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쇼 선집 7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영옥 옮김 | 2019-07-05 | 208쪽 | 23,000원
모리스 블랑쇼 선집 7권. 20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모리스 블랑쇼의 “최초의 진정한 단편적 글쓰기”인 이 책은, 블랑쇼의 또 다른 저작 『카오스의 글쓰기』(그린비, 2012)와 더불어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글이다. 블랑쇼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종류의 글쓰기를 한다. 하나는 문학적·철학적 글쓰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글쓰기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블랑쇼의 죽음을 넘어서는 시도를 본다. 데리다, 푸코, 들뢰즈,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모리스 블랑쇼의 실험적이고 새로운 글쓰기는 『저 너머로의 발걸음』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에 발표된 블랑쇼 단편적 글쓰기의 기원이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했다.
차례 ▼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 … 4
저 너머로의 발걸음 … 9
옮긴이 해제: 넘어감이 없이 넘어가는 발걸음 … 201
편집자 추천글 ▼
모두의, 모두를 위한 익명적 글쓰기
―블랑쇼의 진정한 ‘단편적 글쓰기’
“너무 긴 말에서 나를 해방하라”― 『저 너머로의 발걸음』은 이렇게 끝난다. 20세기 문학과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모리스 블랑쇼의 “최초의 진정한 단편적 글쓰기”인 이 책은, 블랑쇼의 또다른 저작 『카오스의 글쓰기』(그린비, 2012)와 더불어 더 이상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글이다. 소설도 아니고 문학 에세이 혹은 철학 에세이도 아닌 이 글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단편’과 ‘단편적인 것’
블랑쇼는 ‘단편’과 ‘단편적인 것’을 구분해서 쓰고 있다. 짧고 축약적인 단상 혹은 금언 같은 단장을 의미하는 ‘단편’과 달리 아예 완성, 전체성의 개념을 지워버린 것이 그가 말하는 ‘단편적인 것’이다.
어느 날 써진 이 말들로부터(이것들은 다른 말들이었고 동시에 다른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인데,) 또 글쓰기의 요구로부터 — 다만 네가 그 요구를 때로는 확신하고 때로는 의심하면서 책임졌다는 전제에서 — 어떤 결론을 끌어내려고 하지 마라. 그 말들에서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다만 무의미한, 그런데 (글쓰기의 요구 그 자체의 전제에 의해) 어느 정도 단일성에서 물러선 실존을 오만하게 다시 통합하는 데 사용될 뿐이다. 거기에 너의 희망이 있다고 할지라도 — 그것을 의심해야 한다 — 너의 실존을 통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지도, 또 실존을 분리하는 이 글쓰기를 통해 그 실존 안에 과거와의 어떤 일관성을 도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도 마라. (본문 12~13쪽)
모든 글쓰기는 틈, 단절을 함축한다. “이 불연속이 사물들 가장 깊은 곳에서 실재의 구조 그 자체를 의미한다면, 세계는 완성된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부서진, 조각난 것일 것이다.”(해제 중에서) 이때 글쓰기는 이런 조각난 실재, 불연속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하여 블랑쇼 가라사대 “모든 것은 지워져야 하고, 모든 것은 지워질 것이다”.
우정과 죽음, 두 가지 글쓰기
블랑쇼는 이 책에서 두 가지 종류의 글쓰기를 한다. 하나는 문학적·철학적 글쓰기(정체로 쓰임), 다른 하나는 우리가 ‘이야기’라고 부르는 글쓰기(볼드체로 쓰임)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블랑쇼의 죽음을 넘어서는 시도를 본다. 서로의 죽음에 노출되어 그 공포 속에서 사는 삶과 삶의 한계를 인지하며, 블랑쇼는 ‘우정’을 그 공포로 인해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대화에서의 언어가 주는 선물로 파악한다. 영원히 손을 내밀지만 항상 조금 늦는, 타인을 구하기엔 부족하나 이미 서로를 잃는다는 공포로 고통받는 우정.
“죽어가면서 너는 죽지 않는다”라는 진술이 가능해지는 것도 이 익명적인 우리(On/Nous)의 죽음 안에서다. 왜냐하면 죽는 것은 네가 아니고, 우리가, 익명적인 우리가, “너와 함께 너 없이” 죽기 때문이다. 이 익명적인, 공통의, 고독 속에서 블랑쇼는 파스칼에 반해 "우리는 홀로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옮긴이 해제」중에서)
블랑쇼가 말하는 ‘밝힐 수 없는 공통체’ 안에 통합되는 익명적 글쓰기로서의 단편적인 글쓰기, 『저 너머로의 발걸음』은 자신이 가진 거리/한계를 줄이고 넘으면서 새로운 거리와 한계를 여는, 그 자신이 도약의 내용이면서 형식이 된다.
블랑쇼 읽기의 정직한 순간
자크 데리다는 자신의 책 『해역』(Parages)에서 블랑쇼의 글을 두고 “미궁과 같은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미궁처럼 처신하고, 그 자체 미궁의 구조를 가진다”고 말했다. 문학적이면서 철학적인 에세이를 읽는 것 같다가 다시 알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지고 도무지 시작도 끝도 없는 듯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는다. 역자 박영옥은 그렇게 미궁을 헤매는 것이야말로 블랑쇼 읽기의 가장 정직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저 너머로의 발걸음』은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넘어가지만 넘어가지 못하는 발걸음이다. 가까이 오면서 멀어지고 쓰면서 동시에 지워진다. 도달함 없이 다만 무한히 다가가는 발걸음, 사이 속에 있는 글쓰기.
데리다를 비롯해 푸코, 들뢰즈,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모리스 블랑쇼의 실험적이고 새로운 기획에 속하는 진정한 단편적인 글쓰기는 『저 너머로의 발걸음』에서야 시작되었고, 1973년 블랑쇼 단편적 글쓰기의 기원이 이제야 우리에게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