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를 읽는다 / 바울을 생각한다  정치적 우상의 신학적 기원

클리나멘 총서 010

테드 W. 제닝스  지음, 박성훈 옮김 | 2014-04-30  | 400쪽 | 27,000원


'클리나멘 총서'의 10번째 책. 스무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성을 띤 사유의 마주침을 보여 주는 사상가로서 데리다와 바울을 ‘새롭게’ 소개한다. 데리다와 바울의 마주침을 주선하기 위해, 저자는 이들의 사유로부터 ‘(율)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소환해 내며, 이들을 (율)법 ‘너머’의 정의를 사유한 사상가로서 그려 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모두 ‘정의’라는 주제와는 동떨어진 사유를 했다는 오해를 받아 왔었다. 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사유를 병치하는 이 ‘사고실험’은 이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고 이들 사유의 급진성을 재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하게 된다.
저자 테드 제닝스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침묵하고, 권력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 온 복음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써 온 신학자로, 퀴어신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사적인 믿음과 구원에 천착해 있던 복음의 메시지를 다시 ‘정의’라는 주제로 되돌려 놓는 저자의 기획의 일환으로, 철학과 신학 모두를 풍부화하고 보완할 수 있는 ‘겹쳐 읽기’의 모범적인 한 예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저·역자소개 ▼

지은이  테드 W. 제닝스 Theodore w. Jennings 
시카고 신학교Chicago Theological Seminary 교수로 성서신학 및 구성신학을 가르쳤다. 듀크 대학교를 졸업하고 에모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학 이론가이자 성서학자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들을 해방신학적으로 재해석하는 데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했고, 성 소수자 문제를 다루는 퀴어 신학자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예수가 사랑한 남자: 신약성서의 동성애 이야기』The Man Jesus Loved: Homoerotic Narratives from the New Testament,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Reading Derrida/Thinking Paul, 『속죄의 전환: 십자가의 정치신학』Transforming Atonement: A Political Theology of the Cross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지은이  박성훈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철학 및 신학 관련 전문번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의 『세계의 논리』(근간)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 『수학 예찬』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등과 피터 홀워드의 『알랭 바디우』, 테드 W. 제닝스의 『무법적 정의: 바울의 메시아 정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공역) 등 여러 책을 번역했다. 
차례 ▼

서문

1장 서론
공중 앞에 선 바울
인문학적인 읽기 | 정의(의로움이 아닌) |
내면적/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것 | 유대인과 이방인
왜 데리다인가?
데리다와 정의의 문제 | 데리다 그리고 바울의 문제 |
니체, 데리다, 그리고 바울

2장 법 너머의 정의
(율)법의 탈-정당화로서의 서사
「법 앞에서」 | 법의 상대화
데리다, 법과 정의에 대하여
해체와 정의/정의로서의 해체 | 정의와 법의 불안정한 구분 |
정의와 법의 상호작용 | 법(들)과 권리(들) |
보복적 정의 그리고 분배적 정의를 넘어서 | 환대의 법(들) | 종말론적 정의
바울과 탈-법적 정의
신적인 정의 | 정의 대 (율)법 | 모세와 로마 | (율)법의 필연성 |
(율)법의 불안정성 | (율)법과 육신 | 정의 그리고 분배적/보복적 정의 |
정의의 미래

3장 힘, 폭력 그리고 십자가
데리다
발터의 마지막 이름
바울과 십자가
약한 그리고 강한
권위

4장 선물로서의 정의
데리다 사유에서 제시되는 선물과 부채
정의에 대한 [선물의] 관계 | 선물의 불가능성 | ‘기독교적 의미의’ 선물
바울과 은혜
은혜와 선물 | 은혜와 정의 | 은혜 대 (율)법 |
부채/행위에 외부적인 것으로서의 은혜 | 구별의 불안정성 |
얼마나 더 많이 | 지식의 너머 | 사건

5장 부채를 넘어선 의무 그리고/또는 믿음의 순종
부채를 넘어선 의무
(다시) 불가능한 것 | 사랑의 문제
믿음의 순종

6장 환대, 윤리, 그리고 정치
데리다, 환대에 관해서
바울에게 있어서의 환영
아브라함 | 환영 | 메시아의 환영
코스모폴리타니즘
정치적인 것

7장 용서
데리다: 용서에 관하여
용서와 그 아포리아 | 용서와 선물 | 용서와 법
바울: ‘사면’에 관해서
용서 그리고/또는 축복 | 자비로움 그리고/또는 용서 |
용서할 수 없는 그리고 무조건적인 | 이중 구속 | 이중적 용서 |
정치적 효과들

8장 결론
해체에 대한 믿음
추가적인 고찰을 위해
협상에 나선 바울 | 메시아성과 메시아 | 신의 문제
‘기독교 철학자’로서의 데리다

참고문헌 | 옮긴이 해제 | 찾아보기
 


편집자 추천글 ▼

법 ‘너머’의 정의를 사유하는 두 사상가의 마주침!
문제적 신학자 테드 제닝스의 시선을 통해 회복하는
데리다와 바울의 급진성!


이 책은 스무 세기에 가까운 시간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성을 띤 사유의 마주침을 보여 주는 사상가로서 데리다와 바울을 ‘새롭게’ 소개한다. 사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지형에서 읽혀 왔기에, 이들 간의 연관성을 유추하고 사유하기란 얼핏 쉽지 않아 보인다. 더욱이 발터 벤야민, 알랭 바디우, 야콥 타우베스 등 바울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던 철학자들과는 달리, 데리다는 그의 저작들 내에서 단편적으로 바울을 인용하고 해석해 왔기에 이러한 어려움은 더해 보인다. 데리다와 바울의 마주침을 주선하기 위해, 저자는 이들의 사유로부터 ‘(율)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소환해 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모두 ‘정의’라는 주제와는 동떨어진 사유를 했다는 오해를 받아 왔었다. 바울은 오랜 세월 교회라는 폐쇄적 공간에 갇혀 (율)법을 부정하고 믿음을 통한 무조건적인 용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한 자로 읽혀 왔으며, 데리다는 절대성을 침식시키는 해체적 사유로 인해 ‘상대주의자’, 윤리와 정치를 배제한 ‘허무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그렇기에 법과 정의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사유를 병치하는 이 ‘사고실험’은 이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고 이들 사유의 급진성을 재조명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하게 된다.
데리다와 바울이 사유하는 ‘(율)법과 정의의 대립’이라는 주제는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주제이다. 자본과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 그에 맞서 정의를 요구하다가 가혹한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그러한 주제를 시시때때로 생각하게 되며, 오히려 법에 충실할수록 정의를 배신하게 되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정의가 법의 외부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실현을 위해 법의 힘을 필요로 하는 모순적 상황 속에서, 데리다와 바울은 ‘진정한 정의’를 사유하며 새로운 형태의 규범 및 정치적 공동체에 대해 고민한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제닝스는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침묵하고, 권력에 봉사하기 위한 도구로 쓰여 온 복음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써 온 신학자로, 퀴어신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린비출판사의 클리나멘 총서 10번째 책으로 기획된 이 책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는 사적인 믿음과 구원에 천착해 있던 복음의 메시지를 다시 ‘정의’라는 주제로 되돌려 놓는 저자의 기획의 일환으로, 철학과 신학 모두를 풍부화하고 보완할 수 있는 ‘겹쳐 읽기’의 모범적인 한 예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무엇보다 이 책은 정의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의 조건들 속에서도 계속해서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정해진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정의란 무엇인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난관을 견뎌야 함을, 데리다와 바울의 ‘아포리아적 사유’를 통해 우리 앞에 직접 보여 줄 것이다.

바울과 데리다에 대한 어떤 오해

바울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읽기는 전반적으로 교의적인 이해관계에 한정된 고백적인/교회적인 게토 내에 감금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정의(justice)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내적인 또는 개인적인 올바름(의로움, righteousness)의 문제로 전환되었다. …… 데리다 역시 어떤 오해를 받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사유가 윤리적, 사회정치적 ‘규범들’을 허무주의적으로 적출함으로써 로마서 독해를 윤리나 정의의 문제와 무관하게 만들어 버리는 비평가들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제닝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해석 방식을 따르는 바울 해석의 전통이 지금껏 바울의 주된 문제의식을 희석해 왔다고 주장한다. ‘정의’의 의미를 ‘개인적 올바름’으로 전환한 이들의 오독은, 바울의 신학을 ‘국가에 부역하는 보수적 교회의 신학’으로 전락시키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맞서 제닝스는 바울을 제국과 문명에 맞서 정의를 주장한 사상가로서 읽는 현대철학자들의 입장을 불러와 바울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려 한다. 이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정의는 (율)법 없이 성취되었다”는 바울의 메시지가 유대교 율법뿐 아니라 (로마)제국의 법을 겨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전례 없는 혁명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데리다 역시 그의 추종자 혹은 적들로부터 오해받아 오기는 마찬가지였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열띤 투쟁, 프랑스 내 이주 및 사면의 문제 등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참여해 왔으며, 후기 사유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에 대한 사유를 보여 주었음에도, 데리다는 ‘해체’라는 방법론 때문에 윤리적, 정치적 문제를 사유에서 배제시켜 왔다고 인식되어 왔다. 때문에 이 책의 저자는 곳곳에서 정의를 사유하기 위해 왜 해체의 작업을 거쳐야 하는지를, ‘해체는 곧 정의다’라는 데리다의 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역설하며, 법에 균열을 내고 해체함으로써 정의의 요청이 우리 앞에 더 잘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낸다.

법과 정의의 대립에 대한 사유

정의는 법에 대해 이질적이지만 너무나 법에 가깝고, 실제로는 그것으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 자크 데리다, 『환대에 대하여』


저자는 데리다와 바울에게 있어 주된 주제로 다시 소환된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논의의 방향을 전환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 법과 정의의 대립에 대해 사유했지만, 공통적으로 법과 정의가 분리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말했음에 주목한다. 정의가 사회적 질서에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는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면, 정의에 대한 책임은 사변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견해로 남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은 폐기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거룩하고, (정)의로우며, 선한 것”이라는 양가적인 말을 통해 이러한 관계를 사유했고, 데리다 역시 “법은 정의가 아니”지만 정의가 법의 힘을 빌려 실현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를테면 이주 노동자들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정의가 한 축으로 있다면, 이를 법으로 제정하는 노력이 다른 한 축으로 있어야 하고, 이를 구체적인 법 조항들(법들)로 구체화하는 노력 또한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바울과 데리다는, 법의 폭력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정의가 법의 너머에 있다는 인식을 공유한다. 데리다는 폭력에 대한 벤야민의 고찰(정초적 폭력, 보존적 폭력)을 통해 법의 폭력성을 인식하는데, 데리다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법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을 ‘폭력’이라 규정하는 어떤 독점을 발견한다(이러한 예는 어떤 법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너무나도 쉽게 ‘테러리스트’라는 명명이 이루어지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에 대한 저항을 통해 사법적 질서 자체의 폭력을 폭로하는 ‘위대한 범죄자’의 형상은 이러한 폭력 인식에 기반한다. 바울의 경우 예수의 십자가형이라는 사건을 통해 법의 폭력을 발견한다.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 예수는 적극적으로 법 바깥에 서 있으며 십자가형을 통해 법의 부당한 폭력을 폭로했던 이로, 벤야민의 개념을 따르자면 ‘위대한 범죄자’이다. 심지어 그는 십자가형으로부터 부활해 죽음의 체제와 (율)법으로부터 인간의 약함을 변호하는 ‘위대한 변호사’로서, 법의 판단 능력에 도전하는 자로 형상화된다. ‘폭력’에 대한 이들의 사유는, (메시아적) 정의가 메시아 예수의 십자가형, 법적 질서 앞에서 드러나는 무력함에서 나타난다는 깨달음, 즉 정의가 법 ‘너머’에 있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분배와 교환, 보복을 넘어서: 선물로서의 정의


그렇다면 바울과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의 모습이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정의는 법의 바깥, 법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교환과 순환의 법 질서 바깥에 존재하게 된다. 바울과 데리다의 정의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는 보복적/보상적 정의가 아니며, 심지어 분배적 정의도 아니다.
제닝스는 이런 맥락에서 교환의 질서 바깥의 정의를 사유하기 위해 데리다의 (교환이 아닌) ‘선물’이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그러나 데리다에게 ‘선물’은 자기만족이라는 보상이 따르게 된다면 다시 교환의 질서 속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선물의 불가능성’을 사유하면서, 은혜와 선물의 넘쳐남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측정을 넘어선 ‘초과’만이 경제적 질서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를 ‘부채를 넘어서는 의무’라고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누구에게도 아무것도 빚지지 않”는 그리고 “율법을 완성하”는 이웃 사랑에 대해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

정의란 어떻게 가능한가: 환대(hospitality)와 용서(par-don)

그러나 경제적, 법적 질서를 중단시키는 선물과 은혜를 그 자체로 ‘정의’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앞서 정의가 법을 통하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다고 인식한 바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추구하는(‘메시아를 따르는’), 정의에 충실한 자들의 공동체는 ‘새로운 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법은 이전의 (율)법과는 다른 범주에 속한 새로운 법이어야 한다. 이 책은 데리다의 ‘부채를 넘어선 의무’와, 바울의 ‘믿음의 순종’, ‘메시아의 법’이라는 주제들에 주목한다.
바울에게 있어, 이러한 새로운 규범으로 매개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신에 돌리지 않고 이웃 사랑으로 전환시키라는 예수의 메시지를 강조함으로써, 바울은 사랑이 경제의 법 안으로 순환되는 것을 중단한다. 데리다가 그의 후기 사유에서 강조하는 ‘환대’라는 주제 역시 경제를 중단하는 것으로, 그는 이주노동자와 난민에 대한 유럽의 폐쇄성에 맞서 싸움에 있어 이 주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데리다의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시민주의)’은 메시아의 환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바울이 지향하는 공동체와 공명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환대의 법을 전적으로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데리다의 깨달음처럼, 우리는 한 사람의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다른 타자의 요구를 들어 줄 수 없는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이중적인 구속의 상황은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내가 원치 않는 악한 것을 행하”고 있다는 바울의 탄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적인 정의에 충실한 자들이 도리어 불의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데리다와 바울은 ‘용서’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이 용서는 불의한 과거와의 중단을 통해 미래를 여는데, 이렇게 열린 공간은 정의의 공간이며, 다시금 정의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 속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준다. 새롭게 열린 정의의 공간은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의 공간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는 그간 교회 안에서 개인화되어 왔던 ‘용서’의 오독을 개정하여 ‘정의’의 문제를 다시금 복음의 주요한 메시지로 전면화한다.
앞서 살펴보았듯, 이 책은 구체적인 정의, 지금 여기서 명확한 언어로 답변이 가능한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불의하지 않은 것을 열거하는 방식으로 어렴풋하게 정의의 윤곽만을 그려낼 수 있게 할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정의가 법적인 방식으로 구현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새로운 제도와 법에 의해 구현되어야만 한다는 점이, 오로지 어떤 사건을 믿는 주체를 통해 실험적으로 시도될 수밖에 없는 결정을 전제한다는 점이, 그리고 그러한 실험적 결정에 의해 구현될 정의가 결코 유한하게 닫힌 것이 아닌 무한을 향해 열려 있다는 점이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 의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데리다와 바울의 사유를 통하여 ‘정의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로 갱신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