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유령
최은주 지음 | 2017-10-30 | 256쪽 | 13,000원
불행했던 삶, 자살 혹은 동성애 같은 키워드로 읽어내는 가십으로서의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라, 그 세기의 가장 치열하고 열렬한 독서가였던 작가를, 그녀의 작품으로 직접 만난다. '작가는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직접 작가가 되는 것. 우리는 그렇게 <런던 유령>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되는 경험을 하며 독자인 동시에 저자가 되고, 또 버지니아 울프가 되면서 우리는 여러 개의 픽션들을 만난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최은주
영미문학비평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소속의 NRF 학술연구교수로, 인간과 비인간이 ‘난민화’되는 현상과 이동권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경계 횡단의 언어와 환대 (불)가능한 장소」, 「정치적으로 전유되는 이주·국경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그동안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드거 앨런 포,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 연장선에서 《책들의 그림자》, 《런던 유령–버지니아 울프의 거리 산책과 픽션들》을 펴냈다. 그밖에 《죽음, 지속의 사라짐》, 《나이 듦, 유한성의 발견》 등이 있다.
차례 ▼
프롤로그
1. 정말이지 지금 당장 연필 하나가 꼭 필요해
2. 오늘 저녁 파티 잊지 마!
3. 당신의 사랑이란 뭐죠?
4. 부엌 식탁을 경험한다는 것
5. 사람들은 계속해서 지나가고 있어
6. 나는 변화하고 있었다
7. 런던 유령
참고문헌
편집자 추천글 ▼
“버지니아 울프가 독자에게 바랐던, 바로 그 방식대로”
― 런던유령, 버지니아 울프의 거리 산책과 픽션들
왜, 지금, 버지니아 울프일까? 거리 산책이라니, 이미지와 심상이라니, 실용적이지도, 치열하지도 않은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을 우리는 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런던 유령』의 저자 최은주는 말한다.
“현대의 삶은 더 팍팍해졌고, 관계 맺기는 피로감을 주고, 그에 따라 고독감은 심화되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의 물결 때문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독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지금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보과잉과 멀티태스킹으로 끊임없이 일과 생활이 침입받는 시대, 이때에 고독은 차라리 경쟁력이다. 그리고 이럴 때 자신의 내면을 누구보다도 깊고 치밀하게 파고들어간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의 주요 저서 3권을 정면으로 읽어내고 있는 『런던 유령』의 저자 최은주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학문화된 버지니아의 소설이 ‘사실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단,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활동”에 대해서.
삶을 인식하는 눈, 삶과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
카프카의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것은 우화인 동시에 진실이다. 갑충이 되지 않고서는 이르지 못했던, 어떤 삶의 진실. 카프카는 벌레가 되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무언가를 참으로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가능은 한 일일까. 책을 읽는다는 건 그것을 이해한다는 뜻일까. 최은주가 『런던 유령』에서 하고 있는 실험은,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언어로 표출되지 않지만 생성되는 심상들, 나아가 실질적인 어떤 것, 은밀한 어떤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녀와 인생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싸움이기도 했다.” 최은주는 버지니아 울프가 벌인 인생과의 싸움을 울프의 문장 속에서 읽어내며 작가로서의 버지니아 울프, 여인으로서의 버지니아 울프, 딸로서의 버지니아 울프를 발견한다. 불행했던 삶, 자살 혹은 동성애 같은 키워드로 읽어내는 가십으로서의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라, 그 세기의 가장 치열하고 열렬한 독서가였던 작가를, 그녀의 작품으로 직접 만난다. ‘작가는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직접 작가가 되는 것. 우리는 그렇게 『런던 유령』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되는 경험을 하며 독자인 동시에 저자가 되고, 또 버지니아 울프가 되면서 우리는 여러 개의 픽션들을 만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등대로>, 그리고 <파도>로 집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스토리는 점점 끊어집니다, 파편화되지요. 우리의 생각이 한 장소에 속해 있을 때도 여러 장소를 오갈 수 있고, 이 시간에 서있으면서도 다른 시간 속을 오가듯이, 소설들은 그대로 보여 줍니다.”(저자 인터뷰 중에서)
일생의 기획으로서의 산책, 사유, 글쓰기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사랑했고, 헌신적으로 런던을 산책했다. 걸으며 보이는 사람들, 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상상했고 이런 가족과 이런 삶을 살겠지, 공상하며 소설을 만들어 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을 보고 그들이 공동으로 겪을 어떤 보편성을 떠올렸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할애하는 문장은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거나, 잘될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나의 고민과 두려움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들이다. 울프는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쓰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인생을, 타인의 인생을 이해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거리 출몰’은 글쓰기 작업과 연관된다. 그녀에게 글쓰기와 걷기는 가지 않은 곳에 대한 모험이며 갇힌 시선의 맹목과 한계를 자각하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는 일은 그녀에게 그 자체로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울할 때 위안을 주었다. 1934년의 기운 없는 순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너무 흉해. 너무 늙었어. 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런던 도처를 걷자.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자.” (본문48쪽)
버지니아 울프가 독서와 쓰기를 거리를 걷는 것과 비교한 점을 지적하며 최은주는 말한다. “독자는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건너뛰고, 책 속으로 걸어 다니지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활동이면서 능동적인 활동이기도 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닐 뿐만 아니라 ‘거대한 눈’이 되어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게도 됩니다. 독서라는 것이 쓰인 것을 그냥 읽어 내려가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활동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독서와 쓰기가 침투하기를 원했어요. 『런던 유령』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쓰기’에 대한, 또는 ‘다시 쓰기’를 위한 책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한순간의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소설이라 불리는 『등대로』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 일을 담은 1부, 10년을 담고 있는 2부(분량상 가장 짧다), 다시 이틀간을 다룬 3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이혼하고 누군가는 인생이 달라졌지만 그저 한마디 언급으로만 지나갈 뿐이다. 짧게 처리된 이유는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일까?
누군가의 말은 중요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본문 54쪽)
『등대로』에서 램지 부인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고, 딸 프루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들 앤드루는 세계대전 중에 죽었다. 민터와 폴의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 ‘딸 프루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이 문장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전해질 보편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문 155~156쪽)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상의 기교가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현실이었다. 고흐에게, 모네에게, 피카소에게 세상이 인식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림을 그렸고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자신에게 인식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렇게 울프의 작품들은 낯설고 정교하고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것들로 탄생했다. 『파도』를 집필할 당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서 적는다.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하는 시도, 그것은 인생에서 그녀가 했던 싸움과 닮아 있다. 『런던 유령』은 버지니아 울프를 닮아 있고,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닮아 있다. 이 책을 통한 버지니아 울프 읽기가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런던 유령』은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픽션 읽기와 픽션 만들기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런던 유령』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할 순 없어도 적어도 그녀가 되어 볼 수는 있다. 이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어제와 다르다 할 수 없는 오늘 속에서 타인과의 공동 경험을 인식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우리는 던져보게 될 것이다.
※저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1. 책에서도 쓰셨듯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읽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블룸즈베리’(Bloomsbury)라고 하는 지적인 모임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활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조차 작품보다는 이와 같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편하게,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소설기법 때문에 접근이 어려워요. 학계에서만 논의가 되었고, 그래서 학문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단,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활동에 대해 사실적이라는 점입니다. 내적 활동을 요약하여 말하지 않고 빛이 아롱거리듯이, 안개가 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썼습니다. 지속적일 수 없는 ‘존재의 순간들’이라는 표현이 꼭 맞지요. 우리는 어쩌면 빛이 내리쬐는 한낮, 한순간의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이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이미 철학서들은 이런 인간의 존재성을 수도 없이 논했지요.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인물의 내면을 통해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슬프고 무의미하고 아름답지요. 그 속에서 내가 보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반드시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어떤 해석이 아니라 심상으로 발견할 것이라고 봅니다.
2. 쉽지 않은 버지니아 울프 읽기. 그런 울프를 읽어내는 방법으로 선생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버지니아 울프-되기’로 읽힙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동감할 방법도 같은데요, 이런 낯선 방식이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 어렵게 느껴지진 않을까요? 왜 이런 서술방식을 쓰셨나요.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등대로』, 그리고 『파도』로 집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스토리는 점점 끊어집니다, 파편화 되지요. 우리의 생각이 한 장소에 속해 있을 때도 여러 장소를 오갈 수 있고, 이 시간에 서 있으면서도 다른 시간 속을 오가듯이, 소설들은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해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댈러웨이 부인』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런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결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사회적 시선이 여성인물들의 삶 내면으로 반사되고 있어요. 클라리사의 질병, 미스 킬먼의 결핍감,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사회적 기대와 시선 때문에 굴절된 증상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있지만, 숨겨진 저항들을 품고 있어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설명하기는 너무 단순하고 한정적이에요. 사실, 『등대로』에서 『파도』에 이르기까지 독서활동에서 남기는 것은 흔적 정도입니다. 플롯을 요약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말할 수가 없지요. 깊은 감흥을 주는 단어와 문장이 아주 많기 때문에, 소설 전체를 필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독서 방법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내용을 바로 이해하고 호응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대답하고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따로 적는다면 하나의 다른 이야기 텍스트, 픽션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런던 유령』이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서술방식이었는지 모릅니다.
3. 제목의 ‘유령’과 ‘픽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유령’은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기도 하며, 소설 속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버지니아 울프가 책속을 통과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녀가 쓴 에세이 중에 거리 배회에 대한 것이 있는데요. 제목에 ‘출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녀가 마치 소설 속을 그렇게 행간마다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파도』에서 울타리 사이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그녀는 유령에 비유하곤 했는데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등대로』에는 램지 부인이 넘나드는 문지방이 그려지는데, 젊은 나이에 죽은 버지니아 울프 어머니의 모델이기도 한 램지 부인은 죽은 이후에도 그 집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령 같아요. ‘픽션’은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세 소설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이 생성하는 자기 식의 이야기를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는 내용 정리가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자기 식의 중얼거림이나 독백을 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식의 픽션들을 생성하는 겁니다. 『런던 유령』 또한 독자로서의 필자가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며 생성한 ‘그녀’라고 하는 가상인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런던 유령』의 서술 자체가 대범하고 유니크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되진 않으시나요? 책 속에 쓰신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 역시 읽는 독자를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작가였는데요.
모더니스트들이 그러했듯이, 버지니아 울프는 적극적인 독서활동을 요구했어요. 소설은 매끈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제시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생각들, 정신적인 혼란함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독자가 이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가 있지요. 언어로 형상화되기도 전에 흩어져버려서 잊어버리는 마는, 심지어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듯해요. 그런 느낌들이, 빛의 아롱거림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요.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대신 그 속으로 독자를 데려가지요. 아마도 막상 그것들과 맞닥뜨렸을 때 숨이 막혀 버릴 수도 있어요. 매끈하게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책을 덮어 버립니다. 학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어려운 작품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소설 속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것은 독자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평범한 것들이지요. 거리와 나무, 사람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부유하는 어지럽고 뒤섞인 감정들입니다. 그녀는 자신처럼 독자가 자신의 삶을 깊이 응시하면서 그것에 관해 말하고 느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문학해설은 생각보다 많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면에서 소설들을 다루고 싶었는데요. 요약이나 해석이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가 독자에게 바랐던 바로 그 방식대로 독서하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런던유령, 버지니아 울프의 거리 산책과 픽션들
왜, 지금, 버지니아 울프일까? 거리 산책이라니, 이미지와 심상이라니, 실용적이지도, 치열하지도 않은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을 우리는 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 『런던 유령』의 저자 최은주는 말한다.
“현대의 삶은 더 팍팍해졌고, 관계 맺기는 피로감을 주고, 그에 따라 고독감은 심화되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의 물결 때문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고독의 주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지금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보과잉과 멀티태스킹으로 끊임없이 일과 생활이 침입받는 시대, 이때에 고독은 차라리 경쟁력이다. 그리고 이럴 때 자신의 내면을 누구보다도 깊고 치밀하게 파고들어간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의 주요 저서 3권을 정면으로 읽어내고 있는 『런던 유령』의 저자 최은주가 대중적이라기보다는 학문화된 버지니아의 소설이 ‘사실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단,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활동”에 대해서.
삶을 인식하는 눈, 삶과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
카프카의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것은 우화인 동시에 진실이다. 갑충이 되지 않고서는 이르지 못했던, 어떤 삶의 진실. 카프카는 벌레가 되어 그것을 우리에게 전한다.
무언가를 참으로 이해한다는 건 무엇일까. 가능은 한 일일까. 책을 읽는다는 건 그것을 이해한다는 뜻일까. 최은주가 『런던 유령』에서 하고 있는 실험은,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다. “언어로 표출되지 않지만 생성되는 심상들, 나아가 실질적인 어떤 것, 은밀한 어떤 것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녀와 인생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싸움이기도 했다.” 최은주는 버지니아 울프가 벌인 인생과의 싸움을 울프의 문장 속에서 읽어내며 작가로서의 버지니아 울프, 여인으로서의 버지니아 울프, 딸로서의 버지니아 울프를 발견한다. 불행했던 삶, 자살 혹은 동성애 같은 키워드로 읽어내는 가십으로서의 버지니아 울프가 아니라, 그 세기의 가장 치열하고 열렬한 독서가였던 작가를, 그녀의 작품으로 직접 만난다. ‘작가는 어떻게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직접 작가가 되는 것. 우리는 그렇게 『런던 유령』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가 되는 경험을 하며 독자인 동시에 저자가 되고, 또 버지니아 울프가 되면서 우리는 여러 개의 픽션들을 만난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등대로>, 그리고 <파도>로 집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스토리는 점점 끊어집니다, 파편화되지요. 우리의 생각이 한 장소에 속해 있을 때도 여러 장소를 오갈 수 있고, 이 시간에 서있으면서도 다른 시간 속을 오가듯이, 소설들은 그대로 보여 줍니다.”(저자 인터뷰 중에서)
일생의 기획으로서의 산책, 사유, 글쓰기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사랑했고, 헌신적으로 런던을 산책했다. 걸으며 보이는 사람들, 차 안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상상했고 이런 가족과 이런 삶을 살겠지, 공상하며 소설을 만들어 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을 보고 그들이 공동으로 겪을 어떤 보편성을 떠올렸다. 그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할애하는 문장은 지극히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것이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싶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거나, 잘될 거라고, 아무 문제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싶다. 애쓰지 않아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나의 고민과 두려움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는 것은 결국 그런 것들이다. 울프는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쓰는 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인생을, 타인의 인생을 이해했다.
버지니아 울프에게 ‘거리 출몰’은 글쓰기 작업과 연관된다. 그녀에게 글쓰기와 걷기는 가지 않은 곳에 대한 모험이며 갇힌 시선의 맹목과 한계를 자각하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는 일은 그녀에게 그 자체로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울할 때 위안을 주었다. 1934년의 기운 없는 순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너무 흉해. 너무 늙었어. 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고,
런던 도처를 걷자.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자.” (본문48쪽)
버지니아 울프가 독서와 쓰기를 거리를 걷는 것과 비교한 점을 지적하며 최은주는 말한다. “독자는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건너뛰고, 책 속으로 걸어 다니지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활동이면서 능동적인 활동이기도 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닐 뿐만 아니라 ‘거대한 눈’이 되어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게도 됩니다. 독서라는 것이 쓰인 것을 그냥 읽어 내려가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능동적으로 반응하며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활동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독서와 쓰기가 침투하기를 원했어요. 『런던 유령』은 바로 버지니아 울프를 ‘다시 쓰기’에 대한, 또는 ‘다시 쓰기’를 위한 책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한순간의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소설이라 불리는 『등대로』는 3부로 이루어져 있다. 하루 일을 담은 1부, 10년을 담고 있는 2부(분량상 가장 짧다), 다시 이틀간을 다룬 3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이혼하고 누군가는 인생이 달라졌지만 그저 한마디 언급으로만 지나갈 뿐이다. 짧게 처리된 이유는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일까?
누군가의 말은 중요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본문 54쪽)
『등대로』에서 램지 부인이 갑자기 쓰러져 죽었고, 딸 프루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들 앤드루는 세계대전 중에 죽었다. 민터와 폴의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이와 같은 사건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다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 ‘딸 프루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이 문장만으로도 독자들에게 전해질 보편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본문 155~156쪽)
의식의 흐름이라는 것은 단순히 스타일상의 기교가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에게는 현실이었다. 고흐에게, 모네에게, 피카소에게 세상이 인식되는 방식으로 그들은 그림을 그렸고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자신에게 인식되는 방식으로 글을 썼다. 그렇게 울프의 작품들은 낯설고 정교하고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것들로 탄생했다. 『파도』를 집필할 당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버지니아 울프는 일기에서 적는다.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하는 시도, 그것은 인생에서 그녀가 했던 싸움과 닮아 있다. 『런던 유령』은 버지니아 울프를 닮아 있고,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을 닮아 있다. 이 책을 통한 버지니아 울프 읽기가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런던 유령』은 지금껏 존재한 적 없는 픽션 읽기와 픽션 만들기에 대한 책이다. 우리는 『런던 유령』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를 이해할 순 없어도 적어도 그녀가 되어 볼 수는 있다. 이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어제와 다르다 할 수 없는 오늘 속에서 타인과의 공동 경험을 인식하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질문을 우리는 던져보게 될 것이다.
※저자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1. 책에서도 쓰셨듯 버지니아 울프의 책은 읽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책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블룸즈베리’(Bloomsbury)라고 하는 지적인 모임 속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문학적 활동이 싹트기 시작했는데,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조차 작품보다는 이와 같은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유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편하게,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어려움 때문입니다. 소설기법 때문에 접근이 어려워요. 학계에서만 논의가 되었고, 그래서 학문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 사실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단,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내적 활동에 대해 사실적이라는 점입니다. 내적 활동을 요약하여 말하지 않고 빛이 아롱거리듯이, 안개가 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썼습니다. 지속적일 수 없는 ‘존재의 순간들’이라는 표현이 꼭 맞지요. 우리는 어쩌면 빛이 내리쬐는 한낮, 한순간의 반짝거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이 전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합니다. 이미 철학서들은 이런 인간의 존재성을 수도 없이 논했지요.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인물의 내면을 통해 그런 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슬프고 무의미하고 아름답지요. 그 속에서 내가 보입니다. 저는 독자들이 반드시 자신의 내밀한 모습을 어떤 해석이 아니라 심상으로 발견할 것이라고 봅니다.
2. 쉽지 않은 버지니아 울프 읽기. 그런 울프를 읽어내는 방법으로 선생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버지니아 울프-되기’로 읽힙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동감할 방법도 같은데요, 이런 낯선 방식이 버지니아 울프를 읽고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더 어렵게 느껴지진 않을까요? 왜 이런 서술방식을 쓰셨나요.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으로부터 『등대로』, 그리고 『파도』로 집필해 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실험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습니다. 스토리는 점점 끊어집니다, 파편화 되지요. 우리의 생각이 한 장소에 속해 있을 때도 여러 장소를 오갈 수 있고, 이 시간에 서 있으면서도 다른 시간 속을 오가듯이, 소설들은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은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해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댈러웨이 부인』에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런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결혼,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대, 사회적 시선이 여성인물들의 삶 내면으로 반사되고 있어요. 클라리사의 질병, 미스 킬먼의 결핍감, 엘리자베스의 욕망은 사회적 기대와 시선 때문에 굴절된 증상들입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기대에 부응하며 살고 있지만, 숨겨진 저항들을 품고 있어요. 그런데 그와 같은 것들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으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설명하기는 너무 단순하고 한정적이에요. 사실, 『등대로』에서 『파도』에 이르기까지 독서활동에서 남기는 것은 흔적 정도입니다. 플롯을 요약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무엇을 말할 수가 없지요. 깊은 감흥을 주는 단어와 문장이 아주 많기 때문에, 소설 전체를 필사하는 것이 제일 좋은 독서 방법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 내용을 바로 이해하고 호응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대답하고 반대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을 따로 적는다면 하나의 다른 이야기 텍스트, 픽션이 생성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런던 유령』이 독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서술방식이었는지 모릅니다.
3. 제목의 ‘유령’과 ‘픽션’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유령’은 버지니아 울프 자신이기도 하며, 소설 속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버지니아 울프가 책속을 통과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녀가 쓴 에세이 중에 거리 배회에 대한 것이 있는데요. 제목에 ‘출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녀가 마치 소설 속을 그렇게 행간마다 출몰했다가 사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파도』에서 울타리 사이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에 대해 그녀는 유령에 비유하곤 했는데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어른들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등대로』에는 램지 부인이 넘나드는 문지방이 그려지는데, 젊은 나이에 죽은 버지니아 울프 어머니의 모델이기도 한 램지 부인은 죽은 이후에도 그 집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령 같아요. ‘픽션’은 사실 버지니아 울프의 세 소설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이 생성하는 자기 식의 이야기를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그녀의 소설을 읽을 때는 내용 정리가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자기 식의 중얼거림이나 독백을 글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 식의 픽션들을 생성하는 겁니다. 『런던 유령』 또한 독자로서의 필자가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며 생성한 ‘그녀’라고 하는 가상인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런던 유령』의 서술 자체가 대범하고 유니크한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걱정이 되진 않으시나요? 책 속에 쓰신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 역시 읽는 독자를 많이 생각하고 고민한 작가였는데요.
모더니스트들이 그러했듯이, 버지니아 울프는 적극적인 독서활동을 요구했어요. 소설은 매끈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제시할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생각들, 정신적인 혼란함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독자가 이것을 정리해야 한다고 믿었어요. 그것이 독자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모를 때가 있지요. 언어로 형상화되기도 전에 흩어져버려서 잊어버리는 마는, 심지어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듯해요. 그런 느낌들이, 빛의 아롱거림이, 이미지가 있다는 것을요. 따라서 그것을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대신 그 속으로 독자를 데려가지요. 아마도 막상 그것들과 맞닥뜨렸을 때 숨이 막혀 버릴 수도 있어요. 매끈하게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책을 덮어 버립니다. 학문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어려운 작품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소설 속의 인물들이 바라보는 것은 독자가 바라보는 것과 같은 평범한 것들이지요. 거리와 나무, 사람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 부유하는 어지럽고 뒤섞인 감정들입니다. 그녀는 자신처럼 독자가 자신의 삶을 깊이 응시하면서 그것에 관해 말하고 느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문학해설은 생각보다 많이 출간되어 있습니다. 저는 정면에서 소설들을 다루고 싶었는데요. 요약이나 해석이 아니라, 버지니아 울프가 독자에게 바랐던 바로 그 방식대로 독서하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