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다면
브렌다 유랜드 지음, 임유진 엮음 | 2016-11-10 | 192쪽 | 4,900원
1938년 최초 출간된 글쓰기책. 1987년 재출간된 이래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후 박물관 서점에서 계속 팔려나가며 '창조적 영감'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아티스트에게 고전이 된 이 책, <글을 쓰고 싶다면>은, 2008년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으로 국내 번역소개된 후 절판되었다가 2016년 '글쓰기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출판문화공간에서 <글을 쓰고 싶다면>(If you want to write)이라는 원서에 충실한 이름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저·역자 소개 ▼
글쓰기책의 고전 『글을 쓰고 싶다면』은 1938년에 출간된 이래 70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으며,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칼 샌드버그는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쓰인 글쓰기책 중 최고다”라는 말을 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후 15년 동안 출판사에서 책을 만들었고, 이후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에서 미국문학을 공부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디어리더』, 옮긴 책으로는 『시체를 부위별로 팝니다』, 『1000가지 감정』, 『왜 소중할까요』 시리즈, 『바위에 가로막힌 오또』 등이 있다. .
차례 ▼
서문
1. 누구에게나 재능, 독창성, 이야깃거리가 있다
2. 상상력은 모든 사람의 성체이다
3. 왜 르네상스 귀족들은 소네트를 썼나
4. 상상력은 천천히, 조용히 온다
5. “행하지 못할 욕망을 키우느니 아이를 요람에서 죽여라”
6. “늘 젊고 살아 있는 시인이 우리 안에 잠자고 있음을 알라”
7. 글을 쓸 때는 사자처럼, 해적처럼 경솔하고 무모하라!
8. 퇴짜통지에 낙담하거나 기죽지 말아야 하는 이유
9. 사람들은 인간적 자아와 신성한 자아를 혼동한다
10. 왜 집안일을 지나치게 하는 여성들은 글을 쓰려면 게을러져야 하나
11. 미세한 진실
12. 예술은 감염이다
13. 삼차원
14. 무턱대고, 저돌적으로, 충동적으로, 정직하게 일기를 쓰라
15. 당신이 모르는 당신 안의 것 ? 마르지 않는 생각의 샘
16. 상상력 사용법
17. “격분한 호랑이가 훈련받은 말보다 현명하다”
18. “얼굴이 빛나지 않는 자는 별이 되지 못한다”
옮긴이 후기
편집자 추천글 ▼
박물관에서 팔린 책, 시간이 사라진 어떤 책
브렌다 유랜드의 1938년작, 『글을 쓰고 싶다면』
“지금까지 글쓰기책 중 최고” (칼 샌드버그)
“아멘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NPR)
힘이란 건 보이지 않는다. 푸코가 말했듯 다만 작동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한 어떤 힘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자, 긴 시간을 뚫고 살아남는 책의 힘을 보자. 『글을 쓰고 싶다면』을 보고 있으면 출간연도를 계속 확인하게 된다. 21세기에도 이토록 생생한 책이 1938년 책이라니? 강력한 저자의 메시지는 시간을 무화시키며 2016년도의 우리를 브렌다 유랜드의 글쓰기 워크숍 현장으로 데리고간다.
1938년에 나왔을 때는 “모두가 자기 안에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다니, 괜히 재능없는 사람들한테 바람넣지 말라”며 비판을 받았지만 1987년 눈 밝은 이에 의해 재출간되었을 때는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된 책. 박물관 서점에서 계속 팔려나가며 ‘창조적 영감’이 필요한 모든 종류의 아티스트에게 고전이 된 책. 2008년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으로 국내 번역소개된 후 절판된 이 책이, 2016년 ‘글쓰기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출판문화공간에서 『글을 쓰고 싶다면』(If you want to write)이라는 원서에 충실한 이름으로 새롭게 선보인다. 다시 한 번, 도무지 죽지 않는 책의 힘을 실감한다. 좋은 책은 영원히 산다.
장금이는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난다고 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하기 전 우리는 한번 망설인다. 수업시간에 잘 모르겠다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손들고 질문을 하지도 못한다.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늘 타인의 눈과 판단을 신경쓰기 때문이다.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내가 쓴 문장이 별로면 어떡하지?’ ‘남들이 싫어하면 어쩌지?’
“어쩌다가 우리 안의 창조적 충동이 죽어 버리는 걸까? 당신 작문의 여백에다 파란색 펜으로 “진부함, 다시 쓸 것”이라고 사납게 써갈긴 국어 선생이 그것을 죽이는 걸 도왔다. 비평가들도 그것을 죽이고, 가족들조차 이 일에 조력한다. 가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남편은 이 창조적 충동의 탁월한 살해자이다. 형은 동생을 비웃음으로써 그것을 죽인다. 그 결과 모든 사람은 어떤 일에 조금이라도 의욕과 열정을 보이거나 진지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수치스럽고 부끄럽게 여긴다.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생과 비평가와 부모와 그밖에 유식한 체하는 친지들이 당신의 어떤 글을 보고 나서 대번에 교만하고 까다롭게 굴면서 잘못을 열거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어허, 맞춤법이 틀린 단어가 하나 있구나!” ? 마치 셰익스피어가 철자법을 알기라도 했다는 듯하다! 철자와 문법과 수사법 책에서 배운 내용이 자유로움과 상상력에 무슨 대단한 관련이라도 있기라도 한 듯하다!” (본문 18~19쪽)
직업으로서의 비평가뿐 아니라 우리의 의욕과 결과에 대해 평가하는 모든 사람들을 신경쓰지 말라는 브렌다 유랜드. 남들을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글을 쓰고자 하는 우리가, 뭔가 ‘다른’ 걸 해보고자 하는 우리가 버려야 할 제1과제이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고 있는 이상 그 자기검열은 우리를 “불안하고 소심하고 위축된 완벽주의자로 만들어 버리고, 그리하여 셰익스피어만큼 좋은 글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쓰지 못할 만큼 완전히 겁을 먹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모두 대문호처럼 쓸 수 없는 것은 자명하므로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한 달 또 한 달, 그리고 십 년 또 십 년 동안 미루기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쓰고 싶다.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걸 소망으로만 간직한 채 살기는 싫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좋다고 말해주는 친구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데도 더 더 조금 더 들려달라고 말하는 사람들, 나를 이해하길 원하는 친구들이, 글을 쓰고 싶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자기검열과 불안은 우리로 하여금 홍시맛이 나더라도 홍시맛이 난다고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내가 틀리면 어쩌지, 남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이 걱정을 내려놓고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자유로움은 우리를 쓰게 만든다.
상상력은 천천히, 조용히 온다
상상력에 대해 말하면서 브렌다 유랜드는 톨스토이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에 대해 쓴 글을 끌어다 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정한 삶을 산 때는 저 늙은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살해한 순간이 아니다. 노파를 죽이는 순간은 물론이고 그 여동생을 죽이는 순간에도 그는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그는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행동 ? 이미 오래전에 장전해 놓은 실탄을 발사하는 동작 ? 을 기계처럼 수행했을 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정한 삶을 산 것은… 자기 방의 소파에 누워 있었을 때였다. … 바로 그때, 동물적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바로 그 공간에서, 늙은 노파를 죽일지 말지 하는 문제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 문제를 결정하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오직 그의 의식만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그 의식 속에서 아주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순간, 제기된 문제에 대해 정확한 결정을 내리려면 우리는 최대한 명쾌함을 필요로 한다. 이 순간에는 한 잔의 맥주나 한 개비 담배가 문제해결을 방해할 수도 있고, 결정을 유보하게 할 수도, 의식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도, 자신의 저급한 동물적 본성의 편에서 문제를 결정하도록 재촉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순간을 라스콜리니코프도 산 것이다.”
그러면서 게으름에 대한 옹호를 시작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까닭은 [……] 오늘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은 어제 게으름을 피운 꽤 긴 시간, 즉 대화나 사업으로부터 격리된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 주려는 데 있다. 병들고 비참해진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빈곤한 어머니와 누이동생에 관해 절망적인 기분에 휩싸인 채 무엇을 해야 할지를 궁리하면서 소파에 누워 있었고, 바로 그때 그는 여러 날 뒤에야 윤곽이 선명해진 살해를 창조해 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은 지난 어느 날 게으름을 피운 시간 동안 생각하고 창조해 낸 것이다. 어느 날 당신은 생각과 상상을 천천히 쌓아올린다.” (본문 56~57쪽)
늘 바쁜 사람들. 걸을 때도, 친구와 만나서도 다른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람들. 바로 우리다. 삶을 온통 효율적 스마트함으로 무장한 우리에게 게으름은 죄악이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말처럼, 또 브렌다 유랜드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듯한 그 무용의 시간은 결국 ‘창조’의 시간이다. 자고로 작가란, 예술가란 섬광과도 같은 아이디어나 영감을 가진 자가 하는 거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 스스로가 재능이 없다거나 재목이 아니라고 믿지 말라는 것. 게으름 피울 수 있는 자라면 모두가 이미 창조적 재능을 품고 있다는 것. 이 말이 뻔하고 다소 무책임해 보인다면, 다시 앞서 톨스토이가 한 말을 읽어봐도 좋겠다. 아니라면, 늘 글을 쓰고 싶다 말하지만, 또, 작가가 되길 꿈꿨지만 아이들을 돌보느라 단 1분도 낼 수 없는 어머니들, 지칠 대로 지쳐 이따금 화를 벌컥내기도 한다는 어머니들에게 브렌다 유랜드가 했다는 말을 곱씹어봐도 좋겠다.
“만약 당신이 하루 한 시간씩 방으로 들어가면서 아이들에게 ‘엄마는 이제부터 5막 비극을 쓸 거란다!’ 하고 말한다면, 그때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는 존경의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당신의 아이들은 어쩌면 극작가가 될지도 모른다.” (본문 140쪽)
쓰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으면, 쓸 시간을 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문장 너머에서 글을 쓰는 당신이라는 사람
체호프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육안으로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영혼으로 슬퍼하기 때문에 걸인이나 고양이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이 진실로 교육이라는 걸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지 말고, 유명한 사람과의 친분을 내세우거나 허세를 부리지 말 것, “과시하지 않고 공적인 자리에서도 집에 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할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사람이 쓰는 글이라면 어떤 정신나간 이야기라도 믿을 수 있을 듯하다. 이렇게 글 뒤에 있는 인격은, 브렌다 유랜드가 ‘삼차원’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녀가 글쓰기의 기술에 앞서 대단히 중시하는 것 중 하나다. 종이 위에는 다만 깔끔하게 쓴 단어와 문장들이 있을 뿐이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적는 것은 바로 ‘나’다. 문장 너머에서 글을 쓰는 사람, 내가 귀를 기울이고 싶은 그 사람의 글을 내가 읽고, 감동을 받고, 나는 영원히 달라진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더 좋은 작가가 되는 유일한 길은 더 좋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 좋은’이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더 착한 체하는’이 아니다.” (본문 178쪽)
밀란 쿤데라는 문학비평집『커튼』에서 야로미르 존이라는 다소 낯선 이름의 소설가를 언급하며 그를 세르반테스처럼 기존의 틀을 대담하게 깬 사람이라는 식의 평을 한다. 왜냐하면 그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대수롭게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불평등…에 대해 쓰지 않고 딱히 관심을 끌 만한 일은 아닌 ‘소음’에 대해 썼다. 남들이 귀기울이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남들이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솔직하게 내가 생각하는 바를 적을 수 있는 사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보이려 애쓰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작가다.
“버니언이라는 땜장이가 감옥에서 자기 나름대로 단어들을 모으고 정렬해서 무엇인가를 쓴다. 또 존 키츠는 다른 단어들과 다른 배열방식으로 무언가를 쓴다. 두 작품 다 위대한 문학이다. 왜냐하면 한 위대한 인간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그런 뒤 자기 생각을 최대한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본문 161쪽)
브렌다 유랜드가 거듭하는 충고, 그게 무엇이든 당신이 원하는 것을 쓰라는 말. 그래야만 정직하고 기쁘게 쓸 것이고 애써 타인들에게 실제의 자기보다 더 똑똑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라는 말. 설령 똑똑해 보인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실제의 자기보다 더 똑똑할 수는 없는데. 그러니, 내가 어떻게 보일지 내 글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품평할지는 생각하지 말고 글을 쓰자. 글쓰기 멘토 브렌다 유랜드의 가르침을 주워섬겨보자―글을 쓰고 싶다면, 그냥 거침없이 쓰라는. 남들이 우리의 창조적 에너지를 죽이게 내버려 두지 말라는.
글을 쓰고 싶은 당신에게 필요한 건, 쓰기 시작할 용기뿐
스콧 피츠제럴드는 말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야기할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사람들에게는 하나같이 저마다, 모두, 이야기할 무언가가 있다.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 사랑하는 이를 기쁘게 하는 것, 감사를 전하는 것, 분노하는 것,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할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글쓰기 경험이 전무한 사람들과의 글쓰기 수업을 무수히 하며 브렌다 유랜드가 확신한 한 가지는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속에 창조적 열정, 샘,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
“핵심은 이렇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안의 중요성과 불꽃에 대해, 자기 안의 신에 대해 위대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슬프게도 그들은 그 불꽃을 믿지 않으며 글로 쓰지도 않기 때문에 그것을 꺼버린다. 혹은 그들은 자신이 지닌 불꽃을 세상과 스스로에게 입증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그 방식이 내면적이며 위대하지 않고 오히려 외면적이며 이기적이다. 즉 그들은 돈이나 권력이나 명성을 좇는 저급한 방식으로 그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작업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당신에게 창조적 재능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 창조적 재능을 살아 있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그것이 위대한 재능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 확실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본문 216쪽)
글쓰기에서 정녕 중요한 것은 많은 단어를 아는 것도,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쓰는 것, 첫 단어를 쓰는 것, 내 안의 창조성과 재능을 사용하는 것, 진짜 나와 대면하는 것, 글쓰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작가들이 글쓰기에 대한 자신들의 방법론을 남겼지만 이 책 『글을 쓰고 싶다면』만큼 진실하고 절실한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그 재능이 쓸 만한 것인지 아닌지 해보기 전에는, 써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브렌다 유랜드의 말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복적이다.
“내가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는 데 15년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만둘 수는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때 나는 이미 너무 유명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로버트 벤츨리)
글을 쓰고 싶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만 쓰는 것뿐. 재능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무턱대고, 거침없이, 솔직하고 과감하게 일단 써봐야 알 수 있다는 브렌다 유랜드의 거듭되는 당부를 듣자. 이 책의 마지막장을 덮고 나면 누구라도 책상서랍이나 가방을 뒤지며 펜을 찾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