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개정잡문 / 차개정잡문 2집 / 차개정잡문 말편

루쉰 전집 8

루쉰 지음, 박자영·서광덕·루쉰전집번역위원회·한병곤 옮김 | 2015-04-05 | 832쪽 | 35,000원


루쉰 생애 최후 3년간의 치열했던 저항의 글쓰기!


저·역자 소개 ▼

저자 루쉰 周樹人
1881년 저쟝 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의 투옥과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난징의 강남수사학당과 광로학당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공부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02년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 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환등기에서 한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그저 구경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국민성의 개조를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갔다. 도쿄에서 잡지 《신생》의 창간을 계획하고 《하남》 에 「인간의 역사」 「마라시력설」을 발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9년 약 7년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항저우 저쟝양급사범 학당의 교사를 시작으로 사오싱, 난징,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해혁명 직후에는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루쉰이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18년 5월 《신청년》에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이다. 이때 처음으로 ‘루쉰’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이 수록된 『외침』을 비롯하여 『방황』 『새로 엮은 옛이야기』 등 세 권의 소설집을 펴냈고, 그의 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잡문(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화개집』 『무덤』 등을 펴냈으며, 그 밖에 산문시집 『들풀』과 시평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루쉰은 평생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분노하고 저항했는데, 그 싸움의 무기는 글, 그중에서 잡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일컬어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루쉰은 1936년 10월 1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발한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 문학단체 조직, 반대파와의 논쟁,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역자 
박자영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화둥사범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공간의 구성과 이에 대한 상상: 1920, 30년대 상하이 여성의 일상생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중국통상문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과학》 편집위원. 지은 책으로 『상하이의 낮과 밤』(2020), 『도시로 읽는 현대중국1』(공저, 2017), 『동아시아 문화의 생산과 조절』(공저, 2011),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2: 1960~1970년대』(공저, 2009)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루쉰전집14: 서신2』(2018),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2000), 『루쉰전집4: 화개집?화개집속편』(공역, 2014), 『나의 아버지 루쉰』(공역, 2008) 등이 있다. 


역자 서광덕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 후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저서로는 『루쉰과 동아시아 근대』(2018), 『중국 현대문학과의 만남』(공저, 2006), 『동북아해역과 인문학』(공저, 2020) 등이 있고, 역서로는 『루쉰』(2003), 『일본과 아시아』(공역, 2004), 『중국의 충격』(공역, 2009), 『수사라는 사상』(공역, 2013), 『아시아의 표해록』(공역, 2020) 등이 있으며, 『루쉰전집』(20권) 번역에 참가했다. 2020년 현재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자 루쉰전집번역위원회 
공상철, 김영문, 김하림, 박자영, 서광덕, 유세종, 이보경, 이주노, 조관희, 천진, 한병곤, 홍석표


역자 한병곤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였고 전남대학교에서 『노신 잡문 연구』(1995)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 순천대학교 교수. 루쉰 관련 논문으로 「노신에게 있어서의 문학과 혁명」(1988), 「혁명문학논쟁 시기 노신의 번역」(1993), 「노신의 번역관」(1993), 「노신과 지식인: 노신은 무엇에 저항하였는가」(2003), 「건국 초기 중화인민공화국 어문 교과서 속의 노신」(2006) 등이 있다.

차례 ▼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차개정잡문
서언
중국에 관한 두세 가지 일
국제문학사의 질문에 답함
『짚신』 서문
‘구형식의 채용’을 논의함
연환도화 잡담
유가의 학술
『그림을 보며 글자 익히기』
가져오기주의
간극
『목판화가 걸어온 길』 머리말
행하기 어려운 것과 믿기 어려운 것에 대하여
『소학대전』을 산 기록
웨이쑤위안 묘비명
웨이쑤위안 군을 추억하며
류반눙 군을 기억하며
차오쥐런 선생에게 답신함
아이 사진을 보며 떠오르는 이야기
문밖의 글 이야기
고기 맛을 모르다와 물맛을 모르다
중국어문의 새로운 탄생
중국인은 자신감을 잃어버렸나
‘눈에는 눈’
‘체면’을 말하다
운명
얼굴 분장에 대한 억측
되는대로 책을 펼쳐 보기
나폴레옹과 제너
주간 『극』 편집자에게 보내는 답신
주간 『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중국 문단의 망령
신문자에 관하여
아프고 난 뒤 잡담
아프고 난 뒤 잡담의 남은 이야기
차오선생의 가르침을 기리는 비문
아진
속인은 고상한 사람을 피해야 한다는 데 대하여
부기

차개정잡문 2집
머리말
예쯔의 『풍성한 수확』 서문
은자
“광고를 붙이면 바로 찢어 버린다”
책의 부활과 급조
‘만화’ 만담
만화 그리고 또 만화
『중국신문학대계』 소설 2집 서문
우치야마 간조의 『살아있는 중국의 자태』 서문
‘조롱하는 것’
재번역은 반드시 필요하다
풍자에 관하여
‘오자’부터 밝히자
톈쥔의 『8월의 향촌』 서문
쉬마오융의 『타잡집』 서문
글자를 아는 것이 애매함의 시작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베이징파’와 ‘상하이파’
가마다 세이치 묘비
골목 행상 고금담
그렇게 쓰지 말아야 한다
현대 중국의 공자
육조소설과 당대 전기문은 어떻게 다른가?
‘풍자’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말은 가히 두렵다”에 관해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를 다시 논함
『전국목각연합전람회 전집』 서문
문단의 세 부류
조력자에서 허튼소리로
『중국소설사략』 일역본 서문
‘제목을 짓지 못하고’ 초고(1~3)
명사와 명언
“하늘에 의지해 밥을 먹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극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세번째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네번째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다섯번째
‘제목을 짓지 못하고’ 초고(5)
필기구에 관하여
이름에서 달아나다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여섯번째—두 종류의 매물
“문인은 서로 경시한다” 일곱번째—쌍방의 상처받음
샤오홍의 『삶과 죽음의 자리』 서문
도스토예프스키의 일
쿵링징 편 『당대 문인 서간 초』 서문
소품문에 관하여
‘제목을 짓지 못하고’ 초고(6~9)
신문자에 관하여
『죽은 혼 백 가지 그림』 머리말
후기

차개정잡문 말편
『케테 콜비츠 판화 선집』 머리말 및 목록
소련 판화 전시회에 부쳐
나는 사람을 속이려 한다
『역문』 복간사
바이망 작 『아이의 탑』 서문
이어 적다
깊은 밤에 쓰다
3월의 조계
「관문을 떠난 이야기」의 ‘관문’
『외침』 체코어 역본 머리말
쉬마오융에게 답함, 아울러 항일 통일전선 문제에 관하여
타이옌 선생에 관한 두어 가지 일
차오징화 역 『소련 작가 7인집』 서문
타이옌 선생으로 하여 생각나는 두어 가지 일

<부집>
문인 비교학
크고 작은 기적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
잘못 실린 문장
『해상술림』 상권 서언
나의 첫번째 스승
『해상술림』 하권 서언
트로츠키파에 답하는 편지
현재 우리의 문학운동을 논함
『소련 판화집』 서문
반하 소집
“이것도 삶이다”……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1)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2)
죽음
여조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3)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4)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5)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6)
“훗날 증거로 삼기 위하여”(7)
후기

『차개정잡문』에 대하여
『차개정잡문 2집』에 대하여
『차개정잡문 말편』에 대하여

편집자 추천글 ▼

루쉰 생애 최후 3년간의 치열했던 저항의 글쓰기!
―1934~36년 루쉰의 만년작을 모은 『루쉰전집』 8권 출간


붓 하나로 중국의 근대를 이끈 루쉰(魯迅, 1881~1936).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집필 활동과 후학 양성을 멈추지 않은 선구자이자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탄압 사이에서 저항과 희망의 길을 찾아간 투사, 루쉰의 만년을 『루쉰전집』 8권에 담았다. 이번에 묶은 문집은 『차개정잡문』, 『차개정잡문 2집』, 『차개정잡문 말편』으로 1934년에서 1936년 사이에 쓴 잡문 약 120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전과 같은 문인들과의 첨예한 논전은 없지만, 원숙한 문예사상과 고국의 미래를 향한 여전한 열정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박제가 된 사상적 자원이 아니라, 위기의 시기에 다시 타오를 불씨로서 한 위대한 인물의 마지막 길찾기를 그리고 있다.

‘차개정’에서 쓴 잡문들
『차개정잡문』(且介亭雜文)을 집필한 시기에 루쉰은 상하이의 조계지(외국인들이 치외법권 하에 자유로이 거주할 수 있도록 설정된 지역) 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자 ‘조계’(租界)의 절반씩을 취해 ‘차개’(且介)라는 이름으로 문집을 엮은 것이다. 이것은 국민당과 조계당국 통치의 경계지라는 지리적 의미를 드러낸다. 나아가 열강의 각축장이자 국민당의 탄압 사이에 낀 현실을 은유한다. 그리고 ‘차개정’의 ‘정’(亭)은 상하이 특유의 주택구조인 계단참 방(亭子間)에서 취한 것인데, 이 가옥구조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협소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즉, 루쉰은 열강과 정권 사이엔 낀 중국 인민의 고단한 현실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실제로 루쉰 자신은 이 지역에 살면서 국민당의 지명수배와 가택수색, 잡문 발표, 서적 출판 금지, 심지어는 일본군의 포격을 받으면서 도피생활을 했다. ‘차개정’은 무력과 통제가 이중으로 행해지는 야만의 공간이자 문예와 사상을 자유로이 표현할 수 없는 부자유의 공간을 표상한다.

국민당의 문화통제에 저항하는 루쉰

루쉰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글에서 루쉰은 유럽인들이 죽을 때 남에게 용서를 빌고 자기도 용서하는 의식을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루쉰의 결론은 이렇다. “나를 미워하라고 해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루쉰의 저항도 멈추지 않았다. 당시 형세를 보면, 1932년 일본은 위만주국을 건설하면서 대륙 침략에 박차를 가했다. 반면 국민당 정부는 침략에 적극 대처하지 않고 국내 문제에 집중한다. 밖으로는 굴욕적인 외교 회담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안으로는 폭력으로 진보적 싹을 제거했다. 전통적인 유교 도덕을 강화하면서 청년 문인들을 단속하고 항일 운동을 억눌렀다. 언론 탄압과 문화통제가 최고조에 달했다.
루쉰의 대처법은 이렇다. 먼저, 필명을 수시로 바꾼다. 창겅(常庚), 옌커(燕客), 탕쓰(唐俟), 궁한(公汗) 등을 써서 당국의 검열을 피해 갔다. 국내 지면에 발표하는 날선 글들은 루쉰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 힘들었다.
둘째, 문집을 엮으면서 국민당 당국에 의해 삭제되고 왜곡되며 금지된 말들의 원형을 되살리고 또 그 흔적을 남기면서 이 억압적인 행위가 어떻게 행해졌는지 구체적으로 적시한다(『차개정잡문』 「부기」). 당국은 검열 시 삭제했음을 표시하지 않고 그대로 붙여 앞뒤가 안 맞는 글을 내보냈다. 엄연한 조작 행위에 골탕을 먹는 것은 작가들이었다. 말 안 되는 소리에 독자는 작가를 원망했다. 루쉰은 나아가 검열 이유와 검열 주체가 누구인지 추정하며, 당국의 언론 탄압의 맨얼굴에 다가간다. 개인적 원한이 공적인 탈을 쓰고 있기도 했다.
셋째, 과거 필화사건의 전례를 보임으로써 현재의 언론 탄압 상황을 비판한다. 진시황과 히틀러의 분서를 사례로 억압이 만연한 현실을 풍자하고, 청대의 금서와 필화사건으로 노예근성의 유례를 밝힌다. 가령, 건륭 시대에 편찬한 『사고전서』는 글을 훼손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고서의 격식을 흩뜨려 놓았을 뿐 아니라 내용을 뜯어 고치기까지 한 것이다(특히 화이華夷와 관련한 부분을).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읽게 하여, “중국 작가 중에서도 강직한 기개를 갖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영원히 깨닫지 못하게 했다”. 우민정책은 지금도 여전하다.
마지막으로, 금서목록을 보인다. 『차개정잡문 2집』 「후기」에서 루쉰은 자신의 글이 종종 알기 어렵다는 독자들의 질문에 답한다. 언론출판계에 대한 탄압 상황을 실제 공문과 금서 목록, 이에 대한 각 서점(출판사)의 대처 등으로 자세히 보여 준다. 당시의 정황을 기록으로 남겨 둠으로써 훗날을 기약한다.

청년 작가와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루쉰

루쉰은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했다. 그는 미래를 이끌 청년들에게 희망을 품었다. 창조사, 태양사 동인 등 젊은 작가들의 자신을 향한 비판과, 같은 뜻을 품었던 청년들이 변절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35년에 루쉰은 청년 작가들을 돕기 위해 노예사(奴隸社)를 창설했다. 자비를 들여 그들의 작품을 편집하고 간행한 것이다. 샤오훙(蕭紅)의 『삶과 죽음의 자리』(생사의 장), 예쯔(葉紫)의 『풍성한 수확』, 톈쥔(田軍)의 『8월의 향촌』 등에는 서문을 써주고 출간했다. 그의 영향력 덕분에 청년 작가들의 작품은 많은 중국인들에게 읽혔다. (역시 루쉰의 지원을 받은) 딩링(丁玲)과 함께 샤오훙은 당대 최고의 여성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청년 예술가들의 신흥 목판화 작품에 대한 지원도 계속되었다. 루쉰의 도움을 받은 판화단체가 광저우의 현대판화회, 핑진(平津)목각연구회 등 십여 개에 이른다. 루쉰은 목판화 강습회를 열기도 하고, 청년 예술가들의 전시회도 힘껏 도왔다. 그의 마지막 외부 활동이 청년 예술가들의 전시회(제2회 전국목각연합전람회)였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그의 사진(화보에 수록)은 그가 청년들과의 대화를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를 보여 준다.

국난의 시기에 인문의 방향을 제시하는 루쉰

민족혁명전쟁 시기의 대중문학
1935년 말 루쉰이 활동했던 중요 문인단체 좌익작가연맹(좌련)이 해산했다. 저우양(周揚), 샤옌(夏衍) 등 중국공산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은 좌련으로는 공산당이 추구하는 항일 민족통일전선 정책에 발맞추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해산 이후 이들은 항일구국을 목적으로 하는 ‘문예가협회’를 조직했다. 허나 루쉰은 이들의 평소 행실과 자의적인 실행 방식에 불만이 있었다. 협회에 가담하지 않은 인사들에게 연합전선을 파괴한다느니 한간(漢奸)이니 하며 회유와 협박, 비난을 일삼았고, 국방문학을 주장하는 가운데 일반 민중의 역량을 소홀히 여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구호는 그럴듯하지만 속 좁은 행태였다.
국난의 시기에 루쉰은 ‘대중문학’을 주장했다. ‘항일’이든 ‘국방’이든 그것은 넓은 의미의 애국주의 문학으로 이해해야 한다. 구호는 작품의 원칙이 따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 간의, 작가와 사회 간의 관계의 표지일 뿐이다. 민중의 생활양식을 표현한 작품이라도 ‘항일’과 관계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법이다. 때문에 루쉰에게는 정통이니 이단이니 하는 논쟁도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문학 실천이 향하는 지점이며, ‘항일’이라는 한 점으로 인민대중의 역량이 수렴하는 것이다. ‘민족혁명전쟁 시기의 대중문학’에 대해 루쉰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적·문학적 영향을 확대할 수 있을뿐더러, 작가들이 국방의 깃발 아래 연합하는 것, 광의의 애국주의 문학으로 해석될 수 있다. 때문에 그 구호가 부정확하게 해석된 적이 있고 그것 자체가 의미상 결함이 있음에도 여전히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가 항일운동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686쪽)

대중을 위한 신문자 개발과 시각예술 보급
일찍이 백화문 운동을 펼친 루쉰은 만년에는 라틴화 신문자 방안을 제창한다. 대중들이 쉽게 문자를 익힐 수 있도록 알파벳으로 발음을 표기하자는 것이다. 1931년 우위장(吳玉章), 취추바이(瞿秋白) 등이 입안한 이 방안은 무엇보다 성조를 표시하지 않아서 비교적 간단했다. 1933년부터 각 지역에서 여러 단체들이 결성되어 보급하기 시작한 이 방안은 현재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표음문자를 쓰려는 노력은 중국의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대중교육에 대한 루쉰의 열정은 중국어와 문자 방면에 그치지 않았다. 구습과 미신의 타파, 새로운 과학의 보급, 지리와 역사 연구, 문예작품 창작과 외국 문학작품 번역, 나아가 판화 작품을 비롯한 각종 시각예술의 보급에 이르렀다. 만화를 적극 옹호하고, 연작 형식의 그림책인 연환화(連環畵)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대중들이 이해하는 예술이 가장 중요하다고 루쉰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해를 잘 할 수 있도록 그린 그림이야말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56쪽) 루쉰이 바라본 예술은 대중의 인식 수준을 높일 수 있느냐에 가치의 방점이 있다. 루쉰에게 대중 교육은 필생의 사업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