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고의

이토 진사이 선집 3

이토 진사이 지음, 최경열 옮김 | 2016-04-10 | 816쪽 | 42,000원


‘논어’와 ‘맹자’의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 특유의 사상이 피어나는 지점,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저·역자 소개 ▼

저자  이토 진사이 伊藤仁齋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고의학파(古義學派)의 창시자. 초명은 고레사다(維貞)이고 뒤에 고레에다(維禎)로 개명했으며, 보통 겐시치(源七), 겐키치(源吉), 겐스케(源佐) 등으로 불렸다. 진사이는 그의 호이며, 고학선생(古學先生)으로도 불렸다.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 교토에서 재목상(材木商)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가장 유명했던 화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청년 시절 주자학에 몰두하였고 이십대 후반에는 가업을 포기하고 불도(佛道)에 전념했으나, 삼십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비판하며 유교 고전의 새로운 읽기를 시도하였다. 1662년 사립 유학 학교인 고의당(古義堂)을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그는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어맹자의』(語孟字義), 『동자문』(童子問), 『중용발휘』(中庸?揮), 『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 『진사이일찰』(仁齊日札), 『동지회필기』(同志會筆記)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사후 그의 아들 이토 도가이(伊藤東涯)가 모두 교감해서 출판하였다.

역자  최경열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습니다. 곡부서당(송양정사松陽精舍)에서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님께 한문을 익히며 낯선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인간의 감화력이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한림원과 민추(현 고전번역원)에서도 고전을 공부했습니다. 서양인이 동양을 공부하는 치밀함에 자극받아 영어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으나 그보다 우선 넓게 공부해서 파야겠다는 생각으로 중국고대사상에 집중해, 선진(先秦)시대 저작을 두루 읽고 있습니다. 유학이 정통이나 주류로 자리 잡기 이전, 많은 담론이 쟁명(爭鳴)하는 모습이 장관이라서 공부가 흥미롭습니다. 
『당시 300수』를 공역했고 일본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齊)의 대작인 『논어고의』(論語古義), 『맹자고의』(孟子古義), 『동자문』(童子問) 등을 잇달아 번역했습니다.
차례 ▼

『맹자고의』 간행 서문

맹자고의 권1
양혜왕 장구 상
양혜왕 장구 하

맹자고의 권2
공손추 장구 상
공손추 장구 하

맹자고의 권3
등문공 장구 상
등문공 장구 하

맹자고의 권4
이루 장구 상
이루 장구 하

맹자고의 권5
만장 장구 상
만장 장구 하

맹자고의 권6
고자 장구 상
고자 장구 하

맹자고의 권7
진심 장구 상
진심 장구 하

맹자고의 원문
옮긴이 해제 / 이상주의에서 현실주의로 -『논어』의 의소로 읽는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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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와 ‘맹자’의 본의는 무엇인가?
―일본 특유의 사상이 피어나는 지점, 이토 진사이의 ‘고의학’(古義學)


주자학이 횡행하던 시절, 경전 탐구에 있어서 지배적 담론에 포섭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본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자기 나름의 해답을 구해낸 이례적이고도 선구적인 유학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일본 고의학(古義學)의 창시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이다. 그의 핵심 저작, 곧 「논어」와 「맹자」를 평생에 걸쳐 탐구하며 성인(聖人)의 뜻을 밝혀낸 저작 「논어고의」(論語古義)와 「맹자고의」(孟子古義)를 동시에 번역 출간하였다.
‘고의’(古義)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두 저작은 「논어」와 「맹자」의 옛 의미, 그 당시의 원래 의미를 탐구한다. 한나라에서부터 육조시대에 이르는 고주(古注)와 주자(주희)를 중심으로 한 송나라 시대의 신주(新注)를 섭렵한 끝에 이들과는 다른 「논어」, 「맹자」 해석의 길을 연 저작이다. 주자학에 가려진 경전의 의미를 밝힌 이 두 저작은 조선 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주체적인 해석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고전 연구상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이 저작들은 일본사상사에서 전환적인 위치를 점유한다. 중국의 강력한 자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히도 이후 흐름은 국수적인 國學으로 귀결하고 말았지만) 자신들만의 어떤 고유한 특질을 찾아내려는 집요한 연구 성격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본의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진사이는 논한다”라고 자신 있게 소신을 밝히는 학문 태도는 사상사와 무관하게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먼지 쌓인 경전을 털어내고 ‘실학’(實學)으로써 세상에 펼쳐 보이는 그의 공부 방법은 고전 연구 현장에 적용할 가치가 높다.

「논어」와 「맹자」를 함께 읽는다

이토 진사이는 「논어」와 「맹자」의 시대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두 경전을 마치 하나의 텍스트인 양 대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고의’, 즉 성인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가 바로 이 두 저작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토 진사이 선집’으로 구성된 「논어고의」, 「맹자고의」, 「동자문」(童子問), 「어맹자의」(語孟字義, 미출간)는 모두 이 성인의 뜻, 성인의 도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얼개들이다. 「동자문」이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성인의 뜻과 그 핵심에 집중하고 있고(주제적이고) 「어맹자의」가 공자와 맹자의 개념을 풀이하고 있다면(개념적이라면),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논어」와 「맹자」를 읽어가며 성인이 말하는 도의 구체적인 내용과 보편적 성격을 밝히고 있다(내용적이다). 한마디로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는 이토 진사이 고의학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사이에 따르면, 「논어」는 교(敎)를 말하지만 도(道)가 그 안에 있다. 반대로 「맹자」는 도를 말하지만 교가 그 안에 있다. 이를 섞어 읽으면, 「논어」는 공자의 가르침이 주를 이루지만 「맹자」의 거울을 비춰 보면 성인의 도, 즉 인의(仁義)의 의미가 구체화한다는 것이다. 또 「맹자」는 인의를 비롯한 몇몇 추상적인 개념과 문답의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공자의 가르침을 근거로 그 적실성을 얻음을 알 수 있다. 진사이는 말한다. “공자와 맹자의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논어」와 「맹자」의 같은 점을 알아야 하고 또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공자와 맹자의 근본 취지가 자연스레 명료해질 것이다.” “「논어」와 「맹자」 두 책의 말이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서로 보완이 되는 관계이다. 이것이 두 책의 핵심이며 학문의 목표다. 만약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끝내 공자와 맹자의 문하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배우는 이들은 이 점을 깊이 주의해야 한다.”
이렇게 진사이는 「맹자고의」에서는 「논어」를, 「논어고의」에서는 「맹자」를 가져와서 두 경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논의를 전개한다. 「논어고의」를 완성하고 「맹자고의」를 완성한 게 아니라 두 저술을 하나로 묶어 자신의 학문 양식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주자학의 근거였던 「맹자」를 추상의 그물에서 구출해내고 「논어」의 의소(義疏)로 삼음으로써 고의학만의 독특한 해석 근거로 삼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성선설을 비롯한 인성론의 굴레를 벗고 민낯에 가까운 모습에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성인의 도는 실질에 힘쓴다”

이토 진사이는 성인 문하의 학문은 “실제에 유용한 실학(實學)”이라고 단언한다. 실학이라는 말을 직접 쓸 정도로 그의 관심은 ‘실’에 집중되어 있고 그것으로써 「논어」와 「맹자」를 관통해 읽는다. 이 속에는 주자학이 불교에 대해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듯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추상적이고 은미한 도를 추구하고, 자기 자신의 수양과 ‘경’(敬)의 태도를 강조한 주자학에 대항해 진사이는 세상 경영과 일상 일용을 강조한다. 자기 수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삶을 보살피고 편안히 하는 실질적인 행동이자 군자의 정치임을 강조하며 ‘실’을 경세의 토대라는 관점에서 구체화한다.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일상에서 실질적이고 평이한 도를 묵묵히 실행하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도를 찾고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서 쉬운 일부터 해나가야 한다. 자신이 솔선한다면 백성들은 서로 일을 권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일은 멈춰지게 된다. 자신이 몸소 부지런히 하면 효과가 빠르게 나타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나아가 공자에 대해, 백성들을 교화하려 했다고, 아니 더 나아가 이들과 함께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공자의 인(仁)을,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해석한다.
공자는 늘 실천했다. 말이 아니라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놀려 움직이며 바삐 돌아다녔다. 괴롭다고 불평하지 않았으며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지 않았다.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갔으나 유연했고 사람들에게 예를 지켰지만 비굴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며 태도이기에 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방정하지만 사납지 않고 엄정하지만 두려움을 주지 않는. 진사이가 “위대하다”고 한 말은 으레 하는 수사가 아니다. “공자는 세상을 근심하는 마음을 하루도 마음속에서 잊은 적이 없다. 그런 까닭에 그런 마음이 석경을 치면서 자연히 드러났던 것이다. …… 성인은 온 세상을 자기 한 몸처럼 보고, 백성들이 어지러운 세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자기 몸에 가려움증과 고통이 심한 것처럼 보았다.” 고전의 권위에 압도되거나 글로만 바라보지 않고 성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이토 진사이의 깊은 안목이 글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이기론과 심성론에서 벗어난 유학

이토 진사이는 단언한다. “도란 완벽하게 바르고 명백해서 알기 쉽고 따르기 쉬우며, 천하와 만세에 두루 통용되며 잠시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즐기기 어려운 것이다. 고원해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며 은미하고 까다로워 알 수 없는 것은 도가 아니다.” 때문에 그는 주자학의 여러 해석에 반대한다. 심성론에 기반한 이기론(理氣論)적 해석, 존천리거인욕(存天理去人慾)과 같이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논리, 어떤 고정된 실체나 진리를 상정한 듯한 본체론적 해석, 이발(已發)이니 미발(未發)이니 하는 사변적인 논의 등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공자와 맹자 시대에는 없던 해석 틀로 후세의 유학자들이 덧씌운 것에 불과하다. 심하게 말하면 때로 그것은 불교와 노장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이야기이다.
가령 주자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해명하면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고 이에 따라 사회와 국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맹자」를 그 기초에 두었다. 성선설을 중심에 놓고 어떻게 하면 때 묻은 인간을 다시 선하게 만들 수 있는지 연구하였고, 따라서 현실성에 바탕한다기보다는 이론적인 정합성을 강조하였다. 이토 진사이는 주자학의 이런 추상화 작업이 「맹자」의 본모습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그는 성선(性善)의 논의 그 자체보다는 인성의 문제가 어떻게 선정(善政)의 문제로 확충할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맹자는 “사람에겐 누구나 차마 해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이를 실천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것이 인(仁)”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 사단의 마음을 확충한다면 비록 그것이 미약할지라도 인의예지의 덕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사이는, 주자학자들은 이와 달리 “오로지 성(性)을 귀하게 여길 줄만 알지 확충 공부가 더 큰 줄은 모른다”며 비판한다.
「맹자」라는 텍스트는 맹자가 동시대의 제자백가들과 논쟁을 벌이며 유학을 통해 정치를 펼치려 노력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유학의 이념이나 논리의 정합성, 경전으로서의 권위, 그런 것이 아니라왕과 제후들과의 문답, 제자들과의 문답, 맹자의 행적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현장 중계 같다. 이때 비로소 「맹자」는 유학 담론으로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현실의 언어로서 읽을 수 있다. 이토 진사이가 주자학 관련 주석을 광범위하게 참조했으면서도 결국에는 갈라지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공자와 맹자가 주장한 인의와 도덕을 추상적이고 심오한 무엇으로 해석하기보다는 현실에 들어맞는 합리적 사상으로 풀어간다는 점.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일본 사상사에서도 특이성을 발현되는 지점이자 유학에 있어서 ‘사고의 혁신’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이토 진사이는 묻는다. 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학자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만민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여는 것에 있음을 그는 「논어고의」와 「맹자고의」를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이 두 저작은 형이상학으로 색칠하지 않고, 현세의 삶을 꾸려가는 사람살이의 방법으로 고전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