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

프리즘 총서 27

찰스 틸리 지음, 지봉근 옮김 | 2018-06-30 | 456쪽 | 29,000원


역사상 존재해 왔던 제국, 도시국가, 도시 연합, 지주 네트워크, 교회, 수도회, 해적 연맹, 전사 집단 등 수많은 통치 형식들을 압도하고 ‘국민국가’가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 찰스 틸리는 990~1990년이라는 1천 년의 시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근원과 역사를 파악하는 한편, 그것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고 전 세계로 확장되어 왔는지를 조망하게 될 것이다. 풍부한 사료, 명석한 분석, 탁월한 안목이 돋보이는 찰스 틸리의 역작. 


저·역자 소개 ▼

저자  찰스 틸리 Charles Tilly
1958년 하버드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델라웨어대학, 하버드대학, 토론토대학, 미시간대학,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현재 컬럼비아대학 사회학과의 조셉 버튼와이져(Joseph L. Buttenwieser)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에 저술한 책으로는 Economic and Political Contention in Comparative Perspective (Maria Kousis와 공동편집, 2005), Trust and Rule (2005), Popular Contention in Great Britain, 1758-1834 (2005), Identities, Boundaries, and Social Ties (2005), Why? (2006), the Oxford Handbook of Contextual Political Analysis (Robert Goodin와 공저, 2006), Contentious Politics (Sidney Tarrow와 공저, 2006), and Regimes and Repertoires (2006) 등이 있다.  

역자  지봉근
중앙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를 받았다. 영문학에서도 V. S. 나이폴(V. S. Naipaul),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 이창래와 같은 이주민 출신 디아스포라 작가들에 주로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하였다. 또한 호미 바바(Homi K. Bhabha)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탈식민 문화이론에 대해 공부하였다. 개인의 정체성 구성 과정은 물론 민족정체성 구성과 같은 집단적 정체성 구성 과정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차례 ▼

서문
1장 _ 세계사에서의 도시와 국가
2장 _ 유럽의 도시와 국가
3장 _ 전쟁이 국가를 만든 방식, 그리고 그 반대의 방식
4장 _ 국가와 시민
5장 _ 국민국가의 계통
6장 _ 유럽의 국가 체제
7장 _ 1992년의 군부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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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는 왜 지배적인 통치 체제가 되었는가?
역사학.정치학.사회학을 넘나들며 국민국가의 기원과 발전을 해부한 역작! 

너무도 당연하게 ‘국민국가’(national state)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국민국가를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온 고정된 정치적 실체로 생각하기 쉽다. 고대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단일 세력에 의해 통치되어 온 한반도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왕정, 공화정, 군부독재, 민주주의처럼 ‘누가 지배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꾸준히 고민해 왔지만 우리에게 ‘국가’란 언제나 국민국가였고 또한 (다소간 헷갈리게) 민족국가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국민적/민족적 정체성’을 유서 깊고 확고부동한 위치에 올려 두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국민국가 이외에도 많은 통치 형식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제국, 도시국가, 도시 연합, 지주 네트워크, 교회, 수도회, 해적 연맹, 전사 집단 등 다양한 유형의 통치체들이 국제 질서에서 역할을 배분받은 행위자로 기능했다. 그들은 “일정 영토 내에서 강제의 주요한 수단들을 통제”했으며 그 영토 내의 모든 “다른 조직들의 행위에 대해서 우선권을 행사”하는 엄연한 주권체였다. 그들은 때로는 지리적으로 중첩되는 가운데 경쟁하고 협력하였고, 그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흥망성쇠를 겪었다. 하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오직 국민국가뿐이다.
찰스 틸리의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은 바로 이 질문, ‘왜 (하필) 국민국가인가’를 묻는 책이다. 국민국가가 위의 같은 수많은 통치 형식들을 압도하고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틸리는 990~1990년이라는 1천 년의 시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아, 그리고 ‘자본과 강제의 역학’이라는 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1990년에 초판을 낸 뒤 소련이 붕괴하자 2년 뒤에 개정판을 내면서 제목의 연도가 1992년으로 수정되었다). 역사학, 정치학, 사회학이 만나는 동시에 풍부한 사료, 명석한 분석, 탁월한 안목이 공존하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국민국가 형성의 근원과 역사를 파악하는 한편, 촘촘하게 얽힌 복잡한 인과관계의 고리를 세심하게 풀어 나가는 거장의 탁월한 솜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국민국가의 강력한 구획과 작동

2018년 현재 유엔 가입국 수는 193개. ‘독립적 주권국가’이자 ‘국민국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국가 수가 (적어도) 193개국이라는 말이다. 틸리의 정의에 의하면 “중앙집권화되고 차별화된 자치 가능한 구조를 방편으로 다양한 인접 지역과 도시를 통치하는 국가” 말이다(19쪽). 지구상에는 수많은 인종과 민족, 문화적 차이가 엄존하지만, 이 차이들 모두는 국민국가의 범주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국경선으로 구획된 국민국가가 세계지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으며, 이 구획은 현실적으로도 강력하게 작동하며 개인의 삶을 규율한다.
국가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개인은 국가에 대한 관념을 일상적으로 매 순간 자각하지는 않는다. 개인은 가족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학교에서 교육받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며 구획된 정체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의 정체성 역시 크게 보면 국가적 범주에서 정교하게 기획/관리되는 제도들(가족, 학교, 행정, 법, 경제, 군대 등) 속에서 구성된다. 개인의 정체성과 삶의 구성 과정에 국가적 범주의 제도가 개입되지 않은 시간과 공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현대의 국민국가들은 ‘도시’와의 경합을 통해 발전해 왔다. 국가 내부에 도시가 포획되어 있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낯설겠지만, ‘자연스러운 삶의 공간’으로서의 마을/도시는 국가와는 다른 결에서 출발한 독자적인 공동체였다. 틸리의 분석에 따르면, 도시는 ‘자본’을 축적?집중함으로써 성장해 나갔고 국가는 ‘강제’를 축적?집중함으로써 발전해 갔다(참고로 이 책의 원제는 ‘강제, 자본, 그리고 유럽 국가’이다). 필연적으로 부딪치고 또 얽혀 드는 양자의 ‘애증 관계’ 속에서 무엇이 어느 정도의 우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발전 경로가 갈렸다. 강제의 축적은 약하지만 집중이 강한 곳에서는 ‘제국’이 출현했고, 반대의 경우 다양한 형태의 ‘주권 분할 체제’가 등장했다. 틸리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이러한 논지를 꼼꼼하게 펼쳐 낸다.


유럽의 경험부터 전 세계적 확장까지

이러한 역사적 분석은 기본적으로 유럽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성립한 국민국가 체제는 이후 여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가히 전 세계를 뒤덮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책의 과정과 결과가 오로지 유럽에 한정된 것이라고 폄하할 수 없다. 따라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머지 대륙들이 그 역사적/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국민국가라는 형식을 일사불란하게 도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찰스 틸리에 의하면 그 핵심에는 ‘전쟁’이 놓여 있다. 전쟁 그 자체가, 그리고 전쟁을 일으키려는(혹은 피하려는) 준비와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민국가가 비유럽으로 확장되는 데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독점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전쟁과 전쟁 준비에 있어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였던 것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전쟁들 속에서 여러 주권체들은 실질적 경쟁력을 확보한 국민국가 형식으로 점차 통합되어 갔다. 효율적이지 못한 제국은 쪼개져 여러 개의 국민국가가 되었고,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는 도시국가는 국민국가에 병합되었다. 실제로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시점으로 일컬어지는 베스트팔렌 조약 자체가 30년전쟁의 종전협상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러한 국민국가의 형식은 근현대 세계사의 정점에서 지배력을 행사한 유럽 국민국가들의 활약을 통해 나머지 세계로 전파?확산된 것이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었고, 국가는 전쟁을 일으키는” 반복 속에서 국민국가의 위상은 독보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지금 다시 국민국가를 생각한다

이 책은 또한 간접 통치가 직접 통치로 전환되는 과정, 용병이 상비군으로 대체되는 과정, 군과 경찰이 분리되는 과정, 조세 담당 기관이 전문화되는 과정 등 국가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사건과 경향을 치밀하게 그려 낸다. 분석의 대상이 되는 지리적 공간과 정치체 또한 다양하다. 일찍이 강력한 국민국가를 형성해 갔던 프랑스, 아일랜드 등의 지역을 통합하는 데 분투해야 했던 영국, 신성로마제국과 프로이센의 흔적에서 탄생한 독일을 비롯하여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서유럽은 물론이거니와 동유럽과 북유럽을 점유했던 여러 주권 형식들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군부 독재를 다룬 7장에서 그 분석의 범위는 아프리카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까지 이른다. 정치체의 형식에 있어서도 오스만제국(제국), 베네치아나 피렌체(도시국가), 부르고뉴나 보헤미아(공국), 튜튼기사단 등을 아우른다. 이렇게 넓고 다양한 범위를 다루면서도 분석의 집중력을 잃지 않고 논지를 다져 가는 틸리의 전개가 일품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국민이라는 자격 조건’에 대해 배타성이 강화되고 있다. 다른 인종, 종교, 민족의 스테레오타입에 기반한 혐오 발언이 넘쳐흐르며 국가/민족의 순수성 혹은 안전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이것들이 정당화 혹은 강화되고 있다. 이는 올림픽이나 월드컵처럼 국민정체성을 강화하는 ‘대리 전쟁’을 통해서도 쉽사리 봉합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과 ‘국민국가’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시 꺼내들어 치밀하게 사유해 보는 것은 어쩌면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국가와 민족과 국민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공동체’가 아니며 국가 구성 과정이 폭력성과 강제성을 내재하고 있음을 명료한 통찰력으로 보여 준 이 책은 국민국가 ‘이후’의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는 데에도 필시 유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