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저널리즘 동아시아의 문화지정학  

아이아 총서 003

마루카와 데쓰시 지음, 백지운·윤여일 옮김 | 2008-09-25 | 216쪽 | 15,900원


푸코, 브로델, 알튀세르, 사이드 등의 서구사상을 참조하여 구성한‘리저널리즘’(Regionalism)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근대 이래 일본의 주체형성과성을 살피고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와 정치를 고찰한다. 메이지유신부터 냉전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적대성’에 기반해 ‘동아시아’라는 ‘지역감각’을 형성해 왔다.
‘동아시아’라는 지역개념이 서구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아시아’라는 지역 체계는 19세기 서구열강의 도래에 의해 강요된 식민화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형성되었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사정은 더 복잡했는데, 바로 근대화의 우등생으로 일찌감치 서구열강의 일원이 되어 버린 일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형 근대화에 가장 먼저 적응한 일본은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그들을 멸시하면서 특유의 ‘동아시아’라는 지역감각을 익히게 되었고, 이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식민화를 자행하게 되었다.


저·역자소개 ▼

지은이  마루카와 데쓰시 丸川哲史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조교수. 저서로 《냉전문화론》, 《리저널리즘》 등이 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에 관한 책으로 《다케우치 요시미-아시아와의 만남》을 썼다.


옮긴이  백지운
연세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근대성 담론을 통한 량 치차오 계몽사상 재고찰」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게이오대, 중국 칭화대, 대만 둥하이대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창작과비평』 『역사비평』 『人間思想』 Inter-Asia Cultural Studies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탈/냉전의 맥락에서 현대 중국의 사상 문화 지식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공편저로 『양안에서 통일과 평화를 생각하다』 『중국 일상 속 북한 이미지』, 공저로 『중국과 비중국 그리고 인터 차이나』 『아시아의 20세기 지역변동과 지역상상』 등, 역서로 『열렬한 책읽기』 『위미』 『시간』 『귀거래』 『혁명후/기』 등이 있다.


옮긴이  윤여일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로 베이징에서, 도시샤대학 객원연구원으로 교토에서 체류했다.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 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로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물음을 위한 물음』, 『광장이 되는 시간』, 『사상의 원점』, 『사상의 번역』, 『동아시아 담론』, 『지식의 윤리성에 관한 다섯 편의 에세이』, 『상황적 사고』, 『여행의 사고』(전3권)를 쓰고, 대담집 『사상을 잇다』를 펴냈으며,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전2권),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다케우치 요시미―어느 방법의 전기』, 『루쉰 잡기』, 『사상이 살아가는 법』, 『일본 이데올로기』, 『조선과 일본에 살다』, 『재일의 틈새에서』, 『사상으로서의 3·11』, 『사회를 넘어선 사회학』을 옮겼다. 지키는 연구를 하고 싶다. 

차례 ▼

한국어판 서문
들어가며

1부 방법으로서의 ‘리저널리즘’
1장_개념 및 문제 설정
‘리저널리즘’,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역사에 ‘공간’ 도입하기│유럽―세계사를 상대화하다
2장_전쟁, 혁명, 식민지
공간혁명│‘진보’의 바깥으로│표상의 지배, 공간의 분할
소결_지역적인 것의 재편성

2부 원한에 맺힌 지역 ― 일본과 아시아
1장_일본과 아시아의 현재성을 규정하는 것들
일본인에게 보이지 않는 ‘아시아’│전전(戰前) 일본의 공간인식│전후 일본의 ‘독립’과 ‘종속’│냉전체제와 포스트워/포스트콜로니얼의 상황
2장_여백의 아시아, 귀환하는 아시아
‘전후’의 동아시아│냉전/탈냉전│동아시아의 현재성│지역적인 것과 책임의식

3부 동아시아, 유동하는 역사의 자장
1장_‘일중전쟁’이라는 문화공간―저우쭤런(周作人)과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
들어가며│만남과 엇갈림│저우쭤런의 사상전략│베이징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행동과 사상│좌절 저편에 있는 것
2장_왕복하는 ‘눈’ 혹은 ‘냉전’ 여행―뤼다오에서 베이징으로
시작하며―도깨비 깃발│뤼다오에서│대만의 사회주의자│베이징에서│결론을 대신하여―동아시아의 심정지도를 찾아
3장_한국전쟁으로 돌아가라!―제2차 한국전쟁과 ‘핵’에서 벗어나는 힘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서│한국전쟁의 사이클│중국의 핵실험에서│‘핵’과 국가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문을 대신하여―겁쟁이들

서장 _ 예감이라는 문제
1_앙금
2_예감하다
3_다시 이하 후유로

1장 _ 증후학(症候學)
1_점령과 등기(登記)
2_일본인종론
3_‘미개’의 개량·재정의
4_하수도

2장 _ 내세우는 자
1_점령
2_관찰·교도·폭력
3_내세우는 자
4_아넷타이/아열대

3장 _ 공동체와 노동력
1_열대과학
2_공동체와 노동력
3_노동력의 낭비
4_히노마루 깃발 아래서

4장 _ 출향자의 꿈
1_노동력으로서의 경험
2_류큐의 바다/대동아의 바다
3_자치

종장 _ 신청하는 자
1_법과 폭력
2_위기와 구제
3_계속되는 위기

후기
옮긴이 후기

 

편집자 추천글 ▼

이 책은 ‘리저널리즘’(Regionalism)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근대 이래 일본의 주체형성과성을 살핀다. 저자는 일국의 차원을 넘어 지역적 유동성과 역사적 구조를 살펴보기 위한 틀로 ‘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을 구성한다. 푸코, 브로델, 알튀세르, 사이드 등의 서구사상을 참조하여 구성한 이 방법론을 통해 저자는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와 정치를 고찰한다. 메이지유신부터 냉전시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적대성’에 기반해 ‘동아시아’라는 ‘지역감각’을 형성해 왔다고 분석한다. 이렇듯 적대성에 기반해 구축된 일본의 주체성을 해체하기 위해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 등의 전후 일본사상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조선,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전후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미완의 시도들을 복원해 내고자 한다.

‘리저널리즘’, 동아시아의 공존과 평화구축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
일본의 주체형성과정을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와 정치를 다시 묻는다!


<리저널리즘―동아시아의 문화지정학>은 ‘리저널리즘’(Regionalism)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근대 이후 일본과 동아시아의 역사·정치적 궤적을 살피고 있는 책이다. ‘리저널리즘’이라는 용어는 주로 근대정치학에서 국가 내부의 지역분권제를 거론할 때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역주의’라는 용어는 흔히 경상도와 전라도의 지역갈등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 책 <리저널리즘>의 저자 마루카와 데쓰시(丸川哲史)는 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지금까지의 역사서술이 일국(一國)의 국사나 국가간 외교사를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면, ‘리저널리즘’은 국민국가라는 틀을 넘어 ‘지역적 유동성’을 전제로 삼는 공간에 대한 감각을 말한다. 동시에 오늘날의 국제관계나 국제정치학에서 무시되곤 하는 역사적 구조, 즉 지역 내 국가나 세력 간에 역사적으로 누적된 구조적 연관성을 찾아내는 ‘역사감각’을 저자는 ‘리저널리즘’이라고 규정한다. 바로 이 틀을 통해서 저자는 근대부터 탈냉전 시대까지의 ‘동아시아’를 새롭게 사유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동아시아’라는 지역개념이 서구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고 말한다. 근대 이전의 유교·한자 문화권이나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공책봉체제 등을 ‘동아시아’의 모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동아시아’라는 지역 체계는 19세기 서구열강의 도래에 의해 강요된 식민화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사정은 더 복잡했는데, 바로 근대화의 우등생으로 일찌감치 서구열강의 일원이 되어 버린 일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유럽형 근대화에 가장 먼저 적응한 일본은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그들을 멸시하면서 특유의 ‘동아시아’라는 지역감각을 익히게 되었고, 이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식민화를 자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눈으로 아시아의 과거·현재·미래의 쟁점들을 살피는 ‘아이아 총서’의 세번째 책인 이 책은 ‘동아시아’라는 지역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형성된 일본의 주체성이 냉전을 거쳐 오늘날 탈냉전의 동아시아 질서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적대성에 기반해 구축된 일본의 주체성을 해체하기 위해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등의 전후 일본사상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조선,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일본의 전후사상을 수립하고자 했던 미완의 시도들을 복원해 내고자 한다.


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 동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지역감각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마루카와 데쓰시의 역사·지정학적 분석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을 그 토대로 삼고 있다. 서구에서는 국민국가체제 성립 이후의 국사와 외교사로 역사서술의 대부분이 이루어진 데 대한 불만이 20세기 중반부터 드러나기 시작했고, 곧 국민국가-국가간체제를 전제로 유럽 근대사를 서술해 온 그간의 방식이 무엇을 누락하고 있었는지를 추궁하는 움직임들이 등장했다. 저자가 ‘리저널리즘’이라는 방법론을 설정하기 위해 참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움직임들이다. 이 책 1부에서 저자는 미셸 푸코, 페르낭 브로델, 사미르 아민, 루이 알튀세르, 카를 슈미트, 에드워드 사이드 등 역사에 공간을 도입하고, 서구/비서구라는 담론편제에 주목했던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 지역적인 유동성과 중층적인 역사구조를 전제하는 지역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모색에도 모순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분석을 위한 이론적 장치를 서양에서 들여왔지만, 분석의 대상은 ‘우리’라는 분열상태가 그것이다. 오늘날 어떤 대상이나 사건을 깊이 관찰하고자 할 때 서양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동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구에 의해 ‘발견’된 동시에, 그 서구의 틀에 따라 구성되고 상상된 것이 ‘동아시아’ 그리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라는 주체성을 반성하고 새롭게 구축하기 위해서 서구의 이론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하지만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서양적인 것에 저항한다 함은 서양이 만든 것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틀을 흔드는 일’이다. 유럽에서 전세계로 퍼진 국민국가라는 틀을 흔들기 위해 ‘리저널리즘’을 가동하는 저자의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동아시아에서도, 탈냉전 이후 특히 일본의 국민국가론을 중심으로 이미 국민국가의 경계를 해체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근대화와 냉전구조 속에서 고착되어 자명한 것이 되어 버린 우리의 주체성. 즉 국민, 국어, 국문학, 국민 문화, 국사 등, 우리의 자아정체성을 구성하고 상상해 온 개념범주들을 해체하는 다양한 작업들이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책의 옮긴이인 백지운의 지적처럼, 이런 ‘국민국가론’은 그것이 무엇을 위한 해체인지를 전제하지 못한다면 네거티브담론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그런 해체가 타자에 대한 참조 없이 일국적 차원에서 이뤄진다면 자폐적인 반성에 머무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리저널리즘’은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지역감각을 구축하기 위한 중요한 범주로 자리매김된다. 일본제국주의와 냉전이라는 역사적 조건으로 인해 ‘적대’와 ‘무시’가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한 감각구조가 되어 왔다면, 자아와 타자 간의 거리 및 관계에 대한 관념·감각·경험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영토’를 탐색하는 ‘리저널리즘’은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편협한 주체성을 반성하는 새로운 지역감각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일본 주체성 형성의 궤적

동아시아에는 많은 현안들이 존재한다. 북핵을 둘러싼 6자회담과 대북지원 문제, 한일·중일 간 영토 분쟁, 탈북자 문제, 납북자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새역모’ 교과서, 종군위안부 배상 문제 등. 여기에 동아시아와 깊은 관련을 맺어온 미국과 러시아를 덧붙인다면, 동아시아를 둘러싼 현안들은 가히 범지구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저자는 이렇게 동아시아의 현재를 구성하는 여러 문제들이 일국이나 양국 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또한 이 문제들이 역사적 지층을 갖는다는 점에 주목한다. 서구열강의 도래와 일본의 근대화,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침략과 냉전구조라는 역사적 지층들 속으로 동아시아 각국은 휩쓸려 들어갔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서로에 대한 감각의 차이가 현재의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아시아에 대한 적대감 속에서 형성된 일본의 주체성을 중심으로 이 역사적 지층들을 탐사하고 있다.

▶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대아시아 확장주의
저자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보다 먼저 중국이 반(半)식민화의 길을 걸어야 했던 지정학적 우연이 이후 동아시아 질서의 큰 틀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19세기 전반, 특히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세계자본주의의 주변으로 편입되어야 했지만, 일본은 지정학적·역사적 우연으로 인해 그 과정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우연을 움켜쥐고, 일본은 근대화를 추진하고, 중국의 반식민화를 중화문명의 후진성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저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명론의 개략>에서 드러난 세계/아시아관(觀)을 통해 당시 일본의 지역감각을 분석한다. <문명론의 개략>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 ‘반개’, ‘미개’라는 위계질서를 세우고 중국을 ‘반개’로 분류한다. 따라서 일본이 근대적 자립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개’의 유교문화와 결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후쿠자와의 이런 주장에서 드러나는 일본의 지역감각이 바로 1871년 일청수호조약부터 ‘대동아공영권’을 천명하며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의 대아시아 확장주의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성립
일본의 종전은 동맹국이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종전과 성격이 달랐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죽음으로 종전을 맞이한 동맹국들과는 달리, 종전을 선언하는 주체가 애당초 개전을 포고했던 주체와 동일하다는 점에서 일본의 ‘국체’(國體)가 보호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 각국이 ‘전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감각의 차이를 서술한다. 일본의 종전은 한반도에는 ‘해방’으로, 대만에는 조국으로의 귀환을 뜻하는 ‘광복’으로, 중국에는 항일전쟁의 ‘승리’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진행된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구축 과정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감각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중국과 한국이 냉전구조 속에서 전쟁과 분단의 한가운데로 휩쓸려 들어갔다면, 일본은 그 냉전구조를 이용해 전후부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신중국 성립과 한국전쟁에 놀란 미국이 동아시아 내셔널리즘을 키우려는 애당초의 계획을 일본 중심의 ‘대동아’ 경제지역주의를 허용하는 쪽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런 미국의 기조 속에서 일본은 전후부흥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전후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으로 어려움을 겪던 일본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를 부활시킬 수 있었고, 배상문제를 등진 채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를 통해 국제사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전후의 구조가 일본인들의 정신적 상태에 끼친 영향을 전후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논의를 중심으로 살핀다. 특히 전후 일본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일으키려 했던 마루야마의 논의에서 식민제국이라는 일본의 과거가 소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마루야마뿐만이 아니라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전후사상들이 과거 식민지 지역을 간과함으로써 일본국민을 새롭게 일으킬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이다.

▶냉전/탈냉전 시대 일본과 동아시아
이렇게 일본의 종전과 동시에 형성된 동아시아 냉전구조는 ‘탈냉전’이 이야기되고 있는 오늘날까지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저자는 동아시아의 냉전구조가 유럽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럽의 냉전이 중국내전이나 한국전쟁 같은 대규모 인명피해를 낳지 않았다는 점, 또 서유럽이 지역적 통합을 이루었던 반면 동아시아는 대체로 그러지 못했다는 점 등에서 냉전시기 두 지역의 차이는 분명해 보인다.
특히 중국과 대만, 남한과 북한이 냉전구조를 규정하는 군사체제에 강고하게 얽매여 있었던 반면, 일본만은 ‘평화’와 ‘민주주의’라는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다는 점은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중요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평화 속에서 일본은 식민화와 전쟁의 경험을 모두 사장한 채, 중국과 북한을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남한·대만과는 일화평화조약과 한일기본조약으로 배상문제를 무화(無化)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전후부흥’을 이뤄 냈다는 안도감과 냉전구조에 깊이 가담해 있지 않다는 무의식 속에서 전후 일본은 스스로를 우물에 가두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일본과 아시아 각 지역 사이의 역사적·심리적 낙차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바로 이런 낙차가 1980년대 말 세계적 조류였던 탈냉전화가 동아시아에서 본격화되지 않은 이유이며, 영토분쟁이나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와 같은 현재의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냉전구조의 바깥으로 나가려 했던 여러 지식인들의 사상실천을 살피고 있다. 우선 저자는 1950년대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정학적 시도들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있다. 이 학문적 시도들은 대부분 환태평양 시대에 일본의 번영을 고민한 것들이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시도들이 결국 ‘대동아공영권’의 지정도를 전후 미국의 반공방위라인으로 재편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반면 이런 지정학적 시도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중국관과 다니가와 간(谷川雁)의 조선관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화의 경험을 직시·반성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지역감각을 구성하려 했던 다케우치 요시미. 그리고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를 통해 사상과 운동을 결합시키려 했던 다니가와 간은 ‘적대성’을 망각하고자 하면서 더 뿌리깊은 적대성을 안고 있는 일본에 대해 많은 참조점을 던져 주고 있다는 것이다.


공존과 평화의 동아시아를 위하여

이 책 3부는 본래 일본어판에는 실리지 않은 저자의 최근 논문 세 편을 엮어 구성했다. 각각 2006~7년 사이에 발표된 논문들로, 이 논문들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상호이해와 공존의 문화·역사지정학을 고민하고 있는 저자의 최근 논의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이 책의 2부에서 일본의 주체형성 과정을 중심에 놓고 동아시아를 고찰했다면, 3부의 이 글들은 각각 중일관계, 대만과 중국 양안관계, 북핵에 대한 각국의 입장을 고찰함으로써, 더 지역적인(Regional) 논의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중에서도 북핵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국전쟁으로 돌아가라!―제2차 한국전쟁과 ‘핵’에서 벗어나는 힘」은 특히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한의 핵시설 복구 선언으로 북핵사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북한의 핵문제를 일국적 차원에서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해 보인다. 이미 ‘6자회담’이라는 틀이 이 문제의 지역적인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거니와, 저자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북핵문제가 단지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원폭공격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 <리저널리즘>이 전개하고 있는 논의는 단지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탈냉전과 ‘지구화’로 인해 타자와의 접촉이 더 잦아진 오늘날, 남한에 강하게 온존하고 있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애정과 불신, 일본에 대한 선망과 증오, 중국에 대한 멸시와 두려움 등. 남한이 동아시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역감각이 복합적이라는 사실도 우리가 <리저널리즘>의 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다케우치 요시미의 어법을 빌려 말한, ‘가해자의 입장을 회피하는 행위야말로 가해에 가담하는 것’이라는 문장은 꼭 새겨 두어야 할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동아시아라는 관계망 속에서 공존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역사와 타자를 직시하고 올바로 이해할 필요성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