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와 광기 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

클리나멘 총서 005

이수영 지음 | 2008-08-30  | 296쪽 | 18,900원


섹슈얼리티와 광기에 관한 푸코의 철학적 담론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이 되는 1920년대 소설을 새롭게 조망한다.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현진건 등의 20년대 한국 자연주의 문학 역시 성적 욕망과 분열증, 편집증, 관음증 등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병리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푸코의 이론적 틀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진실을 파고드는 1920년대 한국 소설의 고유한 가치를 재조명한다.


저·역자소개 ▼

지은이  이수영
철학연구자 겸 번역가. 제도 바깥에서 자유로운 공부를 하고 싶어 연구자들의 공동체 <수유너머>에 있었고, 현장에서의 활동을 위해 <수유너머 길>을 꾸렸으며, 철학에 집중하기 위해 잠시 혼자서 프리랜서의 삶을 살았으나 혼자 살기의 어려움을 깊이 깨닫고, 현재는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의 도움에 의지해 함께 공부하고 운동하고 강의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섹슈얼리티와 광기』, 『미래를 창조하는 나』, 『권력이란 무엇인가』,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순수이성비판 강의』, 『실천이성비판 강의』가 있고, 옮긴 책으로는 『요하네스버그의 천사들』이 있다.
차례 ▼

머리말

1장_ 근대문학의 계보학
1. 병리성이라는 사건
2. 근대문학의 기원과 계보학
3. 1920년대라는 에피스테메
4. 병리성의 의미

2장_국가의 공리계에서 문학의 공리계로
1. 건강의 정치학과 진실의 담론
2. 자연주의와 근대문학의 본질

3장_병리적 주체의 형식과 인간의 잠재적 본성
1. 새로운 등장인물의 출현

2. 상처받은 히스테리적 주체의 환각적 자기 연출
과거의 탐색과 희생자 환상│거세된 아이와 환상화된 세계│폐쇄된 자기의식과 유아적 나르시시즘│불감증의 남성과 근원적 위선│금욕적 여성과 연극적 궁지│유혹의 놀이와 책임 주체의 소멸│근친적 욕망과 모성적 퇴로

3. 강박증적 주체와 거부된 향락
성충동의 표현과 도덕적 감수성의 새로운 분할 │임질의 공포와 근대적 가족 윤리의 형성│강박적 순결과 죄의식의 선험성│육체의 포기와 숭고한 정신주의│강박적 주체와 광인의 만남

4. 망상과 광기 그리고 도착의 세계
처벌의 망상과 피해의 망상│광기의 심각성과 주체의 진실│관음증적 주체와 앎의 의지

4장_ 문학담론의 규칙과 고백의 절차들
1. 근대문학의 본질로서의 고백체
문학의 원리와 고백의 형식│고백의 구조와 진실성의 효과

2. 고백의 요청과 주체의 분할
계몽의 교사와 실천적 정언명령│불가해한 욕망의 물음과 정신분석적 진술│참회의 기록과 과거의 발견

3. 고백의 문학적 장치들

5장_ 근대문학과 인간학의 기획
1.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진실
2. 무의식과 근대문학의 꿈


편집자 추천글 ▼

섹슈얼리티와 광기에 관한 푸코의 철학적 담론을 적극 수용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이 되는 1920년대 소설을 새롭게 조망한 책. 저자는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현진건 등의 20년대 한국 자연주의 문학 역시 성적 욕망과 분열증, 편집증, 관음증 등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병리성에 대한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푸코의 이론적 틀을 통해 근대적 주체의 진실을 파고드는 1920년대 한국 소설의 고유한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새로운 삶을 촉발하는 사유와의 마주침 - 클리나멘 총서 005
섹슈얼리티와 광기, 한국 근대문학의 화두가 되다

정치적 환원주의를 넘어, 20년대 문학에 드러난 근대적 주체를 해부한다

이 책 『섹슈얼리티와 광기―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는 미셸 푸코의 철학적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한국 근대문학의 기원이 되는 1920년대 소설을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개념을 통해 재조명한 책이다. 『성의 역사』, 『광기의 역사』와 같은 푸코의 저서들이 차례로 번역된 지도 벌써 10여 년이 되었다. 섹슈얼리티와 광기에 관한 푸코의 독창적 담론은 그동안 국내에서도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푸코의 연구는 유럽의 경탄할 만한 철학적·사회과학적 업적으로 여겨졌을 뿐이다. 성(性)과 광기에 대한 그의 논의를 한국의 역사적 지층에 접속시키며,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초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이 책의 저자 이수영은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장학자다. 그는 김동인·염상섭으로 대표되는 1920년대의 한국 소설 역시 성욕과 광기에 천착하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주체의 은밀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음을 포착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섹슈얼리티와 광기에 관한 푸코의 담론이 한국 근대문학 이해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고 지적한다. 그린비 출판사의 <클리나멘 총서>는 제도권 학문의 울타리 밖에서 더 큰 학문적 자유를 성취한 이들의 저서를 출간해 왔다. <클리나멘 총서>의 다섯번째 책인 『섹슈얼리티와 광기- 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는 1920년대의 자연주의 문학의 심층적인 독해를 통해, 기존의 사유를 넘어서는 한국 근대문학의 해석 가능성을 타진한다.

계몽의 시대는 가라 -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시대가 왔다!
1920년대, 『무정』과 계몽적 주체의 시대는 저물었다. 20년대 문학은 성과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세계를 지탱하는 영웅 대신, 성적 욕망과 광기에 휩싸인 자들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것은 금지된 성행위나 광인의 기행에 대한 호기심의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철저한 고백과 해부만이 주체의 유일한 존재 증명이 된다는 듯이 20년대의 문학적 주체들은 병적으로 주체의 진실에 몰두했다. 그들은 자기 내면의 암흑에 사로잡힌 병리적인 인간이었다.
20년대의 한국 소설은 근대적 주체의 내면 속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 욕망과 강박관념, 그리고 정신분열의 이미지들을 기록했다. 이때부터 인간의 진실 혹은 본질은 섹슈얼리티와 광기의 병리성에서 포착되었다. 여성 육체에 대한 호기심, 광기에 대한 끈질긴 탐구, 내면의 죄의식, 타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관음증적 의지 등을 20년대 문학은 ‘앎의 의지’를 통해 관통하고자 했다. 저자는 근대적 주체가 단순히 노동하는 존재나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는 자신의 고유성을 온전히 확보할 수 없었음을 지적한다. 정치·경제 공동체가 자신을 규정한 정체성 너머, ‘나만의 진실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20년대 문학의 중심 문제였다. 그리고 성과 광기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진실 확보에서 최고의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성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의 진실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일까? 성은 늘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이상한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런 성적 욕망의 ‘비밀스러움’은 오히려 숨겨진 채로 남아 있으려 하는 그것을 억지로 끄집어내도록 했다. 성을 둘러싼 그 어둠이 도리어 성에 대한 담론을 촉발시켰던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근대적 주체에 이르러 “성은 점차로 커다란 의혹의 대상, 우리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의 행동과 생존을 꿰뚫고 지나가는 염려스러운 흐름이 되었다”(『성의 역사1: 앎의 의지』). 성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었으며, 무의식이라는 인간의 진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만을 특권화할 수는 없다. 저자는 20년대 문학담론에서 성과 함께 광기의 영역도 찾아낸다. 성이 고백되었다면 광기는 관찰되었다. 광기를 마주하는 자는 광인에게서 자신의 진실을 발견한다. 광기는 외부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물론 광기가 속한 곳은 인간의 내면이다. 하지만 광기는 이 보이지 않는 내부적 요소를 관찰할 수 있는 외부적 증상으로 드러낸다. 광기의 증상이라는 육체적 표현이 은폐된 주관성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광기는 인간의 진실과 관계한다.

주체의 진실과 ‘앎의 의지’
인간의 진실은 인간의 정상적 본성에서 찾아지지 않는다. 인간의 진실은 정상적인 인간이 사라지는 순간, 그 인간이 광기에 이르는 순간에 드러난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부정성의 계기”(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로부터만 인간의 진실은 모습을 나타낸다. 부정성의 계기는 성의 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20년대 문학담론을 사로잡은 성은 건강한 성이 아니라 병리적인 양상을 띠는, 죄의식과 오류와 망상과 타락의 느낌을 주는 성이었다. 우리는 성의 부정성과 함께 우리의 진실을 구성한다.
푸코는 인간이 자신을 대상으로 스스로의 본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이 ‘앎의 의지’가 철저히 근대적인 현상임을 밝혀냈다. 성이나 광기같이 은폐된 영역을 끊임없이 건드리면서 주체의 진실을 구성하는 것도 근대적인 현상이다. 인간에게는 명증한 의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숨겨진 영역이 있다. 바로 무의식의 영역이다. 무의식은 광기와 성을 중심으로 회전한다. 저자는 20년대 문학이 광기와 섹슈얼리티, 욕망과 죄의식 등에 천착했던 것도 무의식의 세계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문학은 근대적 주체의 진실을 구성하기 위해, 무의식의 ‘악마적 부조리함’과 마주쳐야 했던 것이다.
“근대문학은 ‘병적’이므로 치료를 받으라고도, ‘원시적’이므로 감금되어야 한다고도, ‘무의미’하므로 무시해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문학담론은 이 모든 병리적 요소를 통해 근대적 주체의 진실을 포착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문학담론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거나 혁명적일 수는 없었다. 문학담론은 무의미의 의미를 따져보기도 하고, 병리성의 불가피함을 검토하기도 하고, 원시성의 현재성을 재 보기도 하면서 천천히 나아간다. 문학의 발걸음이 느린 이유는 인간의 탄생과 공존하는 무의식의 광대함과 심오함 때문일 것이다. 무의식의 모든 지대를 건드리고자 하는 문학의 꿈, 이는 현재의 문학 속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문학은 아직도 인간학이다.”(본문 283쪽)

20년대 문학의 주인공들 - 이 사람을 보라!
1920년대는 최초의 동인지 『창조』가 발행되고,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의 주인공 X와 같이 복잡하고 뒤얽힌 내면을 갖고 있는 주체가 등장하는 시대다. 이 시대에 이광수 식의 계몽적 주체는 ‘도학선생’의 거짓된 대언자(代言者)쯤 되는 비아냥의 대상일 뿐이다. 김동인이나 염상섭, 나도향 등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계몽적 주체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만의 문학 공간을 만들어 냈다. 성 윤리를 저버린 여자, 불감증의 아내, 종교적 열정과 살해의 망상에 사로잡힌 아들, 성적 불능자이고 사디스트이며 도착적인 남편, 히스테리에 걸린 음탕한 간호부, 관음증 환자인 전차 차장, 결혼을 거부하거나 여자를 무시하는 젊은 동성애자들이 몰려 왔다.

▶ 엘리자베트와 성적 욕망의 무의식
엘리자베트는 별로 안심이 되어 자리를 펴고 전나체가 되어 드러누웠다. (중략) 그는 남작의 자기를 들여다보는 눈으로 남작의 요구를 깨달았다. 하고 겨우 중얼거렸다.
“부인이 알으시면?”
‘아차!’
그는 속으로 고함을 쳤다.
‘부인이 모르면 어찌한단 말인가? 모르면…… 이것이 허락의 의미가 아닐까? 그러면 너는 그것을 싫어하느냐? 물론 싫어하지. 무엇? 싫어해? 네 마음속에 허락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냐? 아…… 허락하면 어쩌냐? 그래도……’ (중략)

‘내 속이 왜 그리 약하단 말인고? 정신이 아득하여질 이유가 어디 있어?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으면 정신이나…… 아, 지금 남작은 무엇하고 있노?’
그는 자기가 남작에 대하여서도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차라리 놀랐다.

-김동인, '약한 자의 슬픔'(1919) 중에서

엘리자베트가 남작에게 겁탈당하는 이 장면은 자기 육체에 잠복해 있는 무의식적인 성적 욕망을 깨닫는 젊은 여성의 혼란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엘리자베트는 그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여자는 아니다. 그의 육체는 은연중에 쾌락을 즐기려 한다. “전나체”로 드러누운 엘리자베트는 그런 점에서 근대문학이 보여 준 충격적인 육체이기도 하다. 겁탈을 당한 엘리자베트가 갑작스럽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은 이해하기 곤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남작과의 정사가 단순한 강간이 아니라 엘리자베트의 무의식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면 이 사랑의 감정도 그렇게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녀가 발견한 것은 육체와 욕망의 배후에 자리한 무의식이었다. 남작이 방에 들어올 때 저항하지 못하고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무의식, 의식적인 저항이란 이 무의식적인 욕망 앞에서는 가소로운 것이었다. 무의식 속에 잠재한 인간의 본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관음증적 촉수를 들이대는 문학, 이것이 1920년대에 출발한 근대문학의 운명이자 현재도 계속되는 운명이다.

▶ 강박적 주체와 광인의 만남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주인공이자 강박증적 주체인 X는 평양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이 여행은 신경증 환자와 정신분열증 환자의 만남이라는 한국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장면의 표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우선 병리적 주체들이 문학담론의 공간을 장악했다는 것, 이것 자체만으로도 문학사에서 엄청난 사건이다. 이는 병리적 주체에 대한 당시의 관심이 엄청났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신경증 환자의 자기 분석과 고백은 20년대 문학담론의 핵심적 특징이다. X는 이 자기 해부와 고백을 ‘김창억’이라는 광인과의 만남을 통해 수행한다.
X의 친구들은 조롱의 대상으로밖에는 김창억을 대하지 않는다. 광인은 무의미하다. 인간 사회의 내부적 관점에서 볼 때 존재 가치가 없다. 이런 태도는 아마도 광기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의 연속일 것이다. 그러나 X의 시선으로부터 광기에 대한 인식이 변형되기 시작한다. 근대적 경험이 끼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X는 김창억에게서 전율을 느낀다. 광인 앞에서 진지해진다는 것, 이것은 정말 근대적인 ‘사건’이다. 광인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의 틀이 전복되는 것이다. X는 김창억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어떤 본성을 직감한다. 그것은 인간의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의 광인의 포착이다. 광인은 주체를 구성하는 진실을 누설한다. 실존적 고통은 자신의 원인을 갖지만, 그 원인도 그것의 결과인 광기도 인간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진실이다. 인간은 광기를 통해 자신의 한계성을 인식한다. 광기는 주체의 철저히 수동적인 측면, 그 무능력의 지대를 드러낸다. 광기는 부조리한 진실이지만 이 불편한 진실이야말로 근대적인 주체의 핵심에 놓여 있다. 광기는 근대적 주체의 초라한 운명을 비춘다. 이것이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분석하는 광기다.

▶ 관음증적 주체와 앎의 의지
나도향의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1924)은 전차 차장이 서술자로 등장하여 한 여성에 대해 보고하는 형식을 이루고 있다. 시골에서 올라온 여성이 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구차한 형색이라 차장이 도움을 주기까지 했는데 한 달 만에 만났더니 몰라보게 세련되게 변했다. 그러나 차장이 자세히 살펴보니 이 여성의 변모 주위에는 늘 새로운 남성의 교체가 있었다. 시골의 순진한 여인이 서울에 와서 타락하고 만 것이다. 이제 차장은 도덕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여성을 미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부도덕한 행실을 하는 여성의 뒤를 캐는 남성은 과연 도덕군자일 것인가. 차장이 도덕의 수호신으로서 여성을 미행할 때 자신의 의도와 달리 노출되고 마는 것은 그의 관음증이었다. 차장은 계속해서 그녀를 따라다닌다. 골목길로 들어섰더니 남녀가 은밀히 손을 잡고 있기도 하고, 서로 불온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음탕한 남녀는 여관 안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차장은 망단한 표정이다.
남녀가 들어간 방이라고 생각되는 들창 아래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차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도대체 여성과 차장 중 누가 더 타락했고 변태적인지. 차장은 이제 아슬아슬한 가슴으로 옷 벗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기침소리가 들리더니 전깃불이 꺼진다. 이 순간 차장이 느꼈을 절망은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장벽 앞에서 관음증은 더 커지는 법이다. 불 꺼진 여관방이라는 공간이야말로 차장의 ‘앎의 의지’가 맹렬히 타오르는 섹슈얼리티의 공간이다.
「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은 20년대 문학담론이 무엇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문학담론은 관음증적 의지, 다시 말해 저 비밀스럽고 궁금하고 알아야 하는 성이라는 미궁에 대해 맹렬한 앎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성이 인간과 관계되는 요소라는 점에서 이것은 인간에 대한 관음증이었다. 관음증적 주체에 대한 호기심, 병든 주체에 대한 앎의 의지가 문학담론을 움직여 간 동력이었다.

근대문학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시도
1920년대 문학은 종종 식민지라는 비관적인 정치 현실 속에서 회의주의나 도피적 내면성에 머무른 것으로 비판받는다. 특히 문학작품을 정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20년대 문학은 1930년대 이후의 ‘현실주의’ 문학을 위한 예비와 시행착오로서만 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근대문학은 정치적 환원주의로는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물론 근대문학이 성과 광기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노동도, 정치도, 전쟁도 문학의 중요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었다”는 카프 전향의 선언을 단순히 정치적 선택으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 1930년대 계급문학이나 1980~90년대 노동문학이 지속되지 못했던 까닭은 단순히 권력이 억압했다거나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원인은 그런 문학들이 근대적인 담론 속에 있으면서도 인간적 진실의 탐구라는 근대문학의 중심 기획과 마주하지 못한 데 있다.
근대문학에 등장하는 수많은 병리성과 고뇌, 상처와 죽음들은 정치 현실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지층 속에서 스스로의 고유한 가치를 번득이며, 근대문학이라는 현상 자체를 규정짓는 핵심적인 조건으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의 독자성을 소외시키지 않고, 문학의 의미를 그 무의식적 영역까지 포괄해 다룰 수 있는 해석자를 기다리며. 『섹슈얼리티와 광기―한국 근대문학과 앎의 의지』는 이러한 해석의 중요한 한 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