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

철학의 정원 27

김도형 지음 | 2018-03-10 | 208쪽 | 18,000원


‘타자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 자신이 철학의 제1과제로 ‘존재’가 아닌 ‘윤리’를 꼽았던 만큼, 그를 독해하는 여러 방식 중에서도 윤리에 방점을 찍은 시각이 대세를 이루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또 온당하다. 이 책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는 이러한 기존의 논의에 발 딛고,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레비나스에게 정치란 있는가?”, “레비나스의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이 책은 레비나스의 ‘정치’ 사유를 주제적으로 탐구하려는 최초의 시도로서 ‘윤리’를 통해 정치의 공간과 개념을 새롭게 경계 짓고 또 넘어설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저·역자 소개 ▼

저자 김도형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부산대, 부경대, 인제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레비나스의 정의론 연구: 정의의 아포리, 코나투스를 넘어 타인의 선으로」, 「레비나스의 인권론 연구: 타인의 권리 그리고 타인의 인간주의에 관하여」, 「레비나스와 페미니즘 간의 대화(1): 레비나스에서 여성의 문제」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2013), 『전체성과 무한: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2018) 등의 공역서가 있다.

차례 ▼

1장 _ 들어가면서: 레비나스 철학에서의 정치

 

2장 _ 레비나스 정치 사유의 토대

타자와 타자의 얼굴 | 그 자신에 내맡겨진 정치 | 윤리와 정치

 

3장 _ 레비나스의 정의론: 어려운 정의

『전체성과 무한』의 정의관 |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의 정의관 | 정의의 아포리

 

4장 _ 레비나스의 인권론: 타인의 권리

근대 인권론 비판 | 타인의 권리로서의 인권 | 타인의 휴머니즘

 

5장 _ 레비나스와 정치

레비나스적 정치 | 레비나스적 평화 | 레비나스에 대한 문제제기

 

6장 _ 나가면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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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추천글 ▼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 정치를 갱신하라!

레비나스의 ‘윤리’ 속에서 길어낸 ‘정치적인 것’의 의미와 가능성

 

‘타자의 철학자’로 불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 그 자신이 철학의 제1과제로 ‘존재’가 아닌 ‘윤리’를 꼽았던 만큼, 그를 독해하는 여러 방식 중에서도 윤리에 방점을 찍은 시각이 대세를 이루는 것은 필연적이고도 또 온당하다. 『레비나스와 정치적인 것: 타자 윤리의 정치철학적 함의』는 이러한 기존의 논의에 발 딛고, 그로부터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레비나스에게 정치란 있는가?”, “레비나스의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이 책은 레비나스의 ‘정치’ 사유를 주제적으로 탐구하려는 최초의 시도다. 그린비출판사 레비나스 선집 중 『신, 죽음 그리고 시간』과 『전체성과 무한』의 번역자로 참여한 김도형은 이 책을 통해 레비나스에게 있어 ‘정치적인 것’의 자리를 모색한다. 그것은 레비나스의 정치 사유가 인간성의 회복과 공동체의 재건을 도모하려는 우리의 노력에, 낡은 의미의 정치가 붕괴되고 더 이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새로운 사유를 시작하려는 우리의 기획에 하나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사유 속에는 한편으론 국가, 법, 제도, 중립성 등으로 드러나는 정치와 그 정치적 실천이, 다른 한편으론 책임, 환대, 대신함으로 대변되는 혁명적 정치의 근원이 동시에 놓여 있다. 레비나스 정치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국가의 폭정이나 익명적 보편성에 맞서는 가운데, 타자의 유일성, 윤리의 우선성, 평화에 대한 새로운 발상으로부터 정치의 공간과 개념을 새롭게 경계 짓고 또 넘어설 수 있는 단초를, 또 그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을 위한 초석으로서 레비나스 사유의 독해와 그 실천적 적용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다.

 

 

윤리의 지평에서 정치를 재사유하다

 

리처드 로티는 레비나스의 철학이 민주주의적 현실 정치와 결코 화해할 수 없다고 단언한 바 있다. 무한과 외재성에 대한 그의 사유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다. 레비나스가 내세우는 타자에 대한 아나키적 책임, 그리고 윤리에 기초한 정치가 결코 현실 속에 온전히 자리 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로티의 주장은 일견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 철학의 중심에 윤리가 놓여 있고 윤리를 통해 정치의 정당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가 정치 내지 국가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레비나스가 문제 삼는 것은 자아의 중심성을 대체하고 나의 정체성을 의문시하는 윤리적 명령이 없다면, 정치는 일정 정도 확장되는 자기 이해의 계산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 정치철학의 독특성은 윤리의 지평에서 정치를 재(再)사유한다는 데에, 구체적으로는 타자에 대한 책임 속에서 종래의 정치적인 것을 재발견하려 한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에게 정치의 출발점은 타자에 대한 책임과 유관한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치란 단순히 윤리 외부에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책은 레비나스 정치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을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정의’와 ‘인권’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을 면밀히 고찰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레비나스적 정치, 소위 윤리적 정치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그려 본 후, 레비나스 철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그 의의를 몇몇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다.

 

 

형식상의 평등과 합법성을 넘어서

 

레비나스의 정의론은 그의 타자론에 기초해 있다. 타자성을 중심으로 하는 그의 패러다임은 고립된 주체 모델과 완전히 다르다. 자유주의가 상호성과 그 형식상의 평등성을 주장하는 데 반해, 레비나스는 비대칭성 및 나에 대한 타자의 우위를 이야기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책임으로서의 정의’라는 자신의 독특한 정의관을 표명한다. 레비나스가 정의를 타자와 맺는 대면적 관계로 등치시킴으로써 강조하는 것은 정의는 타자의 부름에 대한 직접적인 응답이라는 점, 다시 말해 타자의 호소와 나의 책임이라는 대화적 상황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주장의 초점은 개인을 원자적 실체로 놓는 자유주의의 관점을 윤리를 앞세운 관계론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데 있다.

자유주의적 정의 이론이 본연적인 나의 권리를 요구하고 그럼으로써 발생하는 다수의 ‘나들’의 권리를 공정하게 중재하는 데서 성립한다면, 레비나스의 정의 이론은 타인의 호소에서 정의의 근원적 의미를 발견한다. 레비나스의 강조점은 정의와 법적 시스템을 구분한다는 데, 정의는 형식적인 합법성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데 있다. 레비나스 정의론의 특색은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정의의 요구가 발생한다는 점, 나아가 정치의 보편성의 영역 밑에 타인에 대한 책임이 이미 성립해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는 데에 있다. 이럴 때 정의는 단순한 필요성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염려와 주의로서, 타인에 대한 행위로서만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타인이 처한 상황과 그의 처지가 내가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리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다면, 이 정의로부터 나는 결코 사면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부름에 응답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어느 누구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가 타인의 부름을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오히려 책임의 실재성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인권 ― 타자의 긴급하고 절박한 요구에 응답하기

 

레비나스는 근대 인권 담론이 가능케 했던 인간 해방과 인간 평등에 대한 요구를 존중하면서도, 현대의 관점에서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인간은 동등한 권리의 소유자라는 평등 의식의 내면에는 자신의 권리 추구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자기 자신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동일자의 제국주의’가 놓여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레비나스 인권론의 핵심은 그가 인권을 ‘타자의 권리’로 내세운다는 데 있다. 인권의 주체는 보편적 인간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 비교 불가능한 유일한 인간, 더 정확히는 요구하고 명령하는 타자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권리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근원적으로 타인 속에서만 다른 인간의 권리로서 의미를 갖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권이 그 중요성과 의미를 획득하는 ‘근원적 경험’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경험이란 곧 타자와의 대면, 그러니까 타자가 나에게 권리를 주장하고 나의 책임을 요구하는 상황에 대한 경험이다. 이런 방향성이 왜 권리의 담지자가 책임을 지는 자와 단순히 교환될 수 없는 것인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권리의 이 비대칭적 구조야말로 레비나스 인권 담론의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의 인권 담론은 권리 일반에서 타자의 권리로 강조점을 옮겨 놓음으로써 인권을 보호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혹은 그 근원에서 질문케 한다. 그래서 부각되는 것은 바로 타자의 요구가 갖는 긴급성과 절박성일 것이다. 구체적 만남 속에서 출현하는 구체적 타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은 법적 보편성의 영역에서 완전히 성취될 수 있는 것도, 정치적 현실을 고려한 후에 비로소 논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자의 헐벗음과 굶주림은 언제나 과도하며, 즉각적인 응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권이 매우 긴급하고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이다.

한편으로는 이주 노동자, 결혼 이민자, 탈북자, 난민으로 대표되는 우리 집단 외부의 타자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처럼 집단 내부에 있지만 감춰졌던 타자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타자들과의 관계 맺음에 있어, 이들의 자리를 찾아 줌에 있어 소위 ‘정치 공학’에 머물거나 ‘공정한 중재의 프레임’에 갇히기 일쑤인 ‘정치적 해결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윤리적 호소’에만 의존하는 것 못지않게 순진한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 윤리를 정교화하고 그것을 일상과 정치에 섬세하게 적용하여 정치의 공간을 새롭게 경계 짓는 일일 것이다. 레비나스의 철학이. 그리고 이 책이 그러한 작업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