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의 글쓰기

블랑쇼 선집 8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 | 2012-12-20 | 328쪽 | 20,000원


그린비에서 출간하는 『카오스의 글쓰기』(모리스 블랑쇼 선집 8)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는 책으로서, 블랑쇼의 후기 사유가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마치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듯 단상 형식으로 구성된 그의 글들은 그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은거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의 언어 역시 현실을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구성적 전망의 언어가 아니고, 현실의 맹점을 밝혀 보이는 명철하고 비판적인 언어도 아니며,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언어임을 보여 준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단상 형식을 통해 수동성, 죽음, 타자와 같은 기존의 사용했던 개념들을 적절하게 배치하며 사유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은 『카오스의 글쓰기』를 너무나 낯설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이 책은 그 많은 개념들이 한 권 안에 녹아들어 있음으로 인해, 블랑쇼 사유의 전체적 맥락을 한 번에 관통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한국에 블랑쇼를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해 왔던 블랑쇼 선집 간행위원 숭실대 박준상 교수가 직접 번역하여 처음으로 소개하는 책으로서, 블랑쇼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단어들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접근한 책이다. 특히 옮긴이는 블랑쇼만이 갖는 특유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마다 열정을 다해 번역하였다.


저·역자 소개 ▼

저자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문학비평·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동시에 그들과 적지 않은 점에서 여러 문제들을 공유하였다. 주요 저서로 『토마 알 수 없는 자』, 『죽음의 선고』, 『원하던 순간에』,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무한한 대화』, 『우정』, 『저 너머로의 발걸음』, 『카오스의 글쓰기』, 『나의 죽음의 순간』 등이 있다.

역자 
박준상
프랑스 파리 8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빈 중심: 예술과 타자에 대하여』, 『바깥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과 철학』이, 역서로는 『카오스의 글쓰기』, 『무위(無爲)의 공동체』, 『기다림 망각』, 『밝힐 수 없는 공동체/마주한 공동체』 가, 논문으로 「원음악(原音樂): 예술의 동근원」, 「몸의 음악: 예술에서의 모방과 반모방에 대한 물음」, 「불협화음」 등이 있다.
차례 ▼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 … 4

‘카오스’라는 번역어에 대하여 … 6

 

카오스의 글쓰기 … 22

 

옮긴이 해제: 한 어린아이 … 242

모리스 블랑쇼 연보 … 320

모리스 블랑쇼 저작목록 … 326

편집자 추천글 ▼

모리스 블랑쇼의 모든 개념이 담긴 단 한 권의 책!

‘카오스’로 바라보는 블랑쇼의 새로운 문학과 정치적인 것!

 

2003년 2월 24일, 한 장례식장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철학자가 떨리는 음성으로 추도사를 읽어 내려갔다.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부르는 이 순간 떨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추도문(「영원한 증인」)을 읽은 사람은 자크 데리다. 추도문의 주인공은 40년간 자크 데리다와 편지로 꾸준한 우정을 주고받은 작가, 모리스 블랑쇼였다. 글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외에는 전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철학자,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문학의 전성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글쓰기에 집요하게 천착했던 작가이자 철학자. 블랑쇼는 말라르메 시학의 영향을 받아 현대 문학과 철학의 흐름을 새롭고 비판적으로 이어가는 ‘바깥(Dehors)의 사유’를 전개시켰다. 특히 그의 유명한 문학 비평서인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선집 2)과 『도래할 책』(모리스 블랑쇼 선집 3)에서는 작가로서의 경험을 통해, 카프카, 횔덜린, 버지니아 울프 등, 작가와 작품들을 깊이 분석하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 주기도 했다.


이번에 그린비에서 출간하는 『카오스의 글쓰기』(모리스 블랑쇼 선집 8)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완역되는 책으로서, 블랑쇼의 후기 사유가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하루하루의 일기를 쓰듯 단상 형식으로 구성된 그의 글들은 그의 삶이 드러나지 않는 은거의 삶이었던 것처럼, 그의 언어 역시 현실을 설명하고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구성적 전망의 언어가 아니고, 현실의 맹점을 밝혀 보이는 명철하고 비판적인 언어도 아니며, 드러나지 않는 침묵의 언어임을 보여 준다. 독자들은 이제까지 출간된 블랑쇼의 책들 속에서 죽음, 작품, 타자, 저자, 수동성, 바깥과 같은 다양한 개념들을 만나 왔다. 하지만 이 책 『카오스의 글쓰기』는 너무나 낯설게 쓰였지만, 그 많은 개념들이 한 권 안에 녹아들어 있음으로 인해, 블랑쇼 사유의 전체적 맥락을 한 번에 관통할 수 있는 열쇠와 같은 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카오스의 글쓰기』는 한국에 블랑쇼를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다해 왔던 블랑쇼 선집 간행위원인 숭실대 박준상 교수가 직접 번역하여 처음으로 소개하는 책으로서, 블랑쇼가 사용하는 개념이나 단어들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접근한 책이다. 특히 옮긴이는 블랑쇼만이 갖는 특유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마다 열정을 다해 번역하였다.


블랑쇼에게 ‘카오스’는 인간이, 잉여나 바깥이 없는 존재 전체의 질서를 구성하거나 의식화․내면화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그러한 존재 전체의 중심에 놓여 있을 수 없다는 한계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것은 존재 전체성의 불가능성을, 즉 인간과 존재 사이의 궁극적 불일치 또는 부조화를,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코스모스적 질서’의 총체적 완성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또한 이 책에는 문학과 철학과의 만남 속에서 ‘침묵’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입장을 드러냈던 블랑쇼의 ‘정치적인 것’의 맥락 역시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침묵은 문학과 철학,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어 『카오스의 글쓰기』 안에서 공동의 목소리로 귀착된다고 말한다. 블랑쇼의 후기 사유가 선명하게 드러난 『무한한 대화』(2013년 출간)가 우리에게 도래하기 전까지, 『카오스의 글쓰기』는 별자리처럼 흩어진 블랑쇼의 문장들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발산하는 유일한 책이 될 것이다.

 

 

‘카오스’라는 개념어에 대하여

 

이 책의 원제는 L'Ecriture du désastre이다. 하지만 ‘désastre’를 왜 ‘카오스’로 번역한 것일까? 우선 옮긴이는 ‘désastre’를 말 그대로 ‘재난’이라 번역했을 때, 그 단어의 의미가 한국어가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서 어색하게 변해 버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이유이다. ‘désastre’는 단순히 재난이나 재앙이 아니다. 오히려 ‘désastre’는 어원학의 기원을 파고 들어감으로써 철학의 본질을 드러내고, 코스모스적 질서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하이데거적 철학에 반대하기 위하여 선택된 번역어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이 글 안에서 블랑쇼는 분명하게 ‘카오스’라는 개념어를 통해 하이데거가 말하는 어원학에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어원학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데서 그치진 않는다. 블랑쇼는 하이데거에 대한 그의 그러한 이의제기의 의도는 어원학의 한계와 남용을 지적하는 데에 있을 뿐이며, 결코 어원학 자체를 폐기시키자는 데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블랑쇼는 ‘désastre’라는 단어뿐만이 아니라 모든 단어를 ‘지워지게’ 만들고 파편화시키는 언어적 움직임에, 어원학적 정의(定意)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정의를 초과해서 작동하는, 보이지 않고 읽히지 않는 이미지적인 것의 움직임에 주목하지만, 그러한 움직임 자체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정의된 의미들과 전적으로 무관하게 이어질 수는 없다. 블랑쇼의 의도는 어원학 자체를 거부하고 나아가 부정하는 데에 있지 않으며, 다만 어원학이 과도하게 힘을 받는 데에 따라, 언어가 만들어 내는 그 역동적 움직임을 가로막고 정지시키게 되는 한계 지점을 가리키는 데에 있다. 물론 블랑쇼가 그 지점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은 ‘déastre’를 어원학의 관점에서 포착함으로써 스스로를 이 책에서 전개될 사유의 출발점에 갖다놓고 있다. 즉, 블랑쇼는 그의 사유의 출발점을 ‘카오스’에 두고 있는 것이다.


블랑쇼가 말하는 ‘카오스’는 말할 수 없는 곳, 침묵, 한계, 반反-코스모스, 불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카오스, 즉 ‘désastre’라는 표현은 천체의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공간, 즉 코스모스의 한계나 잉여로서의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블랑쇼는 이 ‘카오스’라는 표현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이 만들어 낸 홀로코스트의 폭력, 그리고 언어가 발설되고 유통되는 조건, 담론이 구성되고 해체되는 근거를 파헤치며, 그 조건과 근거, 즉 이성의 언어로 포섭되는 언어와 담론의 조건과 근거를 묻는다. 이 책은 일견 언어와 글쓰기에 대한 탐색으로 일관된 ‘순수문학’의 전형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그의 사유는 ‘카오스의 글쓰기’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향해 나아간다.

 

 

한 어린아이의 절규 : 정치적인 것의 예비 조건

 

『카오스의 글쓰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세 번에 걸쳐 등장하는, 세르주 르클레르의 책 『사람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한다』라는 텍스트의 주제인 ‘한 어린아이’이다. 블랑쇼는 『카오스의 글쓰기』 안에서 세르주 르클레르 책에서 등장하는 이 어린아이를 차용하여 이 한 어린아이가 완전히 죽을 수 없고, 완전히 죽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블랑쇼가 보기에 그 ‘한 어린아이’는 “타인들을 자신과 접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자신이 받아들인 질서에 따라 그는 자기로부터 돌아선 채로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212쪽). 한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과정은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 사회화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린아이를 살해해 나가고 동시에 의식화되거나 사회화되어 가며 그 순간부터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말하기 위해선 한 어린아이를 살해해야만 하고, 의식화나 사회화 과정이 끊임없이 일어나듯 한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과정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결국 살해는 되풀이되고, 그렇지만 살해의 불가능성은 필연성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어린아이는 한 번의 살해 행위를 통해 죽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무한한 초상(初喪)을 지내야만 한다. 이는 곧 언어와 담론이 무한하게 증식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동시에 말해 준다. 무한하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무한하게 언어와 담론을 유통시켜야만 하고, 완전한 법(철학적․인간학적․역사적 입법 등)을 정립시키려는 시도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 또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헤겔이 말하던 역사의 완성이 불가능하듯이, 모든 언어와 법, 담론을 완성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곧 언어의 무한한 구성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 있고, 또한 이 과정에서 한 어린아이는 죽은 채로, 이미 죽은 채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설사 언어와 법, 담론이 완성되는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이미 어린아이가 살해된 채 찢긴 존재로서 돌아올 수밖에 없고, 그 찢김을 언어와 법, 담론이 치료해 줄 수 없으며, 그 뚫린 틈과 구멍을 메워 줄 수 없다는 것을 블랑쇼는 『카오스의 글쓰기』를 통해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찢긴 존재인 한 어린아이, 무한히 초상을 치러야 할 어린아이가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열어 주는 예비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블랑쇼가 기존 사유에서 주장해 왔던 ‘공동의 영역’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을 사랑하거나,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인을 책임진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책임진다 하더라도 공동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으며, ‘나’는 언제나 (세르주 르클레르가 말하는 ‘한 어린아이’에서 알 수 있듯) 찢긴 존재로 예정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어쩌다 어떠한 총체적 언어를 방어 도구이자 무기로 사용하여 확고하게 존재를 결정 짓는다 할지라도, 블랑쇼에게 있어 이 관계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 말하자면 우리가 결코 하나로 수렴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야말로 ‘나’ 아닌 ‘우리’의 가능성의 선험 조건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스스로 타자화됨으로써만, 공동의 구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으로써만, 공동의 틈새가 됨으로써만 타인을 향해 돌아설 수 있다. 소통의 확고한 토대의 그 부재, 소통의 그 역동성, 소통의 그 무한성을 그는 이후 ‘밝힐 수 없는 공동체’(communauté inavouable)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했던 것이다.

 

 

문학과 정치적인 것이 만나는 자리 : 침묵

 

흔히 많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의 문제를 기관과 조직의 구성, 정치체계의 개혁, 권력과 반권력의 창출, 또한 정치를 행동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과연 블랑쇼의 ‘정치적인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블랑쇼는 그의 필수적인 탐구 대상인 문학과 ‘정치적인 것’이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카오스의 글쓰기』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문학과 현실 정치가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거나 영향을 주는 데 방점을 찍지 않는다. 물론 68혁명 당시 ‘학생-작가 위원회’나 알제리 문제에 관한 ‘121인 선언’, ‘베트남 민중 지지 위원회’에 대해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긴 했으나, 그에게 ‘정치적인 것’은 문학과 함께 전혀 다른 방향을 드러낸다. 문학과 정치적인 것을 생각할 때, 많은 독자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참여문학’을 쉽게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블랑쇼의 문학과 정치적인 것이 만나는 지점은 ‘참여문학’과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는 독자들에게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믿음으로 의도적·강압적으로 조직된 공동체에서 배제되어 온 ‘공동의 영역’을 글쓰기와 읽기를 통한 소통의 가능성과 함께 탐색했다.


찢긴 몸에 의해 추진되고 궁극적으로는 몸을 현시시키는 글쓰기는 침묵에, 언어에 의해 결코 오염되어 본 적이 없는 순백의 침묵이 아니라 언어가 파편화되면서 열리게 되는 지점인 묵언에 이른다. 그 침묵은 그 자체로는 정치의 영역에 속해 있지 않으며, 다만 관계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을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정확하고 급진적인 소통을 주재한다. 언어 이전의 과거로부터 전수되었고 언어 이후의 무한한 미래에까지 전달되어야 할 그 침묵이 바로, 언어가 아닌 공동의 언어이고, ‘우리’라는 공동의 표식, 우리 공동의 밑바닥의 표식이다. 그러한 한에서, 또한 이름 없는 자들이 거부․저항․이의제기․요청․혁명을 정당화하는 ‘말 없는 말’이라는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근현대의 수많은 철학들이 그 침묵을 듣지 못했던 것일까?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성급하게 돌아서서 그것을 언어 안에, 법 안에, 담론 안에 가두어 놓고 역사라는 이름으로, 이념이란 이름으로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공동의 언어인 침묵을 무화시키면서, 또한 언어 이후의 보편적 언어인 법을 초월하거나 그 토대라고 자임하면서 그 자체로서 공동체의 구성 원리로 격상되기를 원하는 이론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블랑쇼의 책 『카오스의 글쓰기』는 이에 대해 어떠한 명징한 대답도 내리지 않는다. 블랑쇼는 다만 끊임없이 그렇게 해왔듯, 우리에게 ‘공동의 침묵’을 말하며 ‘정치적인 것’의 문제를 제기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