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

철학의 정원 29

자크 데리다 지음, 심재원·신호재 옮김 | 2019-04-25 | 360쪽 | 25,000원


자크 데리다가 파리고등사범(ENS) 재학 시절인 1953~54년에 쓰인 학위논문으로, 20대에 쓴 최초의 저작이다.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를 통해 데리다는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후설 현상학의 광범한 저술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근원’(origine)과 ‘발생’(genèse)이라는 주제를 천착한다. 변증법에서 차연으로, 이후 전개된 그의 사색의 초기 형태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자크 데리다(1930~2004)는 가장 잘 알려진 20세기 철학자 중 하나로, 문학과 철학 텍스트뿐만 아니라 정치 제도를 비판하는 ‘해체’의 창시자였다. 프랑스 지성계의 그 이전 갖가지 철학적 운동 및 전통(현상학, 실존주의, 구조주의 등)과 거리를 유지하며, 그는 1960년대부터 ‘해체’를 전개시켰다. 해체는 특정 텍스트의 분석을 경유하여 보통 제시된다. 그것은 우리의 지배적 사고 방식, 현전/부재, 말하기/쓰기 등을 떠받치는 갖가지 이항대립을 폭로한 뒤 거역하려 한다. 그가 때때로 ‘해체’라는 낱말의 운명에 관해 회한을 표현하긴 했지만, 이 낱말의 인기는 철학, 문학 비평과 이론, 예술 그리고 특히 건축 이론에서의 그의 사고가 끼친 광범위한 영향을 지시한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대형 강의실을 채운 수백 명의 사람, 그에게 헌정된 영화와 TV 프로그램, 그의 사고에 헌정된 수다한 책과 논문들로, 진정 데리다의 명성은 미디어 수퍼스타의 지위에 거의 도달했다. 비판을 차치하고, 데리다의 해체는 자기-성찰을 가르는 차이를 재-고하는 시도에 그 본질이 있다. 그러나 차이의 재-고 훨씬 이상으로,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한 것은, 해체가 최악의 폭력을 방지하는 데로 작업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正義)를 실현하려 한다. 진정, 해체는 이러한 추구에서 쉼이 없는 것이다.

역자 
심재원
심재원(1967~)은 서울대 철학과를 학부 졸업하고, 파리8대학교에서 후설과 카바예스 대조 연구로 철학 석사를, 파리10대학교에서 푸코의 유명론적 인간학의 권력·자유론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데리다와 들뢰즈에도 관심을 두며, 틈틈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푸코에 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역서로는 『푸코, 비트겐슈타인』이 있다. 

역자 
신호재
신호재(1979~)는 서울대 역사교육과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2009년 서울대 철학과에서 「후설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에서 감각의 지향성」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2017년 같은 대학원에서 「후설의 현상학과 정신과학의 정초」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응용현상학연구소(ICAP)에서 철학과 인문·사회과학의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을 모색하면서, 현상학을 인간 삶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고 있다.
차례 ▼

간행에 부쳐

머리말·발생의 주제와 한 주제의 발생

서론

 

1부 _ 심리학적 발생의 딜레마: 심리주의와 논리주의

1장 _ 문제와의 만남

2장 _ 발생에의 첫 번째 의존: 지향적 심리주의

3장 _ 분리 : 발생의 포기와 논리주의적 시도

 

2부 _ 발생에 대한 ‘중립화’

1장 _ 노에마적 시간성과 발생적 시간성

2장 _ 근본적인 판단중지, 그리고 발생의 환원 불가능성

 

3부 _ 발생의 현상적 주제: 초월론적 발생과 ‘세속적’ 발생

1장 _ 판단의 탄생과 생성

2장 _ 자아의 발생적 구성과 새로운 형태의 초월론적 관념론으로의 이행

 

4부 _ 목적론: 역사의 의미와 의미의 역사

1장 _ 철학의 탄생과 위기

2장 _ 철학의 제일 임무: 발생의 재활성화

3장 _ 철학사와 초월론적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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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가 파리고등사범(ENS) 재학 시절인 1953~54년에 쓴 학위논문으로, 20대에 쓴 최초의 저작인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가 그린비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자크 데리다는 서양 형이상학에 ‘해체’를 시도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이른바 ‘해체(déconstruction)’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사상적 조류의 주도적 이념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바로 데리다 때문이다. 그는 ‘해체’를 통해 이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온 서양 철학사 전체, 특히 자기의식의 확실성에 입각하여 수립된 근-현대철학이 지닌 내적 균열과 부정합 또는 자기모순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것의 구조적 취약점을 공략함으로써 사유 체계의 건축물을 붕괴시키고 그 토대가 되는 형이상학적 선입견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낸다.

하지만 ‘해체’가 겨냥하는 목적은 맹목적인 파괴 자체에 있지 않다. 그것의 의의는 오히려 사유가 입각해 있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무엇이며, 또한 그것이 어떠한 ‘기원’에서 ‘발생’의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전개되어 왔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의 해체는 구조물을 붕괴시킨 후 폐허에서 다시 새로운 건축물을 수립하기 위한 목적, 명백히 건설적인 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전략적 방법인 셈이다. 데리다가 서양 형이상학 전통을 극복하고 전인미답의 신기원을 개척했다고 자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후설 현상학을 통해 바라보는 데리다 철학의 이론적 지평!

 

‘해체’ 개념의 직접적인 기원은 하이데거에게 있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 전체를 존재망각으로 점철된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형태의 존재론을 통해 철학의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해체 개념을 후설의 현상학에서 길어왔다. 실상 서양 근대철학사 전체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그것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형이상학적 선입견과 편견을 들추어내고 그것의 구조물을 허물어 감으로써 모든 학문의 토대가 되는 지반인 ‘세계’, 그리고 세계의 궁극적 토대로서 그것을 구성하는 ‘초월론적 주관’의 의식을 드러내 보인 선구자는 후설인 것이다.

요컨대 데리다 철학이 출현하기 위한 전사(前史)이자 이론적 지평인 후설 현상학에 의해서,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해체는 이미 그 태동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데리다는 후설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 기초하여 자신의 해체철학을 전개시키고 있으며, 이는 그가 학문적 수련의 시기에 후설의 현상학을 깊이 천착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데리다는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를 통해『산술철학』에서부터『논리연구』와『시간의식』, 그리고『이념들』에서부터『위기』에 이르는, 초기부터 후기까지 후설 현상학의 광범한 저술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근원(origine)’과 ‘발생(genèse)’이라는 주제를 천착하고 있다.

훗날 후설의『기하학의 기원』을 번역하며 붙인「서문」을 통해서도 표명될 주제이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후설이 현상학을 통해 서양 철학에서 이룩한 최고의 성취는 명료한 의식에 의해 포착되는 대상 배후에 그것에 대한 지각에 선행하는 암묵적이고 비주제적인 ‘지평’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지평은 완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지평을 전제한다. 즉 무수히 많은 지평들은 서로 지향적 함축의 발생적 관계를 맺고 있는데,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후행하는 것이 출현하기 위한 발생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이미 지나간 것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동하는 현재에 부단히 자양분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근원’은 곧 ‘기원’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 흐름의 종합 속에서 과거는 언제나 현재에 자신의 ‘흔적(trace)’을 남긴다.

 

 

‘현전’과 ‘흔적’의 갈등

또는 궁극적 ‘근원’과 발생적 ‘기원’ 사이의 대립

 

그런데 데리다는 후설이 이 ‘흔적’의 문제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이라는 학문적 기획 속에서 이 문제를 정당하게 다룰 수 없었다고 그 한계를 비판한다. 데리다가 비판하는 후설 현상학의 한계란 바로 ‘지금-여기’에서 ‘생생하게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현전(presence)’의 이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후설이 현상학의 주춧돌로 삼는 현전의 이념은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에까지 소급하는 것으로, 결국 서양 철학의 형이상학 전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한계를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후설은 현전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 지평의 현상, 즉 시간적 흐름을 전제하는 ‘발생’의 문제를 보았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현전의 형이상학’이라는 선입견과 편견에 사로잡혀 그것이 지닌 의미와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데리다가 후설 현상학에 가하는 이러한 비판은 후설의 저술을 철저히 검토한 후 그것을 해체함으로써 획득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후설의 초기 저술인『산술철학』부터 후기 저술인『위기』에 이르는 전범위에 걸쳐, ‘현전’과 ‘흔적’의 갈등 또는 궁극적 ‘근원’과 발생적 ‘기원’ 사이의 대립이 후설 현상학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후설 현상학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후설 외재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후설 내재적인 관점에서 수행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 전략에 따라, 후설 현상학이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적 균열과 부정합에 의해 스스로 자신의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후설의 현상학을 ‘해체’하기를 시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후설 현상학에 대한 비난으로 읽혀서는 곤란하다. 차라리 데리다의 ‘해체’는 후설 현상학에 대한 경외 내지 ‘오마주’로 읽어야만 마땅하다. 왜냐하면 해체는 사유의 구조체계에 대한 철저한 독해와 면밀한 고찰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해체’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Kritik)’과 다른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데리다에 의한 후설 현상학의 극복을 위해서든, 그 이전에 후설 현상학 자체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위해서든『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를 읽어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