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지·전장 종교와 종교 사이
사이 시리즈 10
차옥숭 지음 | 2014-08-31 | 224쪽 | 9,800원
예루살렘은 3대 유일신교(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모태가 된 성지(聖地)이지만, 그 성지를 둘러싼 기나긴 갈등은 이 땅을 전장(戰場)으로 만들었다. 이 책 『예루살렘 성지·전장』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갈등을 중심에 놓고, 그 역사적 원인을 3대 종교의 탄생에서부터 살피고, 또 갈등의 진정한 해법은 어디에 있을지를 성찰한다.
3대 종교는 동일한 하느님을 섬기면서도 서로 반목해 왔고, 그 결과는 반유대주의를 거쳐 현재의 팔레스타인 억압의 상황에까지 이른다. 저자는 예루살렘의 역사, 세 종교의 전승과 교리상의 공통점 및 차이점 등을 고찰하면서 상호 소통의 가능성을 살피고, 그 위에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설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저자가 직접 현장을 다니며 만났던, 상호 존중의 희망을 갖고서 연대 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차옥숭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종교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장신대학교 교수와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인의 종교 경험 : 巫敎』, 『한국인의 종교 경험 : 천도교 대종교』 등이 있고, 공저서로는 『한국인의 생명 사상의 뿌리』, 『동아시아의 여신 신화와 여성 정체성』 등이 있다. 편저서로 『기독교사 자료집』 I~IV, 역서로 『오늘의 신학 무엇인가』(위르겐 몰트만)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전쟁 폭력 여성 :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전쟁의 국가 폭력에 대한 분석」, 「동서 교섭의 관점에서 본 몸과 마음 이해 : 동학과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 : 멕페이그와 해월 사상을 중심으로」 등 다수가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에서 종교학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일장신대학교 교수와 이화여자대학교 HK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한국인의 종교 경험 : 巫敎』, 『한국인의 종교 경험 : 천도교 대종교』 등이 있고, 공저서로는 『한국인의 생명 사상의 뿌리』, 『동아시아의 여신 신화와 여성 정체성』 등이 있다. 편저서로 『기독교사 자료집』 I~IV, 역서로 『오늘의 신학 무엇인가』(위르겐 몰트만)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 「전쟁 폭력 여성 :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전쟁의 국가 폭력에 대한 분석」, 「동서 교섭의 관점에서 본 몸과 마음 이해 : 동학과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소통 불가능성의 가능성 : 멕페이그와 해월 사상을 중심으로」 등 다수가 있다.
차례 ▼
서문
1장 _ 예루살렘의 종교적 의미
2장 _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경계 가로지르기
3장 _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4장 _ 종교와 종교 사이 넘어 하나의 희망: 여성들의 평화를 위한 연대
나가는 말 _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체: 평화의 마을 ? 네베 샬롬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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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추천글 ▼
예루살렘은 어떻게 끝나지 않는 전쟁의 땅이 되었나?
오늘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3대 유일신교의 역사를 되짚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태가, 어느 한 민족에게는 ‘독립’이었고 다른 한 민족에게는 ‘대재앙’이었다. 1948년의 이른바 1차 중동 전쟁이 그것이다. 유대 민족에게 이 전쟁은 1800년에 걸친 ‘이스라엘 국가의 수복’이라는 염원을 달성한 사건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가혹한 억압과 절망적인 항쟁의 서막이었다. 바로 얼마 전인 2014년 7월 8일부터 8월 26일까지 이어졌던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이 그 일단을 보여 준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난 세기에 유례없는 인종 절멸 프로젝트의 피해자였던 유대 민족이 또 다른 인종 절멸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참상의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묻는 난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어디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고, 또 정확히 무엇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공존의 길은 없는 것일까? 종교학자로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교 사이의 핵심적 갈등과 그 원인을 연구해 온 저자 차옥숭은 이 책 『예루살렘 성지·전장』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모색을 담았다.
예루살렘, 평화가 떠나간 평화의 도시
종교 경험의 중요성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실재와 소통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로 충만한 삶의 양태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성화(聖化)된 삶에의 희구는 실재하는 통로로서 성스러운 장소, 즉 성지를 요청한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민족 문제인 동시에 종교 문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교의 모태가 된 도시이고, 따라서 공통의 성지이기 때문이다(예루살렘 구시가지 안에서 맞닿아 있는 ‘통곡의 벽’과 ‘바위 돔 사원’, ‘알 악사 사원’은 성지를 공유한다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23쪽 이하 참조). 독자들은 이 책을 따라 3대 종교에 있어 예루살렘이 각각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상호간에 갈등과 교섭을 되풀이해 왔는지를 살핌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그 본질에서부터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한 모태에서 태어난 세 종교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에 의해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예루살렘은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약 30세기 동안 정복과 파괴, 그리고 재건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것도 모두 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말이다(27쪽). 하지만 이때 3대 유일신교 각각에 의해 운위된 ‘신’은 결코 서로 다른 신이 아니다. 세 종교가 공유하는 전승들을 살펴보면 이 점이 명백해진다. 단적으로 세 종교 중 어느 쪽도 자신들이 아브라함, 모세, 야곱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병존하기 어려운 전승과 교리의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서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 중 한 명으로 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원죄의 개념과 대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예언의 완성자라고 말하는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공히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은 세 종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반영해 변천해 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대교의 배타적 선민주의는 오랜 침탈과 망국의 고통 속에서 단단해진 것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행했던 유대교 억압이 연루된다. 이슬람교가 스스로를 구약(모세오경)과 신약을 완성하는 종교로 제시함으로써 다른 두 종교에 대한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절대 신념 체계로서 절대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당연한 노력이다. 이 책은 이런 비교종교사적 접근을 통해 각 종교의 배타성을 상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유동성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 종교적 삶 속에서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 종교가 항상 극단적 반목만을 거듭해 온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정한 타협과 상대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예도 있다(대표적으로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살라딘 통치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가 믿는 종교는 절대적인 신념 체계로서 그의 전인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 신봉자는 그 종교에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부여하”는 이상, 종교 간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는 어렵다(114쪽).
이로부터 저자는 각 종교 전통의 ‘안에서’ 소통과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다. 예컨대 랍비 조너선 삭스는 유일신 신앙이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 한 종교, 한 문화, 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고(116쪽), 신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신학’과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종교’라는 틀을 제시했다(127쪽). 또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시인 젤라루딘 루미는 “길은 여럿이지만 목적은 하나”라고 노래하기도 했다(136쪽). 이런 유연하고 통합적인 입장들을 통해 다종교적 상황에서의 소통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꾸어 나감으로써만,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로서의 의미를 되찾고 진정한 성지로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와 그 너머의 희망
1, 2장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세 종교의 역사를 조망하고 종교 간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 후, 책은 3장부터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로 초점을 맞춘다(이 책은 가자 지구 침공 이전인 2013년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출구가 안 보이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평화의 희망을 간직하고서 연대와 공존의 실험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인들의 파괴된 삶
근대 이후 유대 민족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은 나치즘으로 귀결되는 데 이르는 반유대주의의 발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기치로 내건 시온주의가 탄생했다. 예루살렘은 “1800년이 넘는 해외 이산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이 되었”고(17쪽), 따라서 어떠한 추가적 정당화도 필요 없는 본원적 고향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는 “이스라엘 땅을 식민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시온주의 강령을 선포”하고 “식민화를 목표로 한 이민”을 시작했다(141쪽). 이 시온주의 이민 운동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열강 영국의 이중 외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인들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랍 독립 국가 건설과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동시에 지지하는 기만적인 정책이었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결집된 정치력을 갖고 있던 시온주의 지도부는 기존 팔레스타인 공동체들을 효과적으로 압박하며 영토의 소유권을 늘려갔고, 1948년 전쟁을 통해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확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제도화되고 강화되어 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격리당했으며, 비대칭적 무력(이스라엘은 세계 5위의 군사대국이다)에 의한 탄압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관통도로, 분리장벽, 검문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산산이 파괴했다. 저자는 이 비극의 전개 과정을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놓치지 않으며 촘촘한 시선으로 뒤쫓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서 종교는 개인들이 대응하는 방식에 또다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뚜렷한 민족-종교적 의제를 갖고 등장한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 같은 조직”에 대한 경사이다(178쪽).
▶ “미래의 새 생명들에게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
저자는 그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과 탐문을 통해 만난, 현지에서 평화로운 공존의 대안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책을 끝맺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이 함께하는 반점령·반차별 페미니스트 연대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두 민족이 함께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네베 샬롬(Neve Shalom) 마을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여성이 처한 정치적 현실의 차이는 종종 성차별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페미니스트 연대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주의가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남성 엘리트들의 패권 유지를 위해 작동한다는 통찰로써 이러한 위협에 맞설 수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브루노 신부의 주도 하에 세워진 평화의 마을, 네베 샬롬 또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이 상이한 두 민족을 구성원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 이해의 폭을 좁히는 데에 때론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들이 평화와 공존의 가치에 공감해 공동체에 동참한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이들의 실험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외부의 힘도 상시 존재한다. 하지만 반점령·반차별 단체들과 네베 샬롬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미래 세대에게는 이러한 반목과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굳건한 신념 속에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오늘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 3대 유일신교의 역사를 되짚다!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하나의 사태가, 어느 한 민족에게는 ‘독립’이었고 다른 한 민족에게는 ‘대재앙’이었다. 1948년의 이른바 1차 중동 전쟁이 그것이다. 유대 민족에게 이 전쟁은 1800년에 걸친 ‘이스라엘 국가의 수복’이라는 염원을 달성한 사건이었으나,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는 가혹한 억압과 절망적인 항쟁의 서막이었다. 바로 얼마 전인 2014년 7월 8일부터 8월 26일까지 이어졌던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이 그 일단을 보여 준다.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난 세기에 유례없는 인종 절멸 프로젝트의 피해자였던 유대 민족이 또 다른 인종 절멸을 방불케 하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지켜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이 참상의 뿌리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를 묻는 난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어디서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고, 또 정확히 무엇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공존의 길은 없는 것일까? 종교학자로서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교 사이의 핵심적 갈등과 그 원인을 연구해 온 저자 차옥숭은 이 책 『예루살렘 성지·전장』에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모색을 담았다.
예루살렘, 평화가 떠나간 평화의 도시
종교 경험의 중요성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실재와 소통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로 충만한 삶의 양태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를 제시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성화(聖化)된 삶에의 희구는 실재하는 통로로서 성스러운 장소, 즉 성지를 요청한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민족 문제인 동시에 종교 문제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곧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라는 3대 유일신교의 모태가 된 도시이고, 따라서 공통의 성지이기 때문이다(예루살렘 구시가지 안에서 맞닿아 있는 ‘통곡의 벽’과 ‘바위 돔 사원’, ‘알 악사 사원’은 성지를 공유한다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23쪽 이하 참조). 독자들은 이 책을 따라 3대 종교에 있어 예루살렘이 각각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역사적으로 어떻게 상호간에 갈등과 교섭을 되풀이해 왔는지를 살핌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그 본질에서부터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한 모태에서 태어난 세 종교
기원전 1000년경, 다윗 왕에 의해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 이름이 무색하게도 예루살렘은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약 30세기 동안 정복과 파괴, 그리고 재건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왔다. 그것도 모두 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말이다(27쪽). 하지만 이때 3대 유일신교 각각에 의해 운위된 ‘신’은 결코 서로 다른 신이 아니다. 세 종교가 공유하는 전승들을 살펴보면 이 점이 명백해진다. 단적으로 세 종교 중 어느 쪽도 자신들이 아브라함, 모세, 야곱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병존하기 어려운 전승과 교리의 차이도 존재한다. 예컨대 유대교는 예수를 메시아로서 인정하지 않고, 이슬람은 예수를 위대한 예언자 중 한 명으로 보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따라서 원죄의 개념과 대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예언의 완성자라고 말하는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공히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들은 세 종교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반영해 변천해 온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대교의 배타적 선민주의는 오랜 침탈과 망국의 고통 속에서 단단해진 것인데, 여기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행했던 유대교 억압이 연루된다. 이슬람교가 스스로를 구약(모세오경)과 신약을 완성하는 종교로 제시함으로써 다른 두 종교에 대한 우월성을 말하는 것은, 절대 신념 체계로서 절대성을 상실하지 않으려는 당연한 노력이다. 이 책은 이런 비교종교사적 접근을 통해 각 종교의 배타성을 상대화하고, 그럼으로써 유동성의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 종교적 삶 속에서 종교적 다원성을 인정하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세 종교가 항상 극단적 반목만을 거듭해 온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정한 타협과 상대 종교에 대한 관용적 태도 속에서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예도 있다(대표적으로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이슬람의 살라딘 통치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가 믿는 종교는 절대적인 신념 체계로서 그의 전인적인 헌신을 요구하며, 동시에 그 신봉자는 그 종교에 절대성 혹은 우월성을 부여하”는 이상, 종교 간 갈등과 마찰을 피하기는 어렵다(114쪽).
이로부터 저자는 각 종교 전통의 ‘안에서’ 소통과 공존의 가능성을 찾는다. 예컨대 랍비 조너선 삭스는 유일신 신앙이 “한 분 하느님을 믿는 것이지 한 종교, 한 문화, 한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고(116쪽), 신학자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강조하는 ‘종교신학’과 평화로운 세계 공동체를 지향하는 ‘세계종교’라는 틀을 제시했다(127쪽). 또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즘의 시인 젤라루딘 루미는 “길은 여럿이지만 목적은 하나”라고 노래하기도 했다(136쪽). 이런 유연하고 통합적인 입장들을 통해 다종교적 상황에서의 소통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가꾸어 나감으로써만,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로서의 의미를 되찾고 진정한 성지로서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와 그 너머의 희망
1, 2장에서 예루살렘을 둘러싼 세 종교의 역사를 조망하고 종교 간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 후, 책은 3장부터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로 초점을 맞춘다(이 책은 가자 지구 침공 이전인 2013년까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출구가 안 보이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평화의 희망을 간직하고서 연대와 공존의 실험을 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 이스라엘 건국과 팔레스타인인들의 파괴된 삶
근대 이후 유대 민족에게 닥친 최대의 시련은 나치즘으로 귀결되는 데 이르는 반유대주의의 발호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건설을 기치로 내건 시온주의가 탄생했다. 예루살렘은 “1800년이 넘는 해외 이산 기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이 되었”고(17쪽), 따라서 어떠한 추가적 정당화도 필요 없는 본원적 고향으로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 시온주의는 “이스라엘 땅을 식민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내용의 시온주의 강령을 선포”하고 “식민화를 목표로 한 이민”을 시작했다(141쪽). 이 시온주의 이민 운동과 함께,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고 있던 열강 영국의 이중 외교 정책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인들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아랍 독립 국가 건설과 유대 독립 국가 건설을 동시에 지지하는 기만적인 정책이었고,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약속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결집된 정치력을 갖고 있던 시온주의 지도부는 기존 팔레스타인 공동체들을 효과적으로 압박하며 영토의 소유권을 늘려갔고, 1948년 전쟁을 통해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확보, 이스라엘 국가를 선포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이스라엘 정부에 의해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은 제도화되고 강화되어 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격리당했으며, 비대칭적 무력(이스라엘은 세계 5위의 군사대국이다)에 의한 탄압과 학살이 자행되었다. 관통도로, 분리장벽, 검문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일상을 산산이 파괴했다. 저자는 이 비극의 전개 과정을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을 놓치지 않으며 촘촘한 시선으로 뒤쫓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가혹한 현실에서 종교는 개인들이 대응하는 방식에 또다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뚜렷한 민족-종교적 의제를 갖고 등장한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 같은 조직”에 대한 경사이다(178쪽).
▶ “미래의 새 생명들에게 함께하는 평화로운 삶을 주기 위해서”
저자는 그간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방문과 탐문을 통해 만난, 현지에서 평화로운 공존의 대안을 찾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책을 끝맺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두 민족이 함께하는 반점령·반차별 페미니스트 연대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두 민족이 함께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네베 샬롬(Neve Shalom) 마을이 그것이다. 이스라엘 여성과 팔레스타인 여성이 처한 정치적 현실의 차이는 종종 성차별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페미니스트 연대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주의가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타자화를 통해 남성 엘리트들의 패권 유지를 위해 작동한다는 통찰로써 이러한 위협에 맞설 수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브루노 신부의 주도 하에 세워진 평화의 마을, 네베 샬롬 또한 정치적·종교적 배경이 상이한 두 민족을 구성원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 이해의 폭을 좁히는 데에 때론 적지 않은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들이 평화와 공존의 가치에 공감해 공동체에 동참한 사람들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이들의 실험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외부의 힘도 상시 존재한다. 하지만 반점령·반차별 단체들과 네베 샬롬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도 미래 세대에게는 이러한 반목과 고통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굳건한 신념 속에서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