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블랑쇼 선집 6

모리스 블랑쇼 지음, 류재화 옮김 | 2022-09-02 | 528쪽 | 32,000원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사르트르만큼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모리스 블랑쇼. 예술, 정치, 문학, 철학에 관한 그의 29개의 비평적 에세이와 평론을 모은 『우정』(1971)이 그린비 블랑쇼 선집 6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문학의 공간』(1955), 『도래할 책』(1959) 등 그간 블랑쇼가 해온 문학 비평의 연장선으로서, 라스코 동굴 벽화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원자 폭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를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 블랑쇼는 문학과 예술, 정치와 혁명 등에 대해 바타유, 말로, 레비스트로스, 뒤라스, 카뮈 등 그가 우정과 존경을 바치는 작가들을 들어 써 내려간다. 글로써 그가 이들과 나누는 무한한 대화는 때로는 파괴하며 융합하고, 분산하며 수렴하는 무신론적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한다. 독자들은 블랑쇼의 비평의 눈을 거쳐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사의 맥락을 한눈에 꿰어 볼 수 있다.


저·역자 소개 ▼

저자  모리스 블랑쇼 Maurice Blanchot
1907년 프랑스 켕 출생, 2003년 이블린에서 사망. 젊은 시절 몇 년간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것 이외에는 평생 모든 공식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글쓰기에 전념하였다. 작가이자 사상가로서 철학·문학비평·소설의 영역에서 방대한 양의 글을 남겼다. 문학의 영역에서는 말라르메를 전후로 하는 거의 모든 전위적 문학의 흐름에 대해 깊고 독창적인 성찰을 보여 주었고, 또한 후기에는 철학적 시론과 픽션의 경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스타일의 문학작품을 창조했다. 철학의 영역에서 그는 존재의 한계·부재에 대한 급진적 사유를 대변하고 있으며, 한 세대 이후의 여러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동시에 그들과 적지 않은 점에서 여러 문제들을 공유하였다. 주요 저서로 『토마 알 수 없는 자』, 『죽음의 선고』, 『원하던 순간에』, 『문학의 공간』, 『도래할 책』, 『무한한 대화』, 『우정』, 『저 너머로의 발걸음』, 『카오스의 글쓰기』, 『나의 죽음의 순간』 등이 있다.

역자 
류재화
고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소르본누벨대학에서 파스칼 키냐르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철학아카데미에서 프랑스 문학 및 역사와 문화, 번역의 이론과 실제 등을 강의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파스칼 키냐르의 『심연들』, 『세상의 모든 아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달의 이면』, 『오늘날의 토테미즘』,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강의』, 『보다 듣다 읽다』, 발자크의 『공무원 생리학』, 『기자 생리학』 등이 있다.
차례 ▼

『모리스 블랑쇼 선집』을 간행하며•4

 

1. 예술의 탄생•13

2. 박물관과 예술과 시간•34

3. 박물관의 고통•80

4. 백과사전의 시대•95

5. 번역하다•105

6. 위대한 축소주의자들•113

7. 영점(零點)에 선 인간•131

8. 느린 장례•148

9. 공산주의에 대한 접근(필요와 가치)•165

10. 마르크스의 세 가지 말•173

11. 기대를 저버린 종말론•178

12. 전쟁과 문학•191

13. 거부•193

14. 파괴하다•196

15. 헛된 말•203

16. 천사와의 싸움•225

17. 몽상하다, 쓰다•243

18. 수월한 죽음•257

19. 신들의 웃음•290

20. 위반에 관한 짧은 메모•314

21. 단순함을 향한 우회•324

22. 전락과 탈주•347

23. 동일화의 공포•358

24. 흔적들•375

25. 곡과 마곡•395

26. 카프카와 브로트•415

27. 마지막 말•435

28. 최후의 마지막 말•456

29. 우정•497

 

옮긴이의 말•505

편집자 추천글 ▼

우리의 거리가 오히려 우리를 가깝게 한다는 아이러니,

동일성에서 벗어난 글쓰기가 가져다주는

문학적 우정에 대하여

 

 

문학과 철학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어 사르트르만큼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 모리스 블랑쇼. 예술, 정치, 문학, 철학에 관한 그의 29개의 비평적 에세이와 평론을 모은 『우정』(1971)이 그린비 블랑쇼 선집 6권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문학의 공간』(1955), 『도래할 책』(1959) 등 그간 블랑쇼가 해온 문학 비평의 연장선으로서, 라스코 동굴 벽화의 수수께끼에서부터 원자 폭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사를 폭넓게 기록하고 있다. 블랑쇼는 문학과 예술, 정치와 혁명 등에 대해 바타유, 말로, 레비스트로스, 뒤라스, 카뮈 등 그가 우정과 존경을 바치는 작가들을 들어 써 내려간다. 글로써 그가 이들과 나누는 무한한 대화는 때로는 파괴하며 융합하고, 분산하며 수렴하는 무신론적 깨달음의 세계를 공유한다. 독자들은 블랑쇼의 비평의 눈을 거쳐 20세기 프랑스 현대문학사의 맥락을 한눈에 꿰어 볼 수 있다.

 

 

관계 맺지 않으며 관계하는

자유로운 우정의 가능성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의 ‘공모적 우정’이라는 말을 언급하며 『우정』을 시작한다. 이때 공모적 우정이란 ‘어떤 종속성도, 어떤 일화성도 없는 우정’을 가리킨다. 이것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지 않은 자, 절대적 타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채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오류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실망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정은 ‘절대적 가까움’을 뜻하지 않는다. 블랑쇼는 ‘어떤 절대적 거리’를 가지는 우정을 통해 기존의 통념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가 공모적 우정을 느끼는 동시대 작가들을 소환하여, 비평으로서 그들과 연대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표제작인 「우정」에서 블랑쇼는 바타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라는 이별이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살핀다. 죽음은 ‘추억’하고 대화를 이어 가기를 강요한다. 즉 죽음이 분리를 지워 버림으로써 둘 사이의 공허를 사라지게 하는데, 블랑쇼는 이를 경계한다. ‘분리’는 언제나 존재했던 것으로, 블랑쇼는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연결되어 있는 관계’, ‘말 없는 신중함’을 추구한다. 이는 소통을 관두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말의 침묵 속에서 서로가 연결되는’ 우정의 방법이다. 즉, 서로에게 현존이 되어 주는 것이다.

 

 

너 자신이 되지 말라,

인간이란 ‘끊임없이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기에

 

‘현존’은 블랑쇼의 화두로서, 실존은 언어와 에고가 있어야만 가능한 반면 현존에는 ‘무언어’와 ‘무아’(無我)가 필요하다. 그는 ‘에고’라는 허상에 현혹되지 말고 끝없이 분열하고 해체될 것을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에 동화되면 안심을 느낄 순 있으나 자기 한계에 매몰되고 만다. 블랑쇼에게 문학은 곧 ‘에고’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인간은 이러한 퇴행성을 극복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다. 익숙한 것이 부재한 중성적 텍스트들을 통해 에고의 올가미를 벗어야 한다.


루이르네 데 포레, 미셸 레리스, 장 폴랑 등은 문학에서 이 궁극의 무, 무심함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한 작가들이다. 앙드레 고르츠는 현대문학의 소임은 강력한 소속으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라며 개성성, 자기 중심주의, 소속주의, 애국주의, 한마디로 일체의 동일화를 공포로 여겼다. 블랑쇼는 문학이 하는 놀라운 일이 있다면 바로 이런 무심함에 대해 열정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 필수적인 언어를 우리는 결코 버릴 수 없겠으나, 20세기 현대 유럽의 작가들은 언어를 버리기 위해 오히려 언어를 껴안는 역설적 문학 행위를 수행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 현대문학이 자기 파괴적 면모를 보인 연유도 이것이다. 해방되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계를 넘는 위반의 힘으로 훨씬 많은 것이 고발된다. 왜냐하면 무한 자체가 무한에게는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무한은 중립적 표명을 통해 한계를 알림받게 된다. 여기서 중립적 표명이란 한계 내에서 말하면서도 한계 너머를 말하는 식으로 표명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중요한 문학은 우리에게 마지막 새벽처럼 나타난다. 재앙과도 같은 지난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면서도 항상 어떤 가변성은 띤다. 혹독한 무아(無我), 무장한 저 인내심 깊은 상상을 통해 이 도저한 거부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르네 샤르). _본문 중에서

 

 

무심함에 대한 열정,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하여 블랑쇼는 작가 카뮈가 이르려 했던 ‘무심함’, ‘무관심’이 ‘부조리’라는 무거운 이름으로 알려진 데에 대해 해명하려 한다. 사람들은 카뮈를 그가 주장하는 극단적인 생각에 가둬 두려 했으나 카뮈는 이것을 거부했으며 ‘부조리’라는 고정된 용어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블랑쇼는 카뮈가 ‘자기 생각을 직접 말하기보다 늘 우회를 통해 말한다. 그러다 보니 거부하고, 피하고, 바꾸기를 줄곧 하면서 우회를 통해서만 새로운 진실이 표명되도록 한다’고 밝혔다. 카뮈는 전복이라는 자유로운 흐름에 있으면서도 결코 그 무엇에도 장악되지 않았다. 블랑쇼는 카뮈의 이러한 ‘이상한 무관심’에 주목한다.


그는 또한 책의 후반부 상당 부분을 할애해, 카프카 문학의 순수성을 진단한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지 않고 전부 파괴하고자 함으로써 익명성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사후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그의 글들이 출판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명성을 얻었다. 블랑쇼는 이러한 남용을 절제된 언어로 비판한다. 카프카와 그의 편지,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 등에 대한 논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카프카에서 카프카로』에서 드러났던, 카프카를 통한 블랑쇼의 ‘문학’을 다시 한 번 엿본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는 이 시대에, 독자는 블랑쇼의 사유를 통해 작가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