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텍스트 읽기
찰스 백스터 지음, 김영지 엮음 | 2016-09-26 | 216쪽 | 15,000원
미네소타 대학교의 문예창작과 교수이자, 미국에서는 단편소설 작가로 이미 입지를 굳힌 찰스 백스터는 말한다. "이 책을 비밀의 문, 숨겨진 계단, 공들여 감춘 지하 동굴, 그리고 그 아래에서 신음하는 유령을 찾아서 돋보기를 들고 자세히 관찰하는 사립 탐정의 보고서로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그가 <서브텍스트 읽기>에서 펼치는 문학비평의 방법론은 단순히 책읽기뿐만 아니라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순간을 다르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어 준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찰스 백스터
『그리폰』(Gryphon), 『믿는 사람들』(Believers), 『솔과 팻지』(Saul and Patsy) 등 십여 권의 소설과 단편집을 냈고, 2016년에 출간한 『당신이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There's Something I Want You to Do) 는 단편소설 어워드인 <스토리 프라이즈>의 최종 후보에 오른 바 있다. 또,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피스트 오브 러브』(Feast of Love) 는 2000년 내셔널 북 어워드의 최종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책 『서브텍스트 읽기』가 포함된 문학/비평 시리즈 <The Art of Series>의 기획.편집자이고, 현재 미네소타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이 김영지
UCLA에서 인류학을 전공, 철학을 부전공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직장 생활도 오래했다. 번역가가 되면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고, 다양한 책도 소개하고,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줄 알고 바른 번역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번역을 하고 있다. 『노스페이스의 지퍼는 왜 길어졌을까?』를 번역했다.
차례 ▼
서문 5
1. 연출의 기술 15
2. 숨은 의미 찾기 43
3. 들리지 않는 선율 77
4. 어조와 호흡 105
5. 장면 만들기 혹은 소란 피우기 133
6. 얼굴의 상실 165
옮긴이 후기 201
저자가 이야기하는 책들 207
편집자 추천글 ▼
“우리는 읽지만, 사실은 읽지 않는다”
책은,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1. 들리지 않는 이야기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비대칭, 간극이 있다. 생산(저술)과 소비(독서)라고 하는 역할의 차이는 차라리 사소하다. 더 큰 차이는 바로 책에 들이는 시간이다. 책 한 권을 쓰는 데 짧게는 몇 개월에서 몇 년, 몇십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읽는 것은 그렇지 않다. 글을 쓴 사람이 온 기력을 쥐어짜내 썼다고 해서 읽는 사람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좀 지루하다 싶은 부분에서 독자는 하릴없이 딴 생각을 하고 과감히 건너뛰기도 한다. 작가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노릇이다. 읽는 데 고작 1,2분 걸릴 그 부분을 쓰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그러나 본인이 십여 권이 넘는 소설과 소설집을 내온 작가이자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기도 한 찰스 백스터는 글쓴이만큼, 어쩌면 글쓴이보다 더 공을 들여 문장과 문장 너머를 읽는다. 『서브텍스트 읽기』는 글의 표면과 표면 아래의 영역까지를 읽고자 하는 책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으려는 시도이다. “고래를 잡으려는 에이해브의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그저 두꺼운 책으로만 그쳤을 『모비딕』,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피엔딩을 의심케 하는 『위대한 개츠비』…. 그는 줄거리와 플롯을 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이야기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말은 찰스 백스터 본인의 말마따나 말장난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순간 그것이 수사가 아님을 우리는 직감한다.
2. 어떻게 볼 것인가
그렇다면, 불가능한 과업으로 느껴지는 ‘안 보이는 것 보기’, ‘안 들리는 것 듣기’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족의 매장」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 그녀는 두려움으로 뒤돌아보며
계단을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주저하면서 한 발을 떼다가 말았고
몸을 세우고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늘 보는 것이 무엇이오, 알고 싶군.”
… “이제 알아야겠어 - 여보, 말을 해봐.”
그녀는 도움을 거부하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세를 누그러뜨리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그가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보게 내버려 두었다.
눈먼 인간 - 참으로 그는 한동안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아.”
아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참이고, 둔하다면 둔하다고 할 수 있는 남편은 올라가고 있다. 계속 창밖만 보는 아내에게 묻는다. 무엇을 보느냐고. 남편은 이 질문이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아내의 회피와 침묵도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남편이 이번엔 꼭 답을 들어야겠다며 거듭 묻는다. 말해줘도 어차피 모를 거라며 알려주는 아내. 아내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본 남편이 신음소리를 내는데, 한번이 아니고 두 번을 낸다. 아내는 아이의 무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 본다고 하면 주의를 기울이기 힘든 짧은 순간에 지나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20초 남짓이 될 이 상황과 장면에 로버트 프로스트는 왜 시 하나를 할애했을까? 보여지는 건 계단과 창문과 아내와 남편의 짧은 대화가 다이지만,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듣는다. 두 사람의 냉랭한 사이는 오래되었을 것이고, 아마 그것은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며, 아이의 죽음을 남편이 비교적 잘 넘긴 것과는 달리 아내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 전체는 보이지 않거나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다. 부부의 모든 행위는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차이는 적의와 분노에 불꽃을 일으킨다. 이 두 사람은 적절한 말이 무엇인지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자면 언쟁을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 통로를 막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여느 부부나 연인일 수도 있다. 그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언쟁을 시작하고 또 그 때문에 자신들의 말과 행동에 당황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이 장면은 긴장감이 생생한데, 어쩌면 두 사람이 시간을 초월해 언쟁을 끝없이 계속할 것만 같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본문 34~35쪽)
단어와 문장에서 보여주는 것 말고, 그 사이, 그 아래, 그 너머, 그 이후의 것들이 우리의 감정을 흔든다. 이것이 서브텍스트이고, 또 서브텍스트가 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브텍스트는 결정적인 말 한마디보다, 결정적인 말 한마디가 나올 찰나에 침묵하는 그 고요에 자리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도 잘하고 시끌벅적한 주인공이 왜 정작 그의 언변이 필요한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한다. 또한 말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 들려주는 바가 더 많다.
“언젠가 한번은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끈덕지게 남자친구의 잘못들을 내게 말했다. 근본적인 잘못을 상세히 말한 뒤 그 다음에는 기꺼이 눈감아 줄 수 있는 정도의 부차적인 잘못을 말했고, 이에 나는 공감의 ‘소리’를 제공했다. 그러자 그녀는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그의 잘못들을, 마치 내가 그녀의 지루한 설명을 전혀 듣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무심함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대화를 관찰할 수 없는 상태로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고막을 찢는 듯 큰소리로 들려서 아마 그러지 않을 때도 생각이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말은 어떤 까닭인지 그녀 자신에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 103~104쪽)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 더 놀라운 건, 자기 자신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그 말이 어떤 의도와 의미를 지녔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현대에 오면서 두드러지는 인간 삶의 현상이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영되어 있다. 19세기, 20세기 소설에서 인물들은 상대방의 말을 오해는 할망정 듣지 않는 일은 없는데, 지금은 왜 그럴까.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들 속에서 귀를 막고 관심을 끊고 듣지 않는 훈련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된 건 아닐까.
동시대의 작가라면, 무조건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이해에 가닿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 모두가 기이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 써야 한다.―찰스 백스터가 ‘서브텍스트의 기술’(The Art of Subtext―이 책의 원제)로 꼽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호텔 숙박료는 가장 합리적인데 말이지.’ 긴 이빨 사이로 그녀의 마른 입이 움직였다.”
저자가 『서브텍스트 읽기』에서 탁월한 효과가 발생하는 예로 다루고 있는 캐서린 앤 포터의 「기울어진 탑」일부이다. 화가 난 여주인의 불안과 분노를 드러내는 부분인데, 장면의 속도를 늦춘 것뿐 아니라 저 ‘긴 이빨’도 효과를 내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늑대처럼 말이다. (본문 121쪽)
그러나 이 늑대 같은 느낌은 책 어디에도 문자로 적혀 있지 않다. 바로 이런 느낌이 보여지는 텍스트(text) 아래에(sub) 있는 것들이고, 우리가 책을 읽고 쓸 때 서브텍스트(subtext)를 의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3. 현실의 서브텍스트 읽기
그러나 비단 책뿐일까? 저자가 들려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대화, 사람들의 서브텍스트 읽는 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서브텍스트를 의식하게 된다.
“오늘 아침,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환하기 위해 정비소에 갔다. 차를 점검해 준 남자는 흰 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꽤 짧게 이발을 했고, 큰 덩치는 고등학교 시절 풋볼 선수였거나, 혹은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뛰며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잘 정돈된 금색의 턱수염도 있었다. 착실해 보였지만, 최근에 와서야 그런 인상을 갖춘 듯했다. 흰 셔츠의 깃은 목에 너무 꼭 끼었다. 그의 말투는 분명했으며 문장을 마칠 때마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버릇이 있었다. 질문을 할 때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을 판단할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내 버릇이기 때문에 어쨌거나 나는 사람을 가늠해 본다. 사실 진짜로 내 눈을 끈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손 두꺼운 집게손가락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비명을 지르는 해골이 새겨진 작은 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189쪽)
남자를 본다. 버릇을 눈치챈다. 의복, 문신, 장신구를 본다. 그러나 이것들은 관찰에 따른 사실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불균형, 긴장, 사건사고 이후이다. 긴장감이 고조되거나 사랑에 빠질 때, 혹은 위협적인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사소함을 보게 된다. 세부사항이 너무나 중대해진다. 현실에서 우리도 사실은 서브텍스트 읽기를 해온 셈이다. 다만, 주의를 좀 더 기울이면 된다.
찰스 백스터는 이 책을 존 치버 일기의 한 대목으로 끝맺는다. 일기는 한 못생긴 젊은이가 머리 빗는 장면을 목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빗을 꺼내 머리를 빗는 청년. 그를 보며 문득 전율하는 작가. 누군가는 보지 않는 것,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사소함, 아무것도 아님, 그 태연자약함. 그것들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 이 머리를 빗는 이 몸짓 안에는 태연자약함이라는 경이가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전율은 상호적인 것으로, 내 보기엔 바로 그것이 삶을 이해하는 방법인 것 같다” (『존치버의 일기』)
책도, 이야기도 그렇다.
4. 읽기와 활용―서브텍스트를 읽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대관절 ‘읽기’가 우리 사는 데 무슨 구체적인 효용이 있나. 서브텍스트를 읽는다고 갑자기 사는 게 까무러치게 재미있어지나?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는 사실이 달라지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이 달라진다. 책은 그대로인데, 몇 년 후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은 변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서브텍스트를 읽는 우리가 변할 뿐. 그렇다면 ‘읽기’라는 것은 우리 삶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활동이 아닐까?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만 서로를 듣지 않는다. 어쩌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만 읽지 않는다. 텍스트 너머에 또다른 읽을거리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에 다른 영역이 있음을 아는 순간, 사소한 짜증과 성가심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게 된다. 책이건 현실이건, 서브텍스트를 읽지 않는 한 우리가 『율리시스』를 읽는다 한들, 밀림에 간다고 한들 모든 건 시시하다. 조금 유난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책 『서브텍스트 읽기』는 인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은,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1. 들리지 않는 이야기
저자와 독자 사이에는 엄청난 비대칭, 간극이 있다. 생산(저술)과 소비(독서)라고 하는 역할의 차이는 차라리 사소하다. 더 큰 차이는 바로 책에 들이는 시간이다. 책 한 권을 쓰는 데 짧게는 몇 개월에서 몇 년, 몇십 년이 걸리기도 하지만 읽는 것은 그렇지 않다. 글을 쓴 사람이 온 기력을 쥐어짜내 썼다고 해서 읽는 사람도 그러라는 법은 없다. 좀 지루하다 싶은 부분에서 독자는 하릴없이 딴 생각을 하고 과감히 건너뛰기도 한다. 작가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한 노릇이다. 읽는 데 고작 1,2분 걸릴 그 부분을 쓰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그러나 본인이 십여 권이 넘는 소설과 소설집을 내온 작가이자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기도 한 찰스 백스터는 글쓴이만큼, 어쩌면 글쓴이보다 더 공을 들여 문장과 문장 너머를 읽는다. 『서브텍스트 읽기』는 글의 표면과 표면 아래의 영역까지를 읽고자 하는 책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들으려는 시도이다. “고래를 잡으려는 에이해브의 이야기”이기만 하다면 그저 두꺼운 책으로만 그쳤을 『모비딕』,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해피엔딩을 의심케 하는 『위대한 개츠비』…. 그는 줄거리와 플롯을 넘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볼 때 비로소 이야기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한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는 말은 찰스 백스터 본인의 말마따나 말장난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순간 그것이 수사가 아님을 우리는 직감한다.
2. 어떻게 볼 것인가
그렇다면, 불가능한 과업으로 느껴지는 ‘안 보이는 것 보기’, ‘안 들리는 것 듣기’는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족의 매장」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 그녀는 두려움으로 뒤돌아보며
계단을 내려오려던 참이었다.
주저하면서 한 발을 떼다가 말았고
몸을 세우고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늘 보는 것이 무엇이오, 알고 싶군.”
… “이제 알아야겠어 - 여보, 말을 해봐.”
그녀는 도움을 거부하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자세를 누그러뜨리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그가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보게 내버려 두었다.
눈먼 인간 - 참으로 그는 한동안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마침내 중얼거렸다. “아.” 그리고 다시 한 번 “아.”
아내가 계단을 내려오는 참이고, 둔하다면 둔하다고 할 수 있는 남편은 올라가고 있다. 계속 창밖만 보는 아내에게 묻는다. 무엇을 보느냐고. 남편은 이 질문이 처음이 아니다. 그리고 아내의 회피와 침묵도 처음이 아니다. 그래서 남편이 이번엔 꼭 답을 들어야겠다며 거듭 묻는다. 말해줘도 어차피 모를 거라며 알려주는 아내. 아내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본 남편이 신음소리를 내는데, 한번이 아니고 두 번을 낸다. 아내는 아이의 무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장면을 영화에서 본다고 하면 주의를 기울이기 힘든 짧은 순간에 지나쳐 버릴 것이다. 그러나 20초 남짓이 될 이 상황과 장면에 로버트 프로스트는 왜 시 하나를 할애했을까? 보여지는 건 계단과 창문과 아내와 남편의 짧은 대화가 다이지만, 우리는 이 시를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듣는다. 두 사람의 냉랭한 사이는 오래되었을 것이고, 아마 그것은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며, 아이의 죽음을 남편이 비교적 잘 넘긴 것과는 달리 아내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장면 전체는 보이지 않거나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다. 부부의 모든 행위는 서로에게 결여된 것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차이는 적의와 분노에 불꽃을 일으킨다. 이 두 사람은 적절한 말이 무엇인지 미처 알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하자면 언쟁을 왜 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 통로를 막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는 여느 부부나 연인일 수도 있다. 그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언쟁을 시작하고 또 그 때문에 자신들의 말과 행동에 당황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이 장면은 긴장감이 생생한데, 어쩌면 두 사람이 시간을 초월해 언쟁을 끝없이 계속할 것만 같아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본문 34~35쪽)
단어와 문장에서 보여주는 것 말고, 그 사이, 그 아래, 그 너머, 그 이후의 것들이 우리의 감정을 흔든다. 이것이 서브텍스트이고, 또 서브텍스트가 하는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브텍스트는 결정적인 말 한마디보다, 결정적인 말 한마디가 나올 찰나에 침묵하는 그 고요에 자리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도 잘하고 시끌벅적한 주인공이 왜 정작 그의 언변이 필요한 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가 중요하다. 역설적이게도,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한다. 또한 말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 들려주는 바가 더 많다.
“언젠가 한번은 남자친구와 헤어진 여자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끈덕지게 남자친구의 잘못들을 내게 말했다. 근본적인 잘못을 상세히 말한 뒤 그 다음에는 기꺼이 눈감아 줄 수 있는 정도의 부차적인 잘못을 말했고, 이에 나는 공감의 ‘소리’를 제공했다. 그러자 그녀는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그의 잘못들을, 마치 내가 그녀의 지루한 설명을 전혀 듣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가 목격하고 있는 것이 무심함보다 더 복잡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대화를 관찰할 수 없는 상태로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고막을 찢는 듯 큰소리로 들려서 아마 그러지 않을 때도 생각이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말은 어떤 까닭인지 그녀 자신에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본문 103~104쪽)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서로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데, 더 놀라운 건, 자기 자신이 하는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그 말이 어떤 의도와 의미를 지녔는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현대에 오면서 두드러지는 인간 삶의 현상이고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로 반영되어 있다. 19세기, 20세기 소설에서 인물들은 상대방의 말을 오해는 할망정 듣지 않는 일은 없는데, 지금은 왜 그럴까.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광고들 속에서 귀를 막고 관심을 끊고 듣지 않는 훈련을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된 건 아닐까.
동시대의 작가라면, 무조건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또 이해에 가닿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로의 말을 듣지 않는 것에 대해, 모두가 기이할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것에 대해 써야 한다.―찰스 백스터가 ‘서브텍스트의 기술’(The Art of Subtext―이 책의 원제)로 꼽는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호텔 숙박료는 가장 합리적인데 말이지.’ 긴 이빨 사이로 그녀의 마른 입이 움직였다.”
저자가 『서브텍스트 읽기』에서 탁월한 효과가 발생하는 예로 다루고 있는 캐서린 앤 포터의 「기울어진 탑」일부이다. 화가 난 여주인의 불안과 분노를 드러내는 부분인데, 장면의 속도를 늦춘 것뿐 아니라 저 ‘긴 이빨’도 효과를 내고 있다. 그녀는 무엇인가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다. 늑대처럼 말이다. (본문 121쪽)
그러나 이 늑대 같은 느낌은 책 어디에도 문자로 적혀 있지 않다. 바로 이런 느낌이 보여지는 텍스트(text) 아래에(sub) 있는 것들이고, 우리가 책을 읽고 쓸 때 서브텍스트(subtext)를 의식해야 하는 이유이다.
3. 현실의 서브텍스트 읽기
그러나 비단 책뿐일까? 저자가 들려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대화, 사람들의 서브텍스트 읽는 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서브텍스트를 의식하게 된다.
“오늘 아침,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환하기 위해 정비소에 갔다. 차를 점검해 준 남자는 흰 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꽤 짧게 이발을 했고, 큰 덩치는 고등학교 시절 풋볼 선수였거나, 혹은 대학에서 풋볼 선수로 뛰며 정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잘 정돈된 금색의 턱수염도 있었다. 착실해 보였지만, 최근에 와서야 그런 인상을 갖춘 듯했다. 흰 셔츠의 깃은 목에 너무 꼭 끼었다. 그의 말투는 분명했으며 문장을 마칠 때마다 고개를 뒤로 젖히는 버릇이 있었다. 질문을 할 때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사람을 판단할 이유는 없지만, 그것은 내 버릇이기 때문에 어쨌거나 나는 사람을 가늠해 본다. 사실 진짜로 내 눈을 끈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라 오른손 두꺼운 집게손가락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비명을 지르는 해골이 새겨진 작은 문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문 189쪽)
남자를 본다. 버릇을 눈치챈다. 의복, 문신, 장신구를 본다. 그러나 이것들은 관찰에 따른 사실일 뿐 별다른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불균형, 긴장, 사건사고 이후이다. 긴장감이 고조되거나 사랑에 빠질 때, 혹은 위협적인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사소함을 보게 된다. 세부사항이 너무나 중대해진다. 현실에서 우리도 사실은 서브텍스트 읽기를 해온 셈이다. 다만, 주의를 좀 더 기울이면 된다.
찰스 백스터는 이 책을 존 치버 일기의 한 대목으로 끝맺는다. 일기는 한 못생긴 젊은이가 머리 빗는 장면을 목격한 것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빗을 꺼내 머리를 빗는 청년. 그를 보며 문득 전율하는 작가. 누군가는 보지 않는 것, 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사소함, 아무것도 아님, 그 태연자약함. 그것들에 대한 이해 없이 우리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여기, 이 머리를 빗는 이 몸짓 안에는 태연자약함이라는 경이가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전율은 상호적인 것으로, 내 보기엔 바로 그것이 삶을 이해하는 방법인 것 같다” (『존치버의 일기』)
책도, 이야기도 그렇다.
4. 읽기와 활용―서브텍스트를 읽는 것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대관절 ‘읽기’가 우리 사는 데 무슨 구체적인 효용이 있나. 서브텍스트를 읽는다고 갑자기 사는 게 까무러치게 재미있어지나?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는 거라는 사실이 달라지나?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을 인식하는 우리의 감각이 달라진다. 책은 그대로인데, 몇 년 후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은 변하지 않는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서브텍스트를 읽는 우리가 변할 뿐. 그렇다면 ‘읽기’라는 것은 우리 삶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쉬운 활동이 아닐까?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하지만 서로를 듣지 않는다. 어쩌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책을 읽지만 읽지 않는다. 텍스트 너머에 또다른 읽을거리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에 다른 영역이 있음을 아는 순간, 사소한 짜증과 성가심으로 가득한 우리의 일상은 더 이상 전과 같지 않게 된다. 책이건 현실이건, 서브텍스트를 읽지 않는 한 우리가 『율리시스』를 읽는다 한들, 밀림에 간다고 한들 모든 건 시시하다. 조금 유난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책 『서브텍스트 읽기』는 인생의 비밀을 담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