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높은 자

블랑쇼 선집 10

모리스 블랑쇼 지음, 김예령 옮김 | 2019-04-10 | 448쪽 | 28,000원


그간 비평서를 통해, 혹은 불연속적인 침묵과 파편적 중얼거림에 가까운 글쓰기를 통해 블랑쇼를 접해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 모처럼 선보이는 본격 소설 작품. 『지극히 높은 자』는 1941년의 『토마 알 수 없는 자』 첫 판본, 1942년의 『아미나다브』와 함께 초기 소설 3부작을 이루며, 바타유, 클로소프스키,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 등 많은 철학자들이 이야기하고 또 결과물까지 남긴 바 있는 작품이다. 희랍 비극, 독일 문학과 철학의 영향을 관통하며, 방대하고 집요하고 난해하며 압도적이란 평을 받는다.


저·역자 소개 ▼

저자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문학비평·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동시에 그들과 적지 않은 점에서 여러 문제들을 공유하였다.주요 저서로 『토마 알 수 없는 자』, 『죽음의 선고』, 『원하던 순간에』,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무한한 대화』, 『우정』, 『저 너머로의 발걸음』, 『카오스의 글쓰기』, 『나의 죽음의 순간』 등이 있다.

역자  
김예령
강사, 번역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및 동 대학원, 파리 7대학을 거쳤다(문학박사, 셀린 전공). 옮긴 책으로 『이방인』,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사뮈엘 베케트의 말 없는 삶』, 『제멜바이스 / Y 교수와의 인터뷰』, 『세계와 바지』 등이 있다.
차례 ▼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7장

8장

9장

 

옮긴이 후기 _ 법, 병, 말

모리스 블랑쇼 연보

모리스 블랑쇼 저작목록

편집자 추천글 ▼

의 한계-너머와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블랑쇼의 문제작!

  

현대 프랑스의 문학과 사유의 지형도에서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이름, 모리스 블랑쇼.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블랑쇼 문학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기념비의 없음으로부터 오며, 그것의 자취는 중심을 제 안으로부터 이탈시키려는 치열한 ‘바깥’의 움직임으로서만 가늠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사실이 오로지 언어의 문제를 사유하고 침묵과 고독의 글쓰기를 실천하는 데 바쳐진 블랑쇼의 문학을, 바로 그렇기에 스스로의 테두리를 넘어 자기동일성과 순수성의 논리에 입각한 일체의 구조들을 해체하는 힘일 수 있도록 만든다.


담론, 권력, 주체(근대의 형성에서 이 셋은 내적으로 긴밀히 엮여 있다)에 대해, 또는 법의 초월성과 역사의 종말에 맞서, 블랑쇼는 끈질기게 바깥, 부재, ‘중성’의 가능성을 천착한다. 그리고 인간의 한계-너머와 그 죽음의 의미를 성찰한다. 나아가 공동체에의 이상이 전체주의라는 비극으로 귀결하고 난 이후에 도래할 수 있을 또 다른 공동체의 문제를 모색한다(이 모색은 우회를 거치면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예술이 가능한가, 라는 오랜 물음과도 만나리라). 이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정확히 말하면 그의 글쓰기와 문학의 요체는 부단히 이런 식의 질문을 던지며 막다른 골목의 경계를 밀고 고립된 성채의 근저에 틈과 생채기를 내는 데에 있지, 결코 궁극적인 확답의 제시에 있지 않다. 예술과 정치, 미학과 윤리의 문제가 한자리에서 만나는 블랑쇼의 치열한 글쓰기 속에서 비단 그 한 사람만이 아닌, 동시대적 성찰들이 저마다 고독하게, 그러나 무한히 함께 영향을 주고받는바, 마치 그 모든 대화의 끝없음이 지니는 유일한 (목적 아닌) 목적이란 단독의 어느 한 지점에서 그 궁극의 확언이 부과되지 않게끔 방지하는 일인 듯 보인다.

 

 

더없이 고조되는가, 더없이 전락하는가.

블랑쇼의 디스토피아, 몽환적 우화가 말해 주는 것

 

이번에 그린비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지극히 높은 자』는 그간 비평서를 통해, 혹은 불연속적인 침묵과 파편적 중얼거림에 가까운 글쓰기를 통해 블랑쇼를 접해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 모처럼 선뵈는 그의 본격 소설이다. 다소 도식적으로 설명한다면, 블랑쇼는 1948년 여름에 발간된 『죽음의 선고』와 더불어 ‘소설’ 창작을 접고 ‘이야기’(récit)의 시기에 진입한다. 기실 『죽음의 선고』와 거의 동시에 출간된 『지극히 높은 자』는 1941년의 『토마 알 수 없는 자』 첫 판본, 그리고 1942년의 『아미나다브』와 함께 그의 초기 소설 삼부작을 이루는 동시에, 그 세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으로 자리매김된다.


일찍이 블랑쇼는 “이야기는 사건의 연관 관계가 아니라 사건 그 자체를, 사건으로의 접근을, 사건이 발생하기 위해 불려오는 장소를” 다룬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야기와 대비되는 장르로서의 소설은 일상의 시간을 구현하고 실재의 사건들을 모방하는 그 형식 속에 이야기가 담지 않는 다각적인 요소들을 다루고, 특유의 다잡성에 힘입어 이야기가 스스로의 공간화를 위해 생략하는 일들을 수행한다는 말이 된다. 즉, 『지극히 높은 자』는 『죽음의 선고』의 기획이 깎아 낸 한 축을 담당하여 그 측면을 한껏 전개하고 발전시킨다. 이 장편소설은 방대하고 압도적이고 집요하고 난해하며, 조금씩 완만하게 반복을 거듭하는 가운데 제 역사를 구성하다 어느 순간 극적으로 휘몰아치면서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대단원을 향해 폭발한다. 더없이 고조되는가, 더없이 전락하는가. ‘장편 소설’이라는 전통적 형식이 허락하는 여러 가능성 중에는 선조성을 포함한 소설 형식 자체의 해제까지도 포함된다는 듯, 그리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녹록지 않은 소설의 또 한 가지 목적이라는 듯, ‘끝’을 향하는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저자의 핵심 주제 내지 쟁점이라 할 요소들이(예컨대, ‘법’이란 무엇인가……) 난폭하고도 열렬한 방식으로 집적되며 끓어오르는 작품이라 하겠다. 독자에 따라 이 거대한 용광로에서 때로는 도스토옙스키를, 때로는 카프카나 에드거 앨런 포를, 카뮈나 지오노를, 아니면 희랍의 비극이나 독일 문․철학의 영향을, 요컨대 자신의 독서가 허락하는 만큼의 많은 비교항과 교차점들을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극히 높은 자』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헤겔 역사 철학의 짙은 그림자며, 성서의 알레고리들을 간과할 수 없다. 바타유, 클로소프스키, 레비나스, 푸코, 데리다 등 쟁쟁한 지성들이 그에 대해 크고 작은 숙찰의 결과물을 남긴 1948년의 문제작이다. 마침 『죽음의 선고』(그린비, 고재정 옮김)도 국역본으로 출간되어 있는 만큼, 굳이 이야기와 소설의 분류법에 매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비교해 가며 읽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독서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