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라는 이념

프리즘 총서 39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슬라보예 지젝·코스타스 두지나스 엮음, 진태원 외 옮김 | 2021-11-10 | 448쪽 | 29,000원 


2009년 3월,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테리 이글턴, 장-뤽 낭시, 안토니오 네그리 같은 사유의 거장들이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버크벡 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주최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주최 측에서는 애초에 200명 정도의 청중을 예상했으나, 결과적으로 1000명이 넘는 청중이 참석하여 공산주의가 21세기에도 여전히 뜨거운 화두임을 증명했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
모로코의 라바(Rabat)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사르트르주의자였고, 이후 알튀세르의 작업에 참여하여 1968년 과학자를 위한 철학 강의에서 ‘모델의 개념’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68년 5월 혁명 이후 확고한 마오주의 노선을 취하며 알튀세르와 결별했고, 1970년대 내내 마오주의 운동에 투신했다. 하지만 이후 프랑스에서 마오주의 운동이 쇠락하자 다른 정치적, 철학적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다. 마침내 바디우는 1988년 『존재와 사건』을 출판하여 철학의 새로운 전망을 열었고, 이후 2006년에 『존재와 사건』의 2부인 『세계의 논리』를 출간하고, 2018년에는 3부인 『진리들의 내재성』을 내놓음으로써 그의 진리 철학에 방점을 찍는다. 또한 그는 정치적 투사로서 2000년 이후 중요한 정치적 사안에 개입하여 신자유주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당 없는 정치’를 주창하며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개입은 『정황들』 연작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파리8대학 교수로 재직했고, 1999년부터 파리고등사범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2002년에는 고등사범학교 부설 프랑스현대철학연구소를 창설했다. 현재는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하고 있으며 프랑스현대철학연구소의 소장 직을 맡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을 위한 선언』, 『수와 수들』, 『조건들』, 『윤리학』, 『사도 바울』, 『세기』, 『유한과 무한』, 『투사를 위한 철학』, 『철학과 사건』, 『행복의 형이상학』, 『참된 삶』 등이 있다.

저자 
슬라보예 지젝 Slavoj Zizek
현대 철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힌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 태어나 류블랴나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파리8 대학교에서 정신분석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파리8 대학교, 런던 대학교 등 대서양을 넘나들며 세계 주요 대학에서 강의했다. 2017년 현재는 슬로베니아 류블랴냐 대학교 사회학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급진적 정치이론, 정신분석학, 현대철학에서의 독창적인 통찰을 바탕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예술, 대중문화를 자유롭게 꿰어내며 전방위적 지평의 사유를 전개하는 독보적인 철학자다. 강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감과 그와 대비되는 독특한 유머 감각 때문에 언론에서는 “문화 이론의 엘비스 프레슬리” “지적인 록스타”라고 불린다. 스스로 “정통적인 라캉주의적 스탈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며, 사그라진 ‘혁명’에 대한 논의에 끊임없이 불을 붙이고 있다. 라캉과 마르크스에 대한 저자만의 관점을 담아내 국제적 명성을 안겨준 첫 책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을 시작으로『신을 붙쾌하게 만드는 생각들』『새로운 계급투쟁』『매트릭스로 철학하기』(공저) 등 다수의 저작을 펴냈으며, 단순한 지식인이나 학자라기보다는 실천하는 이론가로서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저자 
코스타스 두지나스 Costas Douzinas
영국 버크벡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자 동 대학 인문학연구소 소장. 주요 저서로 『위기 속의 철학과 저항』(2013), 『급진적 인권 철학』(2019) 등.


저자 마이클 하트 Michael Hardt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문학이론가. 안토니오 네그리와 함께 쓴 『제국』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대학에서 질 들뢰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듀크 대학의 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 그 밖에 네그리와 함께 쓴 저서로 『다중』, 『공통체』, 『디오니소스의 노동』 등이 있다.


저자 브루노 보스틸스 Bruno Bosteels
1967년 벨기에 출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현재 컬럼비아대학교 비교문학과사회연구소 교수로 재직. 『주체의 이론』,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현대프랑스철학의 모험』 등 알랭 바디우의 저작을 여럿 영어로 번역. 주요 저서로 『라틴아메리카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공산주의의 현실성』 등. 현대사상 비평지 『다이어크리틱』의 편집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자 수전 벅모스 Susan Buck-Morss
미국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현재 뉴욕시립대학원대학교 정치학 교수이자 코넬대학교 명예교수. 독일 비판철학과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주요 연구 영역으로 삼으며, 미술사, 건축사, 비교문학, 문화학, 독일학, 역사, 철학 등을 포함하는 다학제간연구를 추구한다. 주요 저서로 『헤겔, 아이티, 보편사』, 『꿈의 세계와 파국』,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등.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1933년 이탈리아 파도바 출생. 파도바대학 정치철학 교수 역임. 이탈리아의 대표적 자율주의 이론가로 1969년 ‘노동자의 힘’ 그룹 설립. 1970년대 후반 극좌 조직 ‘붉은 여단’ 활동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스피노자에 관한 독창적 연구, 『제국』 3부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주요 저서로 『전복의 정치학』, 『다중과 제국』, 『혁명의 만회』 등.


저자 잔니 바티모 Gianni Vattimo
1936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생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1963년 하이델베르크로 이주해 카를 뢰비트, 하버마스, 가다머와 함께 공부했다. 1999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근대성의 종말』, 『하이데거 입문』, 『해석 너머』 등이 있다. 


저자 장-뤽 낭시 Jean-Luc Nancy
2021년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1987년 하이데거의 자유에 관한 연구로 국가박사학위 취득. 캘리포니아대학, 베를린자유대학 등 여러 대학의 객원교수 역임. 자크 데리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오랜 친분을 이어갔으며, 특히 라쿠-라바르트와는 『문자라는 증서』 등 여러 권의 책을 공저했다. 주요 저서로 『무위의 공동체』, 『코르푸스』, 『나를 만지지 마라』 등이 있다.


저자 쥐디트 발소 Judith Balso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1997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소재 마르크블로흐대학교에서 페소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파리 소재 국제철학학교 교수 역임. 현재는 유럽대학원대학교 시 분과 교수. 주요 저서로 『페소아, 형이상학적 파발꾼』, 『시의 주장』 등. 


저자 왕후이 汪晖, Wang Hui
1959년 장쑤성 양저우 출생. 칭화대학 중문학과 교수.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루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다른 대학들의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천안문항쟁에 참여한 전력으로 강제이주 처벌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 『단기 20세기』, 『탈정치 시대의 정치』, 『죽은 불 다시 살아나』,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등. 


저자 피터 홀워드 Peter Hallward
알랭 바디우와 질 들뢰즈에 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정치철학자. 런던 킹스턴대학 현대유럽철학부 교수. 잡지 『급진 철학』과 『엔젤라키』의 편집위원. 주요 저서로 『알랭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 『알랭 바디우와 철학의 장래』, 『들뢰즈와 창조의 철학』 등이 있으며, 바디우의 『윤리학』을 영어로 옮겼다. 


저자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1943년 영국 샐퍼드 출생. 영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 옥스퍼드대학교 영문학 연구교수와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거쳐 현재 랭커스터대학교 영문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 주요 저서로 『문학 이론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이론 이후』, 『반대자의 초상』, 『발터 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 등. 

 
역자 
진태원
성공회대 민주자료관 연구교수, 『황해문화』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및 동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피노자 철학을 비롯한 서양 근대 철학을 연구하고 있고, 현대 프랑스 철학과 정치철학, 한국 민주주의론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다. 저서로 『을의 민주주의』, 『알튀세르 효과』(편저), 『스피노자의 귀환』(공편), 『포퓰리즘과 민주주의』(편저), 『애도의 애도를 위하여』 등이 있으며, 『법의 힘』, 『마르크스의 유령들』, 『우리, 유럽의 시민들?』, 『정치체에 대한 권리』, 『폭력과 시민다움』, 『헤겔 또는 스피노자』, 『불화: 정치와 철학』, 『쟁론』,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 『공산주의라는 이념』(공역) 등을 옮겼다.



역자 강길모
한신대 철학과 석사. 병역거부자. 현대정치철학연구회를 공동 운영 중이며, 칼 슈미트 및 푸코 연구를 통해 주권의 폭력 및 저항하는 주체의 문제를 다루는 데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역자 
강신운
현대 정치철학 연구자이자 전문 번역가이다. 푸코의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록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5~76년》을 옮겼고 《자기의 통치와 타자의 통치》, 《생명체의 통치에 관하여》 등을 옮기고 있다. 그 밖의 역서로 《자크 데리다를 읽는 시간》, 《너무 움직이지 마라: 질 들뢰즈와 생성 변화의 철학》, 《이미지의 운명: 랑시에르의 미학 강의》, 《푸코의 미학》, 《목적 없는 수단》, 《세속화 예찬》 등이 있다.

역자 
김정한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대중운동의 이데올로기 연구: 5·18광주항쟁과 6·4천안문 운동의 비교』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실천문학 편집위원, 문화 과학 편집위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민간조사관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현대 정치철학연구회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역자 
오근창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취득. 이후 미국 퍼듀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 취득. 주요 연구 관심사는 사회정치철학, 윤리학, 대륙철학. 역서로 『급진적 무신론: 데리다와 생명의 시간』이 있다.

역자 
황재민
한국외대 철학과 박사수료. 푸코-알튀세르의 주체화 양식 연구로 박사논문 준비 중. 역서로 『루소 강의』, 『마르크스를 읽자』(공역), 『푸코, 권력의 탄생』(근간), 『재생산에 대하여』(근간) 등.

역자 
최재혁
서울대 물리학과 및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졸업. 해방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정치 프로젝트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 중이다.
차례 ▼

들어가며 공산주의라는 이념 — 슬라보예 지젝, 코스타스 두지나스 4

1장 공산주의라는 이념 — 알랭 바디우 15
2장 현재에 현존하기. 공산주의 가설: 철학을 위한 가능한 가설, 정치를 위한 불가능한 이름? — 쥐디트 발소 39
3장 좌익 가설: 테러 시대의 공산주의 — 브루노 보스틸스 69
4장 두 번째는 희극으로… 역사적 화용론과 때맞지 않는 현재 — 수전 벅모스 125
5장 아디키아: 공산주의와 권리들에 대하여 — 코스타스 두지나스 149
6장 공산주의: 리어인가 곤잘로인가? — 테리 이글턴 185
7장 ‘지성의 공산주의, 의지의 공산주의’ — 피터 홀워드 205
8장 공산주의에 있어서 공통적인 것 — 마이클 하트 239
9장 공산주의, 단어 — 장-뤽 낭시 263
10장 공산주의: 개념과 실천에 관한 몇 가지 사유들 — 안토니오 네그리 289
11장 공산주의 없는 공산주의자들? — 자크 랑시에르 307
12장 문화대혁명은 공산주의를 끝냈는가? 오늘날의 철학과 정치에 대한 8가지 논평 — 알레산드로 루소 327
13장 추상화의 정치: 공산주의와 철학 — 알베르토 토스카노 353
14장 약한 공산주의? — 잔니 바티모 371
15장 처음부터 시작하는 방법 — 슬라보예 지젝 377
부록 논쟁 중인 우리의 장래: 현대 중국에서의 지적 정치 — 왕후이 407

찾아보기 433
지은이 소개 443 
옮긴이 소개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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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낭시, 네그리,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들이 외친 “해방의 공산주의”


2009년, 버크벡 대학교 인문학연구소의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를 새롭게 상상하기 위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를 조직했다. 후기 자본주의를 넘어설 정치적 기획의 필요성에 공감하듯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 안토니오 네그리, 자크 랑시에르, 테리 이글턴 같은 사유의 거장들이 런던 콘퍼런스로 모여들었다. 주최 측은 애초에 200명 정도의 청중을 예상했으나 최종적으로는 9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이 가득 찼고, 또 다른 300명을 위해 영상을 중계할 수 있는 방을 예약해야 했다. 대규모의 참가자는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콘퍼런스 내내 참가자들은 분파주의를 넘어선 토의를 나눴고, 이 시대 가장 뛰어난 철학자들은 이질적으로만 느껴졌던 서로의 사유를 횡단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는 흥미로운 지적 만남을 넘어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되었다.

그린비 프리즘총서 39권인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콘퍼런스 발표자들이 낭독한 내용을 최소한으로 편집하여 당시의 열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무엇이 이 콘퍼런스를 그토록 성공적으로 만들었을까? 슬라보예 지젝과 코스타스 두지나스는 공산주의라는 기표를 악마화하는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급진적 철학과 급진적 정치 사이의 강력한 연결고리를 재활성화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될 때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독주는 끝났다. 광신적인 우파 정부는 실업과 빈곤을 노동인민에게 떠넘기고 있고, 사회민주주의 정부는 기능부전에 빠진 조직이 되었다. 은행에는 사회주의를, 빈자에게는 자본주의를 선물하는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 공산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이 책은 정치적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를 회복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국가와 당의 실패,
공산주의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

바디우는 ‘이념’이라는 개념에 대한 고찰로 콘퍼런스의 포문을 연다. 이념은 우리의 이성적 목표를 설정하기 위한 규제인가? 혹은 국가의 행위를 통해 점진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강령인가? 이념은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적인 것들을 진리의 생성 속에서 역사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은 개인들이 합체되는 것을 지지하고, 그들이 주체화 가능한 신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함으로써 국가적 제약들 너머로 갈 수 있도록 해준다. 사회주의 국가와 당이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실재적 지지를 제공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 가설은 해방의 가설에 토대를 둘 때에만 가능하지만, 랑시에르는 공산주의와 해방 사이에 역사적 긴장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해방은 ‘아무나’의 힘이 모일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공산주의 운동에는 정반대의 전제, 즉 불평등의 전제가 스며들어 있다. 지성들 사이의 차이라는 교육학적-진보주의적 가설이 그것이다. 이 가설은 공산주의자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을 일으켰는데, 그것은 노동자의 경험은 공산주의자의 지식을 자격 박탈하고, 공산주의자의 지식은 노동자의 경험을 박탈하는 이중구속으로 귀결되었다. 랑시에르는 공산주의가 새로운 대안의 이름이 되려면, 공산주의적 이념이 이런 이중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대담하게도 20세기 혁명적 시대의 ‘토대 위에 더 많은 것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내려’가서 다른 길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의 역사적 상황은 프롤레타리아 주체에 대한 더욱 급진적인 개념을 요구한다. 그것은 ‘족쇄 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프롤레타리아라는 고전적 이미지와 대조적인,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주체, 모든 실체적 내용이 박탈된 텅 빈 데카르트적 주체이다. 상징적 실체를 빼앗기고, 유전자 염기가 조작되고, 살 수 없는 자연환경에서 허덕이는 우리는 모두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이다. 새로운 해방 정치는 더 이상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의 폭발적 결합일 것이다.

공산주의는 철학자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정치적 이념이다

1990년대는 좌파에게 삼중의 실패가 닥친 시기였다.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치가 쇠퇴했다.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들이 소멸하고 그들 경제는 세계 산업 안으로 통합되었다. 제3세계 해방운동 역시 침체를 겪었다. 이러한 사태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첫발을 디딘 하나의 시대, 곧 당-국가라는 정치적 조직 형태로 특징지을 수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알렸다. 이는 급진적 해방의 정치의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가?

오히려 최근 20년간의 수많은 징표들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마침내 실현된 자연적 사회질서로 간주하면서 “역사의 종말”을 선언했지만, 이 1990년대의 유토피아는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즉, 정치적 영역에서 이 유토피아의 죽음을 알린 것이 2001년 9.11테러라면, 2008년 금융위기는 경제적 죽음을 상징했다. 이러한 새로운 조건들 속에서 관건은 새로운 전략들의 출현을 위해 힘쓰는 가운데 해방의 정치에서 기초가 되는 사항들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하는 것이다.

오늘의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세계적 명사들이 모여 개최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의 괄목할 만한 성공은 해방의 기획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또 쇄신되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오늘날 당연시되고 있는, 단순히 스탈린주의적 형태의 당-국가를 거부하는 것으로부터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회민주주의 자체의 근본적 개조를 꾀하지 않는, 이른바 민주적 좌파의 단순한 체제 개혁 전체도 거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990년대의 실패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측면보다 바로 이 민주적 좌파의 결정적 실패라는 측면이 더 컸다.

따라서 “공산주의라는 이념”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한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는 급진적 해방 기획의 지평을 가리키기에 적절한가? 참가자들은 각각의 이론적 입장들이 지닌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라는 단어에 충실하는 것이 유용하다는 생각을 공유한다. 요컨대 공산주의는 우리의 탐색을 이끄는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나아가 좌파 자신의 이름을 달고 저질러진 것을 포함한 20세기 정치의 파국들을 고발하는 수단으로서도 기능할 수 있다. 알랭 바디우와 슬라보예 지젝이 콘퍼런스를 시작하면서 말한 바대로, 공산주의는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에게 적합한 유일한 정치적 이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