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8
이진경 지음 | 2008-10-20 | 432쪽 | 20,000원
19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을 대표하는 저작이었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증보판. 초판 이후 20년간의 한국사회 변화를 보여 주는 새로운 글 4편을 더했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 주제로 삼았다.
사회를 구성되어 가는 것, 형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겠다는 관점을 표현한 '사회구성체론'은, 사회 전반에 발생하게 마련인 어떤 경향성을 통해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문제설정이다. 초판의 내용과 2008년판의 추가된 글들을 통해 지난 20년간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어디로 변화해 갈 것인지 엿볼 수 있다.
저·역자 소개 ▼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란 책을 내면서 사용했던 필명인 이진경이 뜻밖에 허명을 얻으면서 본명을 잃어버렸다. 전태일과 광주 시민들의 유령이 떠돌던 시절에 대학에 들어가, 그 유령들에 홀려 뜻하지 않게 강의실 아닌 거리에서 대학 시절을 보냈고, 대학을 마칠 무렵엔 혁명을 꿈꾸는 ‘지하생활자’가 되었다. 1990년, 감옥에서 겪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통해 희망이 절망의 다른 이름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 얻은 물음을 들고 여러 영역을 넘나들며 답을 찾고 있다.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시작으로, 자본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이중의 혁명을 꿈꾸며 쓴 책들이 《맑스주의와 근대성》,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철학의 모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 등이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새로운 혁명의 꿈속에서 마르크스,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사유하며 《노마디즘》,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을 썼다. 《코뮨주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정치》,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공편), 《삶을 위한 철학수업》, 《파격의 고전》 등을 쓰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바닥없는 심연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현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nomadist.org)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박태호라는 이름으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기초교육학부에서 강의하고 있다.
차례 ▼
초판 서문
1부 서론
2부 사회과학의 철학적 제 원칙 : 기본범주
3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1장_사회구성체론의 의미
2장_객관성과 사회구성체 : 사회구성체의 객관성
3장_총체성과 사회구성체 : 유기적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
4장_방법론의 중심범주로서의 특수성 : 사회구성체와 발전과정
특수성의 개념│특수성과 매개 : 발전과정과 사회구성체│사회구성체와 발전의 개념│자본주의의 발전법칙과 소위 자본주의적 ‘전일화’│발전법칙과 계급투쟁 : ‘두 가지 길’에 대한 논점│보론 : 박현채 선생의 사회구성체론 비판
4부 사회구성체론의 근본개념과 제 문제
1장_서설
2장_생산력 개념에 대하여 :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상호문제
3장_생산관계에 관한 몇 가지 문제 : 반봉건적 생산관계의 본질에 대하여
4장_토대와 상부구조의 문제 : 국가의 존재와 본질에 대하여
5부 결론에 대신하여
보론1_ 87년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
1장_기념의 역사, 질문의 역사
2장_혁명적 실천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3장_정치의 새로운 공간
4장_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익적 사유는 가능한가?
5장_문화주의의 시대?
6장_전선의 이동, 혹은 소수자의 정치학
7장_추기 : 두 전선의 사이에서
보론2_ 자본주의와 흐름의 경제
1장_사회적 기계와 사회구성체
2장_코드의 경제
3장_공간의 경제
4장_흐름의 경제
5장_자본주의의 외부
보론3_ ‘제국주의’와 ‘제국’ 사이
보론4_ 촛불시위와 대중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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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사회구성체논쟁을 대표하는 저작이었던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증보판. 초판 이후 20년간의 한국사회 변화를 보여 주는 새로운 글 4편이 더해졌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으로서의 '사회구성체론'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 주제로 삼았던 이 책은, " '사회구성체'에 대한 본격적인 이론을 전개한 최초의 국내 저술"로 평가받으며, 당시 대학가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사회를 구성되어 가는 것, 형성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으로 보겠다는 관점이 표현되어 있는 '사회구성체론'은, 사회 전반에 발생하게 마련인 어떤 경향성을 통해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문제설정이다. 초판의 내용과 2008년판의 추가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지난 20년간 한국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어디로 변화해 갈 것인지 엿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변화와 새로운 가능성의 지점을 제기한다!
“책은 저마다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다. 출판계에서는 내용의 충실함에 비해 독자들이 덜 찾게 되거나, 때가 잘 맞아 책이 잘 나가게 되거나 할 때처럼 출간한 책이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맞게 될 때 종종 입에 올리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책은 저자의 운명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이진경이 20대 중반에 내놓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하 사사방)이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자기 사유를 펼치기 위해서는 가명이 필요한 시대였기에, 어감이 좋은 걸로 하나 지어본 이름으로 출간한 그 책은 이후 그의 본명을 잊혀지게 만들며, 당대 논쟁의 한복판에 솟아올랐다.
1980년대 한국의 ‘사회구성체논쟁’(당시 논쟁에 대한 개괄은 이 책과 동시 출간된 <부커진 R> 2호의 「편집자 서문」 참조)에 ‘과학적 분석’의 방법으로 당시의 논쟁을 분석, 비판하고 과학적 사회분석의 입론을 세운 이 책은 한동안 사회 변혁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필독서로 꼽히며, ‘사사방’이라는 약칭으로, 저자가 겨우 24세의 대학원생이라는 사실과 함께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그렇게 이진경을 이진경이게 만든 그 책, <사사방>이 초판 출간 20년 만에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예전 모습 그대로 출간된 것은 아니다. <사사방>이 출간된 1987년 이후 20여 년이 흐른 시간 동안, 이진경의 사유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 주는 새로운 논문 2편(「87년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와 「자본주의와 흐름의 경제」)과 에세이 2편(「‘제국주의’와 ‘제국’ 사이」, 「촛불시위와 대중의 흐름」)이 추가되었다. 그린비판 <사사방>은 이 더해진 새로운 글들로 인해 단순한 ‘증보’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론가의 사유 궤적을 보여 줌과 동시에 우리 사회의 변화 그 자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지난 한국사회 20년에 대한 ‘기록’이자 ‘사회분석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왜 지금 ‘사사방’인가?
[<사사방> 초판의] 보편성에 대한 확신, 모든 이들과 싸우려는 듯이 신랄하게 날이 선 문체 모두에서 나 또한 불편한 위화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자신의 조건이 있었고, 자신의 시간 속에 있었던 것이다. …… ‘정통성’이 올바른 맑스주의의 척도가 되었던 시간, 죽은 자들의 유령이 산 자들과 함께 싸우고 산 자들에게 목숨을 걸 것을 유혹하던 시간, …… 그 모든 시간의 흔적이 지금 다시 읽는 그 책 속에 있었고…… 시대착오처럼 다가오는 위화감 속에서 그저 지나간 시간만을 보기보다는 ‘때 아닌 시간’을 보아 주길 부탁하고 싶었던 것이다.―이진경, 「증보판 서문」, 10쪽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사회성격에 대한 논쟁도 유야무야 사그라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이진경은 <사사방>보다는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기억되는 이름이 되었으며, 지금은 들뢰즈와 푸코, ‘노마디즘’ 같은 이름이 그에게 친숙하게 붙는다.
사회구성체론이라는 말도, <사사방>이라는 이름도 사라진 지금, 우리는 왜 다시 <사사방>을 출간하는가? 많은 이들이 우리가 이 책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물었던 질문이다. “왜 그 책을?” 이 질문 속에는 <사사방>이 ‘이미 낡은 것’ ‘(현실 분석에) 유효하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쉽게 과거의 것을 ‘낡았다’며 폐기한다. 아니, 사실은 ‘폐기’의 절차 같은 것도 없이 ‘마치 없었던 일인 듯’ 잊어버리고, 바쁘게 현실을 뒤쫓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그처럼 열심히 사회변혁을 위해 한 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했던 논쟁들이, 그 기록들이, 지금 현실적합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그들이 내걸었던 변혁의 모델이 사라졌다고 해서, 쉽게 용도폐기 되어도 좋은 것일까? 당대의 문제의식에,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고자 했던 저술들은 그렇다면 모두 사라져 마땅한 것일까?
그리고 미숙했다면 어디가 미숙했는지, 잘못되었다면 어떤 지점에서 그런지, 또 오늘날에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지, 따져 보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 과거가 현재의 우리와 동떨어져 저 너머의 세계에 있었던 시간이 아닌 한, 우리는 그 창을 통해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구성해 가는 데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 저술의 저자가, 여전히 ‘다른 사회’를 꿈꾸며 연구하고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자답해 보면서, 우리는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했던 기록 중 하나인 <사사방>을 다시 세상에 보내자고 생각했다. 20년 전의 그 책에는 당시 상황을 반영하는 ‘정통’ 맑스-레닌주의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지만, 지금의 이진경 사유의 기반이 그 책에 있음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던 논자들의 무수한 글들을 만나면서 역으로 당시의 한국사회가 얼마나 치열하게 ‘변혁’의 문제를 고민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기록에 이후의 변화를 보여 줄 수 있는 글들을 덧붙여서 낸다면, 이것은 한국사회 20년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사사방>, 그후 20년 오늘의 한국사회
박정희체제 이래 한국의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분할하고 결집시키던 적대의 구도는 이른바 ‘민주/반민주’의 대립이었다. …… 그러나 이런 대립구도는 87년 이후, 혹은 더 뒤로 잡아도 양 김씨의 집권 이후에는 유효성이 소실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정치적 대립을 전체화하는 전선의 양상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 새로운 대결의 지점은 …… 여러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른바 ‘양극화’와 결부되어 있다. -- 이진경, 「87년 이후 한국사회와 사상의 변화」, 366쪽 이하
현재의 이진경은 한국사회를 양분하는 주요모순을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으로 보고, 이전의 ‘민주/반민주’의 전선이 ‘다수자/소수자’ 전선으로 이동했다고 말한다(여기서 다수자와 소수자는 숫자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확보하고 있는 이권이나 이득의 많고 적음으로 나뉜다). 이전 ‘민주/반민주’의 전선에서 ‘민주’ 쪽에 있다고 하는 이른바 ‘민주인사’들이 다수자의 척도에 서서 행동하는 경우 그들은 다수자 쪽에 있는 것이고, ‘보수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집권 기간 내내 자신을 진보적이라 믿었던 노무현 정권은 새만금이나 천성산 문제처럼 자신이 공약으로 걸었던 것조차 뒤집었고, 아파트 원가 공개를 포기하고 부동산 가격을 급속하게 올려놓았으며, 미군기지 확장 및 이라크 파병을 비롯한 미군의 세계전략에 파트너가 되어 주었고, 모든 진보진영이 반대한 한미FTA마저 밀어붙였다.
자신이 ‘민주’ 쪽에 있으며 진보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수자 쪽에 서 있기에 보수적인 또 하나의 예로 대기업노동조합을 들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정규직 임금의 60.5%에 불과한 급여를 받으며 장시간 노동은 물론 불안정한 고용 상태를 감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배타적인 대기업노조의 모습은 이제 낯선 것이 아니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오랜 싸움으로 만들어진 민주노총은 지난 촛불정국 때 총파업을 하면서도 주요의제에 ‘비정규직’ 문제를 올리지 않았다.
이런 사회관계의 변화를 기존의 사회계급론이나 ‘민주/반민주’의 구도에서 벗어나 ‘다수자/소수자’ 모순으로 분석한 이진경은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시도한다.
과거 사회구성체논쟁에서 자본주의사회 형태에 대해 붙였던 이름들에는 ‘독점자본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주변부자본주의’ 등이 있었다. 이진경은 전지구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데 적절하다면 또 다른 종류의 구별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영토국가 시기(절대왕정 시기)에 성립되어 포디즘으로 완성된 자본주의를 ‘공간의 경제’로, 포디즘 이후 현재의 자본주의를 ‘흐름의 경제’로 이름붙인다.
공간의 경제란 “공간의 분절이 경제의 경계를 구성하고 경제적 영유의 전제조건이 되는 경제유형”으로, ‘국민경제’ ‘민족자본’이라는 관념의 탄생이 보여 주듯이 자본과 국가가 동일한 공간을 통해 결합해 작동하는 체제이다. ‘공장’이나 ‘국민’처럼 공간적 통제방식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자본과 대중의 흐름이 형성되는 공간의 경제에 반해 정보기술혁명을 바탕으로 한 ‘흐름의 경제’에서는 자본과 대중의 흐름이 국민적 영토에서 벗어나게 된다.
흐름의 경제에서 자본의 흐름은 본격적인 금융화를 따라 가속화되고, 노동력의 흐름 역시 공장의 경계를 벗어나 사회적 영역 전반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흐름의 경제가 모든 흐름을 개방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흘러가게 두는 것은 아니다. “자본이나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기술,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소위 ‘고급’노동력은 전지구적 중심거점들로 연결된 지대를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데 반해, 대부분의 노동력 …… 이주노동자의 경우 이동은 제한되고 선별된다. …… 이는 국민이라는 공간적 구획 안에서 노동력을 절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이동가능성과 국적의 차이를 초과착취를 위해 이용하려는 것이다.”(407쪽)
그러나 이렇게 노동력의 흐름이 분할되는 것과 반대로 대중의 흐름은 정보적 네트워크를 따라 강화되고 있다. 대중의 욕망이 다양한 가치를 가지고 여러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2002년 월드컵에 쏠린 대중이 몇 달 뒤에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 죽은 여중생들을 향해 옮겨 가기도 하고, 2008년 촛불시위처럼 중고생이 먼저 나선 문제에 다른 세대 사람들이 흐름으로 합류하기도 하는 양상을 말하며, 이런 현상에 대해 이진경은 원래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도 보수적이지도 않은 대중은 흐름을 형성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대중을 흐름으로서 사유하고, 대중의 활동이나 대중정치를 흐름을 형성하고 흐름의 양상에 개입하는 문제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사사방>증보판 출간으로 말하고 싶은 것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흐름의 경제’로 바뀐 만큼, <사사방> 초판을 썼을 때의 이진경과 지금의 이진경 사이에는 20년이라는 시간보다 더 많은 거리가 느껴진다. 그러나 만약 <사사방>부터 사회과학무크지였던 <현실과 과학>에 실린 논문들, 그리고 <맑스주의와 근대성>과 <철학의 외부>,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로 이어지는 그의 사유를 모두 따라가 본 사람이라면, 그가 사용하는 용어만큼 그가 선 자리가 달라지진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의 분석이 출발하는 지점은 언제나 지금-여기의 사회와 동시대인들의 삶이며, 그 분석이 지향하고 있는 곳은 더 나은 사회와 행복한 삶이다.
1980년대에 사회 성격을 실천적인 맥락에서 분석하고자 한 책은 당연히 <사사방>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무수한 책들이 있었기에 <사사방>이 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과학의 시대’라 불리던 1980년대의 그 풍부하고 치열한 논의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는 지난 20년의 변화를 말해 주는 어떤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가? 현재의 체제에 어떻게 안주해서 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사회를 바꾸어서 더불어 잘 살 수 있는가를 저마다의 입장과 사유 속에서 펼쳐 나갔던 그 텍스트들 말이다.
과거의 것을 모두 불러오자는 말이 아니다. 사회가 좀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길 원하며 저마다의 사유를 펼쳐갔던 그 영역이 지금은 왜 이렇게 작아져 버렸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미국의 경제상황이 나라 경제를 좌우하는 사회,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가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함에도 언제나 ‘예외’로 규정되는 사회, 20대에게 붙여 줄 이름이 ‘88만 원 세대’인 사회, 초등학생 때부터 영어에 몰입하는 이유가 취직을 잘하기 위해서인 사회. 이 사회에 대해 각각의 부문별 진단과 분석 만큼, 시평 형태의 에세이로 비판하는 일만큼, 사회 전체에 대한 이론적 분석과 그 분석에 실천방향을 포함한 그런 입론이 더욱 많아지길 바라는 것이다. 사회가 복잡해진 만큼, 그리고 살기가 어려워진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진 하나의 해답이 아니라 다양한 해답과 그만큼의 실천들을 통해 이 사회를 바꾸어 가는 움직임,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사방> 증보판이 그런 해답의 하나, 그런 움직임의 하나로 여겨지길 바란다.
로마의 한 문법학자가 했다는 “책은 저마다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말의 완전한 문장은 이것이다.
“독자의 역량에 따라 책들은 운명을 달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