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리좀 총서 I 4

  • 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 | 2008-08-05 | 304쪽 | 18,900원


국내 연구자들이 들뢰즈의 사상을 철학사적 접속 지점과 각 분야별로 나눠, 그의 방대한 철학작업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연구서이다.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을 자신의 개념으로 계승한 들뢰즈의 사상을 재해석하고, 철학과 예술 등 각각의 영역에 불러일으킨 들뢰즈 사유의 양상을 구현하고 있다. 국내 들뢰즈 연구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동시에 '들뢰즈 이후' 다양하게 펼쳐질 사유의 길을 보여준다.  


저·역자 소개 ▼

저자 클레어 콜브룩 Claire Colebrook 
2008년 현재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영문학 교수로 있다. 유럽 철학, 페미니즘 이론, 문학 이론과 낭만주의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며, 들뢰즈의 철학을 쉽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책들로 유명하다. <윤리학과 재현> Ethics and Representation(1999), <질 들뢰즈> Gilles Deleuze(2002), <젠더> Gender(2003), <철학과 후기 구조주의 이론: 칸트에서 들뢰즈까지> Philosophy and Post-Structuralist Theory: From Kant to Deleuze(2005), <들뢰즈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 Deleuze: A Guide for the Perplexed(2006) 등을 썼고, <들뢰즈와 페미니즘 이론> Deleuze and Feminist Theory(1999)을 이언 부캐넌과 함께 펴냈다. 

역자 정유경
성신여자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문명이 낳은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2』(2015, 공저), 역서로 질 들뢰즈의 『경험주의와 주체성』(2012, 공역), 외젠 비올레르뒤크의 『건축강의』(2015), 브라이언 마수미의 『가상과 사건』(2016), 윌리엄 제임스의 『근본적 경험론에 관한 시론』(2018), 알로이스 리글의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2020) 등이 있다.

차례 ▼

서론_ 이미지와 테크놀로지

1_ 시네마, 사유, 시간
들뢰즈의 <시네마>
테크놀로지
본질들
공간과 시간
베르그손, 시간, 생명

2_ 운동-이미지
시간과 공간의 역사와 영화의 역사
운동-이미지와 기호학
기호의 스타일들
운동 전체
이미지와 생명
탈인간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운동-이미지의 연역

3_ 예술과 시간
감각-운동 장치의 파괴와 영적 자동인형
시간과 화폐

4_ 예술과 역사
기념비
프레임화, 영토화, 구성면

5_ 정치학과 의미의 기원
생명을 초월하기와 의미의 발생
상징계와 상상계를 넘어
배설물과 화폐
교환, 선물, 절취
정신의 허구
집단적 투여와 무리 환상
‘인간’의 시간
강도 높은 배아적 유입

결론_ 생명과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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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계과 관계 짓는 것으로 ‘생명’을 설명하는가 하면, 눈, 카메라 등의 기계론을 통해 테크놀로지의 개념을 재정의한다. 들뢰즈의 예술철학을 설명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예술로부터 철학함(사유함)이 무엇인지 근본적으로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역사와 의미의 기원을 파헤쳐 들뢰즈 철학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드러낸다. 철학.정신분석학.기호학.정치학.윤리학을 넘나드는 들뢰즈 사상의 계보가 꼼꼼히 묘사되는 가운데 들뢰즈 철학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더욱 명료해진다.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
- 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1990년대 초,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영화의 철학자”라는 이름표를 단 채 우리에게 모습을 나타냈다. 그의 저서는커녕 해설서 한 권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가 <시네마> 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들뢰즈를 “영화를 어찌나 좋아했는지, 심지어 영화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은 철학자” 정도로나 생각해 버린 때였다(이때는 한국의 영화 담론이 대중 영화와 예술 영화를 굳이 구분해서, 영화가 예술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수준에 머문 시절이기도 했다). 들뢰즈의 저서가 대부분 한국어로 옮겨진 지금 이런 오해를 할 사람은 없겠지만, 여전히 ‘영화’라는 테크놀로지가 들뢰즈 철학의 부분이 아니라 심장부를 작동하는 개념임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들뢰즈가 영화광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평생의 동지 펠릭스 가타리(Felix Guattari)와 함께 소설가인 카프카, 화가인 프랜시스 베이컨, 시인이자 판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 등 모더니즘 예술에 관해 본격적인 저서를 여럿 썼다. 들뢰즈(혹은 들뢰즈.가타리)의 예술철학은 ‘생명’, ‘테크놀로지’, ‘차이화하는 역능’, ‘기계’ 등 그의 ‘생명의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한편, 예술과 철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들뢰즈 이해하기> (리좀 총서 02)를 내놓은 클레어 콜브룩.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의 영문학과 교수이자 저명한 페미니즘 이론가인 그는 영미권에서 쉽고 명확한 들뢰즈 해석가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들뢰즈 이해하기> 에서 차이생성의 역능과 ‘생명’ 개념으로 들뢰즈의 ‘생명의 철학’을 개괄한 그가 이번에는 좀더 주제를 좁혀 문학과 영화를 포함하는 예술의 관점에서 들뢰즈의 철학 세계를 조망한 독특한 입문서를 내놓았다. 리좀 총서의 네번째 책인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은 이미지와 생명이라는 주제로 들뢰즈의 베르그손 해석을 소개하면서 <시네마> 를 재해석한다. 철학.정신분석학.기호학.정치학.윤리학을 넘나드는 들뢰즈 사상의 계보가 꼼꼼히 묘사되는 가운데 들뢰즈 철학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더욱 명료해진다.


‘이미지’ 개념으로 생명의 역능을 드러내다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는 들뢰즈의 텍스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와 두 권의 <시네마> 이다. 1장 ‘시네마, 사유, 시간’에서 저자 콜브룩은 들뢰즈가 어떻게 ‘개념’이라는 개념을 재창조했는지 설명한다. 들뢰즈에게 개념은 일반화의 수단이 아니다. 개념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대상들 사이의 접속들로서 창조된다. 즉 사유라는 능동적 행위의 효과인 셈이다. 이런 ‘개념’ 위에서 들뢰즈는 여러 굳어진 철학 개념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리는 용어들을 그가 어떻게 다르게, 혹은 새롭게 구사하는지 주목하는 일이야말로 들뢰즈를 읽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1장에서 콜브룩은 우선 들뢰즈가 베르그손을 계승해 ‘이미지’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리했는지 설명한다. 예컨대 뇌, 신체 기관들, 외부의 자극 사이의 접속이 없다면 정신이나 의식은 있을 수 없다. 인간 유기체 그리고 세계가 맺는 모든 관계를 형성하는 신체 부분들 사이의 이러한 접속들이 지각작용들 혹은 이미지들인 것이다. 이전의 철학에서는 정신이나 생명이 먼저 존재하고 비로소(그 후) 지각작용이 일어나 이미지가 형성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미지와 생명의 관계를 전복한다. 생명은, 바로 어떤 것이 그것의 반응들로 ‘있기’ 때문에 이미지화이고, ‘지각작용’의 형식을 취하는 관계들의 면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생성의 흐름 속에서 지각작용을 통해 차이를 획득하고, 일정한 지속을 가진 존재로 형성된다는 이런 구도는 이미지화하는 생명의 역능을 잘 보여 준다.
이럴 때 ‘테크놀로지’의 개념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테크놀로지는 ‘생명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반복 가능하거나 일정한 실천’으로서 정의된다. 때로는 에너지를 행사하고, 때로는 절약하거나 비-소비하고, 때로는 극대화하는 생명 자체가 하나의 테크놀로지라고 할 수 있다. 습관의 형성을 통해 극단적으로 고착화된 생명 활동의 정체로 나아갈 수도, 반대로 그 변화율을 가속할 수도 있는 테크놀로지의 포텐셜은 유기체에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유기체인 인간 신체의 눈이나 카메라의 눈처럼 유사한 기능을 보이는 무생물의 ‘기계’에서도 이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영화’에 관한 논의로 넘어간다.


영화의 운동-이미지를 명쾌하게 해설하다


2장에서는 <시네마 1> 을 중심으로 운동-이미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근대 이전의 운동은 ‘가지적 종합’으로서 특권적 성격을 지녔다면, 근대 과학의 출현 이후 운동은 ‘감각 가능한 분석’으로서 ‘여하한-모든-순간’을 지시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역사적으로 출현한 백인 남성‘임’을 강조하는 man)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게 해주는 테크놀로지로서 영화는 우리에게 운동-이미지를, 나아가 시간-이미지를 보여 준다. 물론 이때의 운동-이미지는 어떤 주체의 운동, 예컨대 여인이 계단을 내려오거나 경주마가 달리는 것과 같이 단일한 운동의 연쇄가 만들어 내는 움직임의 환상과는 성격이 다르다. “들뢰즈가 고전 영화의 운동-이미지에서 포착한 것은 ‘여하한-모든-순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개념화이다. 여하한-모든-순간의 근대적 공간에는 두 가지 경향들이 있다. 첫번째는 특권화된 시점에 종속된 시간과 공간으로, 이럴 때 운동은 언제나 고정된 틀 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의 운동이다. 영화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 복수의 사건들을 복잡하게 접속시킴으로써 각각의 단편들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그 의미를 변화시켜 나가도록 한다.”(73쪽)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본 운동-이미지, 즉 “‘여하한-모든-순간’에 대한 근대 공간의 둘째 포텐셜은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행위의 중심 또는 운동이 조망되는 지점이 더 이상 인간적이고 실용적으로 추동된 주체가 아니라 카메라의 눈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소비에트 영화는 몽타주를 이용해 혹독한 눈보라 같은 자연의 움직임을 새로운 공장 기계의 발명 같은 기술적 변환이나 기아나 불황과 같은 사회적 운동들과 접속한다. 그럴 때 영화는 시간의 산물이 단순히 영화 속에 배치된 사물들의 행위나 운동의 산물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이것이 들뢰즈가 운동-이미지에서 포착한 급진화다.”(76~77쪽) 운동-이미지는 움직이는 단편들을 접속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시간을 드러내면서, 시간이 공간 속에서 상호 교차하는 다양한 공간들로 구성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운동-이미지는 지각작용의 차이를 생성하는 영화의 역능을 드러낸다.


차이를 생산하는 영화의 역능을 밝히다


들뢰즈에게 영화의 본질은 일반적으로 혹은 통상적으로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본질은 영화가 무엇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영화의 역능 혹은 포텐셜이다. 우리는 영화에서 독특한(singular) 것을 취할 수 있다. 모든 영화가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 영화가 새로운 형식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영화의 본질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카메라가 매번 작동할 때마다 그것이 접속하는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들을 변화시킨다면?카메라가 스스로를 영화적으로 변이한다면?영화는 그 본질을 성취하는 것이고, 그 고유한 차이의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들뢰즈가 <시네마> 에서 한 일이 바로 이 작업이다. 즉 그는 상이한 스타일들이 생산되는 방식들을 영화의 이미지들, 숏shot들, 프레임들이 접속되는 방식들에 따라 살펴본다. 본질이란 오로지 상이한 접속들을 생산하는 역능이다. 그렇다면 그 접속들의 포텐셜은 접속이 존재한 후에 비로소 덧붙여진 어떤 능력이 아니라 그 접속 자체의 할-수-있음, 무엇일-수-있음을 이른다. 즉 영화는 그 혁명적인 포텐셜, 지각작용들이 그 이미지들을 정렬하는 방식들을 변형하는 포텐셜 때문에 비로소 영화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유함은 그것이 창조적일 때, 그것이 이미 형성되고 인식된 것을 반복하지 않을 때 비로소 사유함이 될 수 있다. 차이에 대한 이러한 포텐셜을 극대화하여 현실화하지 않을 때조차?예컨대 원작의 형식에 변화를 주기를 거부하는 진부한 할리우드 리메이크 영화를 볼 때조차?영화의 급진적인 포텐셜은 부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려져 있을 뿐이다. 어떠한 반복이든, 그것이 그 자신이 아닌 어떤 것의 반복이므로, 차이의 생산이다.


예술, 탈인간의 가능성을 열다


책의 4장과 5장은 문학과 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론과 <안티 오이디푸스> 를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비판으로 전개된다. 들뢰즈는 사유, 즉 철학함과 예술의 의의를 논하면서 특히 예술 작품이 가지는 기념비성(monumentality)에 주목한다. 그에게 기념비란 ‘하나의 감각 존재’로서 ‘홀로 서 있는’(<철학이란 무엇인가?> ) 것이다. 즉 ‘과거를 함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스스로 존속하는’, ‘현재의 감각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적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념비라는 것은 숙명적으로 우리의 현재를 반추하는, 따라서 늘 동시대적인 이미지이며 시간 속에 열려 있다. 예술의 기법이 다양할수록, 역사는 실재에 대해 ‘인간’이 거둘 것으로 가정된 진보적 승리로부터 해방된다.
바로 여기에서 예술의 역능을 찾을 수 있다. 예술은 우리에게 일탈을, 주체로부터 분리되고 일반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감각작용의 가치를 알게 해줌으로써 탈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영화라는 테크놀로지는 인간-주체라는 중심을 벗어난 카메라/기계의 눈을 통해 탈인간, 즉 인간임을 벗어나는 경험을 제공한다. 모더니즘 예술에 관한 들뢰즈의 관심은 그것이 제공하는 탈각적 경험에 기인한다. T. 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도시 통근자들을 망자들로 그려내고,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더블린 시내를 시신 행렬이 통과하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죽은 자들과 접속시켜, 탈인간의 경험을 제공한다.
그러나 내재성의 철학자로서 들뢰즈는 우리가 자본주의라는 우리 세계의 형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가 생명의 특정한 경향들, 즉 스스로를 원래 형성된 관계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경향(탈영토화)과 그에 나란히 존재하는 관계들의 새로운 체계를 재-형성하려는 경향(재영토화)의 역사에서의 통접이라고 주장한다. 자본과 그 흐름은 하나의 고정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무한한 탈영토화의 욕망으로서 우리들 개개인의 욕망을 그 단편으로 품은 채 빠른 속도로 변이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는 고대 이래로 인간을 하나의 단위로, 화폐라는 교환가치의 단위를 소비하는 단위 주체로 규격화해 온 이 시스템으로부터 ‘탈주’하는 방법은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범주로부터 벗어나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더 강도 높은 생명의 차원으로 넘어갈 때만이 새로운 철학과 예술의 실천(차이의 창조)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지속과 역능을 강화하게 될 그 실천은 어떠한 (스타일의) 것인가. 바로 그것이 들뢰즈 철학의 ‘진정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