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집 / 삼한집

루쉰 전집 5

루쉰 지음, 홍석표·김하림·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 2014-02-15 | 504쪽 | 27,000원


1927년에 쓴 잡문을 모은 『이이집』

1927~9년에 쓴 잡문을 모은 『삼한집』


저·역자 소개 ▼

저자 루쉰 周樹人
1881년 저쟝 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의 투옥과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난징의 강남수사학당과 광로학당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공부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02년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 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환등기에서 한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그저 구경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국민성의 개조를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갔다. 도쿄에서 잡지 《신생》의 창간을 계획하고 《하남》 에 「인간의 역사」 「마라시력설」을 발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9년 약 7년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항저우 저쟝양급사범 학당의 교사를 시작으로 사오싱, 난징,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해혁명 직후에는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루쉰이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18년 5월 《신청년》에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이다. 이때 처음으로 ‘루쉰’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이 수록된 『외침』을 비롯하여 『방황』 『새로 엮은 옛이야기』 등 세 권의 소설집을 펴냈고, 그의 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잡문(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화개집』 『무덤』 등을 펴냈으며, 그 밖에 산문시집 『들풀』과 시평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루쉰은 평생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분노하고 저항했는데, 그 싸움의 무기는 글, 그중에서 잡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일컬어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루쉰은 1936년 10월 1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발한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 문학단체 조직, 반대파와의 논쟁,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역자 
홍석표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중국 현대문학 전공으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회장 및 국제루쉰연구회(國際魯迅硏究會) 이사를 맡고 있다. 루쉰 문학을 비롯해 중국 현대문학사 및 학술사에 관해 연구해왔으며, 최근에는 관심 영역을 확대해 동아시아적 시좌에서 근대 시기 한중 간 문학(문예)과 사상의 교류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루쉰과 근대 한국』(2017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근대 한중 교류의 기원』(2015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 『중국 근대학문의 형성과 학술문화담론』(2012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중국현대문학사』(2010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중국의 근대적 문학의식 탄생』(2007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천상에서 심연을 보다: 루쉰(魯迅)의 문학과 정신』, 『현대중국, 단절과 연속』(2005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등이 있다. 그 밖에 『루쉰전집』 제1권·제5권·제12권(공역), 『화개집·화개집속편』, 『한문학사강요·고적서발집』(2003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무덤』, 『중국당대신시사』(2000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등 다수의 역서가 있다. 


역자 김하림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서 『魯迅 문학사상의 형성과 전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조선대학교 중국어문화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루쉰의 문학과 사상』(공저, 1990), 『중국 문화대혁명시기 학문과 예술』(공저, 2007)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중국인도 다시 읽는 중국사람 이야기』(1998), 『한자왕국』(공역, 2002), 『중국의 차문화』(공역, 2004), 『차가운 밤』(2010) 등이 있다.  


역자 루쉰전집번역위원회 
공상철, 김영문, 김하림, 박자영, 서광덕, 유세종, 이보경, 이주노, 조관희, 천진, 한병곤, 홍석표

차례 ▼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이이집(而已集)
제사

1927년
황화절의 잡감
중국인의 얼굴
혁명시대의 문학 - 4월 8일 황푸군관학교에서의 강연
『노동문제』 앞에 쓰다
홍콩에 관한 간략한 이야기
독서 잡담 - 7월 16일 광저우 즈융중학에서의 강연
통신
유헝 선생에게 답함
‘대의’를 사양하다
‘만담’을 반대하다
‘자연 그대로의 유방’을 우려하다
‘우두머리’를 제거하다
‘격렬’을 말하다
『위쓰』를 압류당한 잡감
‘공리’의 소재
밉살 죄
‘예상 밖으로’
새 시대의 빚 놓는 방법
위진 풍도.문장과 약.술의 관계
사소한 잡감
다시 홍콩에 관한 이야기
혁명문학
『진영』 제사
타오위안칭 군의 회화전시회 때 - 내가 말하려는 몇 마디 말
루소와 취향
문학과 땀 흘림
문예와 혁명
이른바 ‘궁중 문서’에 대한 이야기
예언의 모방 - 1929년에 나타날 자질구레한 일
[부록] 50명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다

삼한집(三閑集)
서언

1927년
소리 없는 중국 - 2월 16일 홍콩청년회에서의 강연
어떻게 쓸 것인가? - 밤에 쓴 글 1
종루에서 - 밤에 쓴 글 2
구제강 교수의 ‘소송을 기다리라’는 사령
비필 세 편
모필 두 편
홍콩의 공자 탄신 축하를 말하다
애도와 축하

1928년
‘취한 눈’ 속의 몽롱
쓰투차오 군의 그림을 보고
상하이에서 루쉰의 공고
문예와 혁명
편액

머리
통신
태평을 바라는 가요
공산당 처형의 장관
나의 태도와 도량, 나이
혁명 커피숍
문단의 일화
문학의 계급성

1929년
‘혁명군 선봉’과 ‘낙오자’
『근대 세계 단편소설집』의 짧은 머리말
오늘날의 신문학 개관 - 5월 22일 옌징대학 국문학회에서의 강연
황한의학
우리나라의 러시아 정벌사의 한 페이지
예융친의 『짧은 십 년』 머리말
러우스의 『2월』 서문
『어린 피터』 번역본 서문
부랑배의 변천
신월사 비평가의 임무
서적과 재물과 여인
나와 『위쓰』의 처음과 끝
루쉰 저서 및 번역서 목

『이이집』에 대하여
『삼한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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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에 쓴 잡문을 모은 『이이집』

『이이집』(而已集)이라는 제목은 루쉰이 이 문집의 ‘제사’(題辭)로 삼은 ‘따름이다’(而已)를 뜻한다. 천시잉이 루쉰의 잡문에 대해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던져넣어 버렸다”며 비방한 적이 있는데, 이에 루쉰이 “잡감마저도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던져넣어 버릴 때면 / 그리하여 ‘따름’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맞받아친 것이 이 제목의 유래이다. 즉, 루쉰의 논전은 1927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다만 이때는 수배를 피해 베이징을 떠나 샤먼에 머물렀다가 광저우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상하이에 정착하게 되는 시기이므로, 기존 현대평론파와의 논전은 줄어들고 대신 새로운 논쟁이 벌어진다.

<전기 잡문과 후기 잡문의 교량 역할>
1927년은 루쉰 자신의 신변 변화와 함께 사상적인 변화도 일어나는 시기이다. 4월 12일 장제스가 일으킨 쿠데타로 말미암아 쑨원이 이끌던 국공합작과 국민혁명은 수포로 돌아갔고, 공산당원과 국민당 좌파 인사들이 숙청당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해 1월부터 광저우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루쉰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당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지만, 동조해 주는 사람이 없어 실망하고, 결국 사직하게 된다. 특히 “청년을 살육하는 사람은 오히려 청년들인 듯하고, 그들은 다른 생명과 청춘을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 피의 유희의 주인공”(83쪽)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청년들에 대한 실망감이 매우 컸다. 혁명 때는 같은 진영에 있던 청년들이 서로를 모함하고 당국의 체포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루쉰은 더 이상 청년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일련의 사건과 경험으로부터 루쉰은 기존에 갖고 있던 사회진화론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혁명과 계급성 등의 문제에 대해 천착하는 계기를 맞이한다.
잡문집의 출판에서도 이런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이집』을 1928년에 출판하고 나서 『삼한집』을 1932년 9월에 출판하니 그 사이에는 4년의 간극이 있다. 이 4년의 간극이 루쉰의 사상적 변화를 은연중에 표현해주고 있는데, 그렇기에 『이이집』이 이전에 출판된 잡문집 『무덤』, 『열풍』, 『화개집』, 『화개집속편』의 연속이라 한다면, 그 뒤의 잡문집 『삼한집』, 『이심집』 등은 루쉰의 사상적 변화를 내용적으로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이집』은 루쉰의 전기 잡문의 에필로그이면서 후기 잡문으로 나아가는 교량으로서 그의 사상적 변화의 단초를 포함하고 있다.

<고전으로 현실비판 하기>
루쉰의 글 중 특징적인 한 가지는 고전에 관한 주석 작업이든 서양 문학작품 번역이든 간에 그것이 갖고 있는 학문적 가치를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그 작업이 갖는 현재성, 그 내용과 관련된 사회비판적 현실을 의미화했다는 점이다. 이 문집에 실린 글 중 「위진 풍도?문장과 약?술의 관계」는 이런 점에서 백미 중에 백미라고 말할 수 있는데, 위진(魏晋) 시기 문인들의 특징과 사회상, 그리고 양자 간의 관계를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한편, 그 가운데에서 현실에 대한 강렬한 풍자의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조가 공융(孔融)을 죽이고 사마의가 혜강(?康)을 죽인 이유인 ‘불효’(不孝)는 다만 반대하는 자를 제거하기 위한 명목상의 죄에 불과하였음을 밝히는데, 이는 당시 국민당 당국이 ‘청당’(淸黨)이라는 명분으로 공산당원을 몰아내고 진보적인 청년들을 체포 구금한 사태를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직설적으로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고전과 역사에 빗대어 현실을 풍자하는 루쉰의 필력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27~9년에 쓴 잡문을 모은 『삼한집』

『삼한집』(三閑集)의 ‘삼한’은 루쉰에 대해 “한가하고 한가하고 한가하다”며 ‘세 번의 한가’(三閑)로 루쉰의 계급성을 비웃은 창조사 동인 청팡우(成?吾)의 글에서 유래한다. 청팡우는 1927년 1월에 발표한 「우리들의 문학혁명을 완성하자」라는 글에서 “루쉰 선생은 화개(華蓋) 자리에 앉아서 그의 소설구문(小說舊聞)을 베끼고 있고, 이것은 일종의 취미를 위주로 하는 문예로 그 배후에는 반드시 취미를 위주로 하는 생활 기조가 자리 잡고 있다”라고 비판하며 루쉰이 유한자(有閑者)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음을 비꼰 것이다. 『삼한집』에서 루쉰은 이를 되받아치며 자신을 향했던 계급적 칼날을 세우기 시작한다.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10년, 그 끝의 시작>
1927년 9월 27일 광저우를 떠나 10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루쉰은 동생 저우젠런(周建人)의 소개로 징윈리(景雲裏)에 거주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10년을 상하이에서 생활하게 된 루쉰은 교직에 몸담지는 않았으나 대학의 강연에는 응했고, 창작과 번역도 지속하였다. 1928년에는 창조사와 태양사 동인과 혁명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는데, 격렬한 논전의 과정과는 달리, 결과적으로는 좌익작가연맹(좌련) 결성으로 이어진다. 1930년 좌련의 영수로 추대되어 창립대회에서 강연을 한 루쉰은 이후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잡문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발언을 계속하며 젊은이들이 깨어나길 바랐고, 좌련 기관지 『전초』을 발행하고 판화 등의 새로운 예술운동을 전개하며 미래를 준비하였다.

<혁명문학 논쟁>
신해혁명 이후 ‘혁명’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추세였기에 문예가라면 너나 할 것 없이 혁명문학의 옷을 걸쳐 입었었다. 그러나 1927년 국민당의 ‘청당’(淸黨) 이후로는 공산당 소탕의 분위기가 팽배하여 혁명에 대한 유보적인 태도가 퍼지기도 하였다. “너무 ‘혁’하면 과격에 가깝고, 과격은 공산당에 가까워 ‘반혁명’으로 변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루쉰은 늘 혁명문학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데, 1928년 즈음에 창조사(創造社)와 태양사(太陽社) 동인들은 루쉰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루쉰이란 늙은이는 취한 눈으로 창밖의 인생을 내다본다”라거나 “낙오자”, “추접스러운 설교자”, “봉건 잔재”, “이중성을 지닌 반혁명 인물”, 심지어는 “파시스트”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말이다.
루쉰은 「‘취한 눈’ 속의 몽롱」에서 이에 대해 적극 반론하는데, 가령 톨스토이에 빗대어 자신을 추접스러운 설교자라고 비난한 그들에 대해 “정부의 폭력, 재판 행정의 희극적인 가면을 찢어 버린 톨스토이의 몇 분의 일만큼의 용기도 없다”며 그들의 말뿐인 태도를 되돌려주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4.12쿠데타 이후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와중에도 ‘혁명커피숍’이나 차리고 추상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며 민중이 짓밟히는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시기 루쉰은 이들과 치열한 혁명문학 논쟁을 벌이는 한편, 독자적으로 맑스주의 문예이론을 학습하고, 루나차르스키(Anatoly Lunacharsky), 플레하노프(Georgy Plekhanov), 파데예프(Aleksandr Fadeyev) 등의 관련 서적을 다수 번역하며 혁명문학론, 맑스주의 예술론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지 말이 아니다”>
루쉰은 말한다. “기억건대 혁명 이전의 사회는 물론 지금처럼 학생을 증오하지도 않았으며, 학생들도 지금처럼 온순하지 않았다. 태도만 해도 오만하기 그지없어서, 사람들 가운데에 있어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달라졌다. 온화하고 우아한 태도가 마치 옛날의 독서인과 같다. 나 역시 어느 대학의 강의실에서 이걸 언급하고서 말끝에 사실 지금의 학생은 온순해요, 아니 지나치게 온순하다고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실천이지 독서나 말이 아니라고 강조한 바 있다.
루쉰의 청년을 향한 기대와 희망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꾸준히 유지된 것 중 하나이다. 4.12쿠데타 즈음에, 그리고 간혹 청년층에 대한 실망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은 듯하다. 『삼한집』에 실린 다양한 성격의 잡감문 중 편지글 대부분이 젊은이들의 고민에 대해 루쉰 자신이 성심성의껏 답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 루쉰의 남아 있는 편지가 약 3천 통이고, 유명세를 탄 기간을 20년으로 잡으면 약 사흘에 한 통 꼴로 편지를 쓴 것인데, 그 대부분 또한 청년들이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다. 사회진화론적 사고가 파탄되었음을 고백했으면서도 중국의 미래는 그래도 청년들에게 기대해야 하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젊은 창작자나 번역자들을 위해 책을 주거나 교정교열을 보거나 서문을 써주기도 하는 등 독려하였다. 문학을 꿈꾸거나 ‘소리 없는 중국’에서 무언가 외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여전히 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