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집 / 화개집속편

루쉰 전집 4

루쉰 지음, 이주노·박자영·루쉰전집번역위원회 옮김 | 2014-02-15 | 512쪽 | 27,000원


1925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

1926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속편>


저·역자 소개 ▼

저자 루쉰 周樹人
1881년 저쟝 성 사오싱紹興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의 투옥과 아버지의 죽음 등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난징의 강남수사학당과 광로학당에서 서양의 신문물을 공부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다. 1902년 고분학원을 거쳐 1904년 센다이의학전문 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다 환등기에서 한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장면을 그저 구경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국민성의 개조를 위해서는 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학교를 그만두고 도쿄로 갔다. 도쿄에서 잡지 《신생》의 창간을 계획하고 《하남》 에 「인간의 역사」 「마라시력설」을 발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9년 약 7년간의 일본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항저우 저쟝양급사범 학당의 교사를 시작으로 사오싱, 난징, 베이징, 샤먼, 광저우, 상하이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신해혁명 직후에는 교육부 관리로 일하기도 했다. 루쉰이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18년 5월 《신청년》에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광인일기」를 발표하면서이다. 이때 처음으로 ‘루쉰’이라는 필명을 썼다. 이후 그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이 수록된 『외침』을 비롯하여 『방황』 『새로 엮은 옛이야기』 등 세 권의 소설집을 펴냈고, 그의 문학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잡문(산문)집 『아침 꽃 저녁에 줍다』 『화개집』 『무덤』 등을 펴냈으며, 그 밖에 산문시집 『들풀』과 시평 등 방대한 양의 글을 썼다. 루쉰은 평생 불의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분노하고 저항했는데, 그 싸움의 무기는 글, 그중에서 잡문이었다. 마오쩌둥은 루쉰을 일컬어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 혁명가”라고 했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루쉰은 1936년 10월 19일 지병인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활발한 문학 활동뿐만 아니라 중국좌익작가연맹 참여, 문학단체 조직, 반대파와의 논쟁, 강연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중국의 부조리한 현실에 온몸으로 맞서 희망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했다.

역자 
이주노
한국 전남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과 교수. 중국현대문학과 신화, 민간문학 등을 연구. 저서로는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등이 있고, 역서로는 『역사의 혼 사마천』(공역), 『서하객유기』(공역) 등이 있다. 


역자 박자영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화둥사범대학 중어중문학과에서 「공간의 구성과 이에 대한 상상: 1920, 30년대 상하이 여성의 일상생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협성대학교 중국통상문화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화/과학》 편집위원. 지은 책으로 『상하이의 낮과 밤』(2020), 『도시로 읽는 현대중국1』(공저, 2017), 『동아시아 문화의 생산과 조절』(공저, 2011), 『냉전 아시아의 문화풍경2: 1960~1970년대』(공저, 2009)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루쉰전집14: 서신2』(2018),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2000), 『루쉰전집4: 화개집?화개집속편』(공역, 2014), 『나의 아버지 루쉰』(공역, 2008) 등이 있다. 


역자 루쉰전집번역위원회 
공상철, 김영문, 김하림, 박자영, 서광덕, 유세종, 이보경, 이주노, 조관희, 천진, 한병곤, 홍석표

차례 ▼

<루쉰전집>을 발간하며

화개집(華蓋集)
제기

1925년
글자를 곱씹다(1~2)
청년필독서 — <징바오 부간>의 설문에 답하여
문득 생각나는 것(1~4)
통신
논변의 혼령
희생의 계책 — ‘귀화부’ 실경실경장 제13
전사와 파리
여름 벌레 셋
문득 생각나는 것(5~6)
잡감
베이징 통신
스승
만리장성
문득 생각나는 것(7~9)
‘벽에 부딪힌’ 뒤
결코 한담이 아니다
나의 ‘본적’과 ‘계파’
글자를 곱씹다(3)
문득 생각나는 것(10~11)
여백 메우기
KS군에게 답함
‘벽에 부딪힌’ 나머지
결코 한담이 아니다(2)
민국 14년의 ‘경서를 읽자’
평심조룡
이것과 저것
결코 한담이 아니다(3)
내가 본 베이징대학
자질구레한 이야기
‘공리’의 속임수
이번은 ‘다수’의 속임수
후기

화개집속편(華蓋集續編)
소인

1926년
참견과 학문, 회색 등을 같이 논함
흥미로운 소식
학계의 삼혼
고서와 백화
자그마한 비유
편지가 아니다
나는 아직 ‘그만둘’ 수 없다
부엌신을 보내는 날 쓰는 만필
황제에 대하여
꽃이 없는 장미
꽃이 없는 장미(2)
‘사지’
비참함과 가소로움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
공허한 이야기
이 같은 ‘빨갱이 토벌’
꽃이 없는 장미(3)
새로운 장미 — 그렇지만 여전히 꽃은 없다
다시 한번 더
반눙을 위해 <하전>의 서문을 쓰고 난 뒤에 쓰다
즉흥일기
즉흥일기 속편
즉흥일기 2편
‘월급 지급’에 관한 기록
강연 기록
상하이에서 보내는 편지

화개집속편의 속편
샤먼 통신
샤먼 통신(2)
「아Q정전」을 쓰게 된 연유
<삼장법사 불경 취득기> 등에 대해서
이른바 ‘사상계의 선구자’ 루쉰이 알리는 글
샤먼 통신(3)
바다에서 보내는 편지

<화개집>에 대하여
<화개집속편>에 대하여

편집자 추천글 ▼

「아Q정전」과 「광인일기」 등으로 세계문학전집 책장에 꽂혀 있는 루쉰(魯迅, 1881~1936). 그의 창작 세계는 독특하게도 루쉰 자신이 밝혔듯 병리적인 사회의 원인을 드러내어 치료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소설과 시를 창작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문제, 시사에 대해 짧게짧게 발언한 글도 많이 남겼다. 이런 글은 작가가 현재 가장 문제시 여기는 부분에 대하여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쓴 글이기 때문에 일명 ‘잡문’(雜文, 혹은 잡감)이라 부른다. 총 20권으로 완간 예정인 ‘루쉰 전집’(그린비) 중 4권인 이 책은 루쉰이 1925년과 1926년에 쓴 잡문들을 묶어 발표한 <화개집>과 <화개집속편>을 담고 있다.

1925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

<화개집>(華蓋集)이라는 제목은 점칠 때의 용어 중 하나인 ‘화개운’에서 비롯한다. “화개가 위에 있으면 앞을 가린다”는 점괘처럼 루쉰이 현재 벽에 부딪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음을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1925년 중국은 쑨원의 사망 이후 국민당 우파가 득세하여 안으로는 반공 정책의 일환으로 비판적인 지식인과 학생들의 활동이 통제당하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전쟁과 만행에 휘둘리며 혼란한 정국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5.30운동’(일본인 면사공장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영국 경찰이 총질을 하며 과잉 진압한 결과로 일어난 대중투쟁)으로 노동자계급이 중국 혁명의 주체로서 새롭게 부상하고, 지식인들 또한 좌우를 가리지 않고 분화를 거듭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루쉰은 청년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그들이 발언할 공간(<위쓰>語絲와 <망위안>莽原 등의 간행물)을 마련했지만, 발언하는 이는 매우 드물었고 오히려 정부와 사회,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만이 커져가자 실의에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위축될 틈이 없었다. 베이징여사대 사건에 휘말렸고, 교육총장 장스자오(章士釗)로부터 교육부 첨사 직을 면직당했으며, 천시잉(陳西瀅)을 비롯한 현대평론파 무리의 공격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혁명 실패의 현실에 대한 풍자
이 당시 중국의 현실을 두고 루쉰은 만리장성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다(89쪽). 위대하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실은 “이제껏 헛되이 수많은 노동자들을 일하다 죽게 만들었을 뿐, 오랑캐를 막아 냈던 적이 있었던가?” 묻고는, “예전부터 있어 온 낡은 벽돌과 보수하기 위해 보탠 새 벽돌이 한데 연합하여 성벽을 이룬 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이 당시에 이런 현실에 대한 인식은 쑨원 사후 국공합작이 힘을 잃으면서 외세의 침략과 횡포에 속수무책 당하는 사태가 확산되면서 커져갔다.
그리고 그 주범 중 하나인 국민당 우파를 비롯한 반(反)혁명 세력을 「전사와 파리」에서 이렇게 풍자한다. “전사(戰士)가 전사(戰死)했을 때, 파리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결점과 상처 자국이다. 파리들은 빨고 앵앵거리면서 의기양양해하며, 죽은 전사보다 더욱 영웅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전사는 이미 전사하여, 더 이상 그들을 휘저어 내쫓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리들은 더욱 앵앵거리면서, 불후의 소리라고 스스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완전함은 전사보다 훨씬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느 누구도 파리들의 결점과 상처를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完美)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꺼져라, 파리들이여! 비록 날개가 자라나 앵앵거릴 수 있지만, 끝내 전사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이 벌레들아!”(66쪽)

‘정인군자’라 불리는 위선적 지식인들과의 논전
이 시기 루쉰에게 핵심적인 사건은 베이징여사대(베이징여자사범대학) 사건과 이를 둘러싼 <현대평론> 문인들과의 논전이다. 베이징여사대 사건은 교장 양인위(楊蔭楡)가 ‘학풍정돈’을 내세우며 학생들을 압박하고 이에 저항하는 학생회를 해산하고 임원들을 퇴학시키면서 불거진 사건이다. 당시 이 대학 강사였던 루쉰은 학생들 편에 가담했고 폐교와 복교, 면직과 복직 소송 등을 거치며 사태 전반에 관련을 맺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베이징대학 교수 천위안(陳源, 필명은 천시잉) 등은 양인위를 옹호하면서 루쉰과 학생들을 비난하였다.
루쉰은 <현대평론>에 소속된 이 문인들을 ‘정인군자’(正人君子)라고 일컬었는데, 본래 품행이 단정하고 사욕이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 이 말을 루쉰이 되받아 ‘단정하고 엄숙함을 가장하는’ 이들의 행태를 풍자할 때 사용하였다. 즉, 정인군자들은 당국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반면, 루쉰의 글이나 그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짐짓 공정한 척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상대를 비하하는 전술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리(公理)와 도의(道義), 학문(學問)과 다수(多數)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겼지만, “여사대의 소요사태에는 베이징교육계에서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하고 있는 어느 지역, 어떤 출신 사람이 암암리에 선동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들어 왔다”며 루머를 퍼뜨리고, “억압받고 있는 자를 대신하여 몇 마디 공평한 말을 했다면, 당신은 그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거나 그에게 술과 밥을 얻어먹은 것”이라고 매도하였다.
정인군자들의 황당할 정도로 더럽고도 집요한 공격에 대해 루쉰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되받아치며 비판의 칼날을 벼리었다. 천위안이 여사대를 ‘냄새 나는 측간’에 비유했을 때 루쉰은 그것이야말로 천위안 무리의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받아쳤다. “흑막 속에 숨은 채 모른다는 말만 되뇌고, 폭군을 위해 뛰어다니면서도 국외자인 양 자처하며, 뱃속 가득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정한 웃음 띤 얼굴을 가장하고, 누군가 자신이 관찰한 바의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말하면 ‘뜬소문’이라는 말로 무책임한 무기를 삼는다. 구더기로 가득 찬 이런 ‘냄새 나는 측간’은 말끔히 청소하기도 어렵다.”(120쪽)

1926년에 쓴 잡문을 모은 <화개집속편>

1926년의 루쉰은 여전히 ‘화개’ 아래에서 답답한 상태로 출로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때에야말로 창작활동이 왕성한 때여서, <아침 꽃 저녁에 줍다>와 <들풀>, <새로 쓴 옛날이야기> 등으로 묶인 글들도 같이 창작했다. 잡문과 시와 산문과 소설이라는 각양각색의 장르를 동시다발적으로 발표하면서 다양한 문체를 선보이던 시기였다.

나는 그들의 경멸을 경멸합니다”
현대평론파 정인군자들과의 논전은 해를 넘겨 전개되었다. 그리고 3월 18일의 참사 이후 더욱 첨예해진다. 일제의 침략에 항의하는 뜻을 담아 청원하러 모인 시민과 학생 시위대를 향해 정부군이 발포한 이 사건으로 루쉰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무려 47명이 사망하였지만, 정인군자들은 참혹한 사건 앞에서도 여전히 공정성의 가면을 쓰고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희생자에 대한 유언비어를 활자화하는 데 앞장섰기 때문이다. 루쉰에 대한 천위안의 비판 또한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학원사태 배후설 유포, 출신 시비, 표절 시비, 잡문집 비방, 소문 위조, 생김새에 대한 인신공격 등 다양하고 치졸하게 이뤄졌다.
루쉰은 이들의 언론 왜곡과 집요한 시비 걸기에 무력하게 있지 않고 정면 돌파를 시도했다. 자신에 대한 사적인 추문과 비방에 대해서도 공적인 무대에 올려 공론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비판을 하나하나 들어 본 다음 그대로 맞받아치면서 그 비판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기도 하였다. “여러 곳에서 비방을 받고 습격을 당했지만 이제는 상처도 없는 것 같고 더 이상 통증도 느끼지 못합니다.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더라도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 나는 이제 물러날 데가 없는 곳까지 물러났을 때 그때 나와서 그들과 싸우고 그들을 경멸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멸을 경멸합니다.”(496쪽)
루쉰이 자신의 명예나 위신이 떨어지는 것에 굴하지 않고 진흙탕 싸움으로 비칠 수도 있는 이런 논전을 지속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 위선적인 지식인 집단이 사실을 어떻게 왜곡해서 기득권의 이익을 수호하는지, 여론을 어떻게 독점하여 민의를 좌절시키는지를 간파했기 때문이다. 훗날 <루쉰잡문선집>을 펴낸 취추바이(瞿秋白)가 루쉰은 천위안을 일개인이 아니라 ‘보통명사’로 대했다고 말한 바와 같이 루쉰은 지식인 집단의 성격에서 좀더 큰 권력집단의 생리와 중국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를 보고 투쟁했던 것이다.

베이징에서 샤먼으로
3.18참사 이후 루쉰은 당국의 수배령을 피해 오랫동안 머물렀던 베이징을 떠난다. ‘화개집속편의 속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문집의 뒷부분은 상하이를 거쳐 도달한 샤먼에서 쓴 글이다. 그리고 이 문집의 마지막 글은 다시 샤먼을 떠나 광저우로 이동하는 바다 위에서 씌어졌다. 이런 점에서 1926년의 상반기가 전투의 시기였다면 하반기는 모색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샤먼에서 보낸 4개월은 루쉰의 생애 가운데 가장 분주하면서도 무료한 나날들이었다. 강의 외에도 대학의 사무와 잡다한 관계로 바쁘기는 했지만 집필은 많지 않았다. 현대평론파와의 치열한 논전으로 시작했던 1926년은 샤먼에서 고즈넉하고 쓸 말 없는 마음 상태로 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