헤세가 좋아 슈바르츠발트, 마울브론 수도원, 마르바흐, 하이델베르크, 빈으로 여행하며 독문학을 시작하였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오스트리아 빈 대학 통번역 대학원을 거쳐, 슈투트가르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철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국비 장학생으로 공부했으며, 현재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유럽어교육학부 독어교육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독일 프리츠 펄스 연구소에서 문학치료사 훈련가 자격을 취득하였고, 현재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프로이트 프리즘》, 《문학적 기억의 탄생》, 《문학 치료》, 《내면의 수사학》, 《감성 독서》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보리스를 위한 파티》, 릴케의 《시작 노트》, 쇼펜하우어의 《논쟁술》, 《제국의 종말 지성의 탄생》, 《프로이트의 치료 기법》, 《문화 속의 불쾌》, 《기억의 공간》, 《이집트인 모세》, 《시와 인식》, 《신들의 모국어》, 《니체의 문체》 등이 있다. 그리고 평론집으로 《잘못 보기》, 《토르소》, 에세이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을의 언어》, 《다이달로스의 슬픔》 등이 있다.
차례 ▼
I. 이집트인 모세 7
II.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 23
III. 모세, 그의 민족, 그리고 일신론적 종교 77
제1부 78
서문 I(1938년 3월 이전) 78 | 서문 II(1938년 6월) 81 | A. 역사적 전제 84 | B. 잠복기와 전승 94 | C. 유비 102 | D. 적용 113 | E. 난점들 128
제2부 _ 요약과 반복 142
a. 이스라엘 민족 144 | b. 위대한 사람 147 | c. 영성의 진보 153 | d. 욕동의 단념 159 | e. 종교의 진리 내용 167 | f. 억압된 것의 회귀 170 | g. 역사적 진리 174 | h. 역사적 전개 180
옮긴이 후기 187
찾아보기 201
II.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면 23
III. 모세, 그의 민족, 그리고 일신론적 종교 77
제1부 78
서문 I(1938년 3월 이전) 78 | 서문 II(1938년 6월) 81 | A. 역사적 전제 84 | B. 잠복기와 전승 94 | C. 유비 102 | D. 적용 113 | E. 난점들 128
제2부 _ 요약과 반복 142
a. 이스라엘 민족 144 | b. 위대한 사람 147 | c. 영성의 진보 153 | d. 욕동의 단념 159 | e. 종교의 진리 내용 167 | f. 억압된 것의 회귀 170 | g. 역사적 진리 174 | h. 역사적 전개 180
옮긴이 후기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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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추천글 ▼
유대인의 이집트인 구원자 “그 사람 모세”
모세 살해의 트라우마가 남긴 인류 역사의 흔적
우리는 프로이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는 프로이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갔을 당시 완성되었으며, 그가 82세 되던 해인 1939년에 출간되었다. 프로이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쓰고 그해 타계하였다.
이 책은 제목부터 용이하지 않다. “그 사람 모세”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역본에서 번역한 기존의 번역서는 “인간 모세” 혹은 그냥 “모세”라고 한 경우가 많은데, 프로이트는 독일어본에서 왜 “그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 의문을 우리는 2010년 그린비에서 출간된 얀 아스만의 책 『이집트인 모세』에서 풀 수 있었다.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기억”의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스만의 문화학적 저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지만,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유일신 종교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그들이 보기에 못마땅한 모세를 출애굽기 11장 3절의 표현대로, “그 사람 모세”라고 지칭하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가설이다.
모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의 이름에 대한 기록을 추적한다. 그리고 모세가 추종한 아케나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 아케나톤은 모세와는 달리 기원전 1350년경에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데, 그가 유일신교를 창시하기 전까지 이집트는 보수적이고 매우 영향력이 강한 사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문 숭배라는 이름하에 다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사자숭배나 미라, 화려한 무덤 등에서 보듯이 사후 세계를 믿고 있었다. 아케나톤은 이 모든 것을 말살하고 아문을 섬기는 첫 일신교를 창설하였다. 이 종교는 마법과 주술을 배제하였고 성상을 부정하였으며, 사후 세계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오직 이 땅에서의 삶만을 찬양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유일한 신 아톤만을 섬기고 나머지 신들은 배격했다. 프로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모세는 이런 아케나톤의 추종자인 사제(레위지파)였거나 아니면 이집트 귀족, 그것도 아니면 어떤 변방의 총독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의 역사에 감춰진 “아버지 살해”
집단심리학에 적용된 트라우마 이론
그러면 고고학자도, 역사가도, 히브리 종교의 랍비도 아닌 그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프로이트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에서 밝힌 트라우마 이론을 집단심리학에 적용하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토템과 타부』에서 주장한 그의 가설을 이집트인 모세에 적용하여 모세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려던 그의 첫 의도는 빗나가고 만다. 그의 말대로라면 “진흙 위의 청동기단”이 된 셈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개인 심리학적 차원의 트라우마 이론이 집단심리학에도 적용된다는 가설뿐이었다. 그때 그는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브레스티드, 마이어, 젤린과 같은 학자들의 가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가설을 오이디푸스 이론과 연결하여, 결국 히브리의 역사에서 아버지 살해라는 집단 심리를 추적한다. 그것은 드디어 집단 심리학에서의 잠복과 회귀라는 가설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가 이 글을 쓴 것은 유대 역사가 예루살미가 설명한 유대인 정체성 때문도 아니고 생물학적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변호 때문도 아니다.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말하기도 했지만 유대종교의 역사나 모세에 관한 성서비판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연구한 것은 그가 여러 번 힘주어 주장하고 있듯이 개인심리학과 집단심리학의 유비(類比)에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주장은 정신분석의 트라우마 이론에서 출발한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다가 (계기를 만나면) 회귀한다. 어떤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잊혔다가 어떤 잠복기를 거쳐 새로 부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집단문화에도 이런 과정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 생각에 살해된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죽음(기독교에서는 훗날 오시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본다)을 예언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전승을 정당화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모세에 관한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추론을 여러 장에 걸쳐 펼친다. 그는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 카데스에서 미디안의 사제가 되어 화산신인 야훼를 받아들이는 모세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며, 분노하고 시기하는 야훼의 모습 또한 사실은 모세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유대의 종교는 결국 모세교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아버지 살해를 계통발생의 반복설을 주장한 라마르크주의에 의존하여 기독교의 예수 십자가 처형에도 적용한다. 결국 유대인은 두 번에 걸쳐 아버지 살해를 반복한 것이다.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프로이트는 유대인이 모세를 살해하여 죄의식을 얻고, 나아가 예수까지 살해함으로써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반지성주의이다,
소멸의 공포가 만들어 낸 현재진행형의 텍스트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첫 문장에서 고백한 프로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민족의 후손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그리고 쉽게 저지를 일이 못된다. 더구나 그것을 집필하는 사람이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어떤 사태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통찰에 이득을 얻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라는 대목에서 프로이트가 모세에 관한 진실을 과감히 말하려는 학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프로이트가 주창한 정신분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니까.
프로이트는 다른 성상(聖像) 종교(프로이트는 기독교를 완전한 일신교로 보지는 않는다)에 비하여 유대 일신교는 영성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옹호한다. 유대 유일신교는 성상금지와 함께 주술적 의례의 거부, 그리고 계명을 통한 윤리적 요구의 강조에 기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대해 프로이트는 반지성주의, 즉 영성의 진보에 대한 반작용 형성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를 포함한 반유대주의는 욕동의 단념을 요구한 유일신교에 대한 비이성적 저항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파라텍스트는 텍스트와 교묘히 얽혀 있다. 그는 망명하기 전, 이미 빈에 있을 때부터 가톨릭에 의해 정신분석이 끊어질까 봐 큰 불안을 느꼈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말살될까 봐(그래서 자신의 업적이 폐기될까 봐) 불안해했고, 그리고 아들(칼 융)로부터 ‘아버지 살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책을 하나의 목소리로 읽을 수 없다. 비록 모세에 대한 가설, 라마르크주의에 입각한 사유, 오이디푸스 가설 등이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미 100년 전에 기억 담론의 요지를 선취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를 현재진행형의 텍스트로 만들어 준다.
모세 살해의 트라우마가 남긴 인류 역사의 흔적
우리는 프로이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는 프로이트가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을 갔을 당시 완성되었으며, 그가 82세 되던 해인 1939년에 출간되었다. 프로이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쓰고 그해 타계하였다.
이 책은 제목부터 용이하지 않다. “그 사람 모세”란 도대체 무엇인가? 영역본에서 번역한 기존의 번역서는 “인간 모세” 혹은 그냥 “모세”라고 한 경우가 많은데, 프로이트는 독일어본에서 왜 “그 사람”이라고 했을까? 이 의문을 우리는 2010년 그린비에서 출간된 얀 아스만의 책 『이집트인 모세』에서 풀 수 있었다. 모세가 이집트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기억”의 인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스만의 문화학적 저서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지만,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유일신 종교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그들이 보기에 못마땅한 모세를 출애굽기 11장 3절의 표현대로, “그 사람 모세”라고 지칭하였다. 물론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프로이트의 가설이다.
모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그의 이름에 대한 기록을 추적한다. 그리고 모세가 추종한 아케나톤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한다. 아케나톤은 모세와는 달리 기원전 1350년경에 이집트 역사에 등장하는데, 그가 유일신교를 창시하기 전까지 이집트는 보수적이고 매우 영향력이 강한 사제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아문 숭배라는 이름하에 다신을 섬기고 있었으며 사자숭배나 미라, 화려한 무덤 등에서 보듯이 사후 세계를 믿고 있었다. 아케나톤은 이 모든 것을 말살하고 아문을 섬기는 첫 일신교를 창설하였다. 이 종교는 마법과 주술을 배제하였고 성상을 부정하였으며, 사후 세계를 부정하였다. 그들은 오직 이 땅에서의 삶만을 찬양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유일한 신 아톤만을 섬기고 나머지 신들은 배격했다. 프로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모세는 이런 아케나톤의 추종자인 사제(레위지파)였거나 아니면 이집트 귀족, 그것도 아니면 어떤 변방의 총독이었을 것이다.
히브리의 역사에 감춰진 “아버지 살해”
집단심리학에 적용된 트라우마 이론
그러면 고고학자도, 역사가도, 히브리 종교의 랍비도 아닌 그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프로이트는 개인 심리학적 차원에서 밝힌 트라우마 이론을 집단심리학에 적용하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해 『토템과 타부』에서 주장한 그의 가설을 이집트인 모세에 적용하여 모세에 관한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소설을 쓰려던 그의 첫 의도는 빗나가고 만다. 그의 말대로라면 “진흙 위의 청동기단”이 된 셈이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개인 심리학적 차원의 트라우마 이론이 집단심리학에도 적용된다는 가설뿐이었다. 그때 그는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브레스티드, 마이어, 젤린과 같은 학자들의 가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가설을 오이디푸스 이론과 연결하여, 결국 히브리의 역사에서 아버지 살해라는 집단 심리를 추적한다. 그것은 드디어 집단 심리학에서의 잠복과 회귀라는 가설을 만들어 낸다.
프로이트가 이 글을 쓴 것은 유대 역사가 예루살미가 설명한 유대인 정체성 때문도 아니고 생물학적 라마르크주의에 대한 변호 때문도 아니다. 역사소설을 쓰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말하기도 했지만 유대종교의 역사나 모세에 관한 성서비판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관찰하고 연구한 것은 그가 여러 번 힘주어 주장하고 있듯이 개인심리학과 집단심리학의 유비(類比)에 있다. 당연하게도 그의 주장은 정신분석의 트라우마 이론에서 출발한다. 유년기의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잠재되어 있다가 (계기를 만나면) 회귀한다. 어떤 교통사고도 마찬가지다. 당시에는 잊혔다가 어떤 잠복기를 거쳐 새로 부활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집단문화에도 이런 과정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믿었다.
프로이트 생각에 살해된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죽음(기독교에서는 훗날 오시는 예수를 의미한다고 본다)을 예언하는 이사야서 53장의 전승을 정당화할 수 없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모세에 관한 기록이 왜곡되었다는 추론을 여러 장에 걸쳐 펼친다. 그는 출애굽을 주도한 모세, 카데스에서 미디안의 사제가 되어 화산신인 야훼를 받아들이는 모세는 성경에서 말하는 인물과는 다른 사람이며, 분노하고 시기하는 야훼의 모습 또한 사실은 모세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유대의 종교는 결국 모세교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아버지 살해를 계통발생의 반복설을 주장한 라마르크주의에 의존하여 기독교의 예수 십자가 처형에도 적용한다. 결국 유대인은 두 번에 걸쳐 아버지 살해를 반복한 것이다. 확정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프로이트는 유대인이 모세를 살해하여 죄의식을 얻고, 나아가 예수까지 살해함으로써 반유대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유대주의는 반지성주의이다,
소멸의 공포가 만들어 낸 현재진행형의 텍스트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첫 문장에서 고백한 프로이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어떤 민족의 후손들에게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 민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그리고 쉽게 저지를 일이 못된다. 더구나 그것을 집필하는 사람이 그 민족에 소속되어 있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 때문에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어떤 사태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통찰에 이득을 얻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민족의 추정적 이해관계”라는 대목에서 프로이트가 모세에 관한 진실을 과감히 말하려는 학자라는 걸 알 수 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모세는 프로이트가 주창한 정신분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니까.
프로이트는 다른 성상(聖像) 종교(프로이트는 기독교를 완전한 일신교로 보지는 않는다)에 비하여 유대 일신교는 영성의 진보를 이루었다고 옹호한다. 유대 유일신교는 성상금지와 함께 주술적 의례의 거부, 그리고 계명을 통한 윤리적 요구의 강조에 기초한다. 그렇기 때문에 반유대주의에 대해 프로이트는 반지성주의, 즉 영성의 진보에 대한 반작용 형성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히틀러를 포함한 반유대주의는 욕동의 단념을 요구한 유일신교에 대한 비이성적 저항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의 파라텍스트는 텍스트와 교묘히 얽혀 있다. 그는 망명하기 전, 이미 빈에 있을 때부터 가톨릭에 의해 정신분석이 끊어질까 봐 큰 불안을 느꼈고, 나치에 의해 유대인이 말살될까 봐(그래서 자신의 업적이 폐기될까 봐) 불안해했고, 그리고 아들(칼 융)로부터 ‘아버지 살해’를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책을 하나의 목소리로 읽을 수 없다. 비록 모세에 대한 가설, 라마르크주의에 입각한 사유, 오이디푸스 가설 등이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이미 100년 전에 기억 담론의 요지를 선취했다는 사실이 『그 사람 모세와 일신론적 종교』를 현재진행형의 텍스트로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