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모양
초선영 지음 | 2016-06-20 | 296쪽 | 15,000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 하나로 국적불문, 3천 명 가까운 사람의 '내면초상화'를 그려준 거리의 아티스트, 내면초상화가 초선영의 그림 에세이. 스스로를 들여다 볼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바쁘게만 사는 사람들에게 '나'를 생각할 시간을 선물하는 내면초상화가의 7년간의 기록 모음집이다.
나의 마음이건, 남의 마음이건, 그 무엇의 마음이건 '사랑'하면 볼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는 책. 마음이 시끄럽고,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 잠시 멈추고 감정과 시선의 방향을 '나'에게 돌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
저·역자 소개 ▼
저자 초선영
글·그림 작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대학 1년을 휴학하고 혼자 방에서 준비한 책 『나 이상한가요』가 출간되며 글·그림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골방 탈출 후 좀 더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내면초상화’ 작업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도 좋아하는 창작을 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에서 시작한 작업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매주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 나를 초대해주는 장소가 생겨났고, 이 소중한 순간들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울적해질 때면, 나는 이 기록들을 들추며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위안 받는다. 7년간의 기록들을 더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모았고 그 결과물이 『마음의 모양』이다. 2016년 현재 책 집필, 독립출간물 제작, 강의, 전시, 삽화 등 다양한 창작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선물하는 작가로 남고 싶다.
차례 ▼
프롤로그
1부
2768명의 마음을 그리다
내면초상화의 시작
내면초상화의 추억
작업할 때의 마음가짐
2부
새싹처럼 돋아나는 마음들
파도에 흔들리는 마음들
길을 잃은 마음들
색색이 다르게 빛나는 마음들
행복알갱이로 빼곡한 마음들
아름답게 어우러진 마음들
열매처럼 익어가는 마음들
에필로그
편집자 추천글 ▼
2016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 선정도서
마음은 그려드리지만,
힐링은 셀프입니다
파란색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 앉아 있다. 간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이게 뭐죠? 지나가다가 궁금해 묻는 사람에게 여자가 대답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내면초상화를 그려드려요.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라니. 질문한 이는 잠시 멈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생각 끝에 내놓은 단어로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 끝에 여자가 완성한 그림을 건넨다. 초상화를 건네받은 사람이 돌아선다. 길을 간다. 얼마 후 테이블로 달려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마실 것을 전한다.
이것은 7년 넘게 각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선물해 온 내면초상화가 초선영의 거의 매일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을 이 테이블 앞에서 보내며 종이 위에 그려진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고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순간, 익숙하지만 새로운 행위가 우리 삶으로 들어온다. 마음을 보고, 그것을 그리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스스로에게 기지(旣知)인 동시에 끝없는 미지(未知)다. 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이유다. 나를 표현하라고? 내 마음이 어떠하냐고? 내 안에 있으므로 나 자신밖에 답할 수 없는 그 질문들에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바꾸게 된다. 늘 바깥으로만 향하던 시선과 감정을 나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을 포착한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을 꺼내놓는다. 이제 힘이 생긴다. 나를 들여다보는 힘, 나를 돌볼 수 있는 힘. 나에게 오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나에게 온다. 슈테판 츠바이크도 말한바, “자신에게 한번 솔직했던 사람은 영원히 솔직하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모든 사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나의 시간은 내가 인식하는 삶으로 꽉 채워진다.
여덟 살의 무지개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물었을 때 여덟 살 꼬마 휘가 내놓은 단어는 무지개였다. 작가가 넘겨 짐작하기를 예쁘다거나 신기하다거나 하는 이유를 댈 줄 알았는데 아이의 대답은 달랐다.
“무지개는 비 오고 난 다음에만 보이잖아요.”
“그럼 휘도 무지개처럼 항상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인가요?” (본문 196쪽)
그렇다고 하고 덧붙인 한마디는 “내 마음”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내 마음이 보인다”는 말. 이 말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저암 유한준 선생의 말과 과연 다른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시인이, 문장가가 된다. 나이나 성별, 직업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차원에서 저마다의 삶을 산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초상화가 초선영은 그만의 방식으로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한 발자국, 그것은 모든 발자국
사는 게 괴롭다는 청년. 고민이 많고 잠도 잘 수 없어 매일매일이 끔찍했던 청년. (본문 291쪽)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로 ‘괴로움’ ‘방황’을 내놓던 청년이 열 번째로 내면초상화가를 찾아와 내놓은 단어는 마침내 ‘한 발자국’이었다. 이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발자국이 아니다. 자신에게로 가기 위한 발자국이다. 정기적으로 내면초상화를 그리며 점점 밝고 긍정적인 단어로 바뀌어감과 동시에 청년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괴로움이라는 단어에서 따뜻함, 좋은 사람…으로의 이 변화는 그러나 내면초상화가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해낸 것이다.
자신은 “내면초상화 그림보다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초선영 작가의 말처럼,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오로지 본인, 자신만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다. 초선영 작가가 사람들의 마음은 그려 주지만, 그후에 힐링은 어디까지나 셀프다.
왜 그러고 사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좋은 대학 나와서, 남들 따라가지 않고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느냐. 무섭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느냐. 앞으로의 미래가 두렵지 않느냐. 왜 그러고 사느냐.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초선영 작가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작가는 대답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면 굶진 않을 거”라고.
“받을 것보다는 줄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면 다 되겠지 싶다.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든 주고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비현실적인 사람은 비현실적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니까.”(본문 78쪽)
작가가 말하는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허무맹랑’과는 다르다. 삶에 반드시 따라야 할 룰이 있고, 현실적인 조건이 있고, 우리 모두 ‘진짜’라고 생각하는 어떤 진실이 있다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생각하지만 초선영은 다르다. 삶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룰 같은 건 없고, 현실적인 조건은 환상이며, 진실은 찾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에서 만들어 내는 것임을 믿는다. 사람은 변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세상은 좋은 곳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나아진다면, 수치는 0.00001밀리리터여도 상관없음을 믿는다. 그 믿음이 바로 작가가 7년 동안 남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인 삶을 살게 한 동력이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과 높은 연봉은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아무리 승진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많이 벌어도 부족한 이 ‘현실적’ 틀에서 왜 그러고 사느냐는 질문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건 당연하다는 ‘비현실적’인 대답을 하는 그는 어떤 면에서 지극히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민, 헬조선 탈출을 부르짖으면서도 영원히 ‘안정’과 ‘직장’과 ‘연봉’으로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 남들이 가는 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마음은 그려드리지만,
힐링은 셀프입니다
파란색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 앉아 있다. 간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색연필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이게 뭐죠? 지나가다가 궁금해 묻는 사람에게 여자가 대답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내면초상화를 그려드려요.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라니. 질문한 이는 잠시 멈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생각 끝에 내놓은 단어로 둘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 끝에 여자가 완성한 그림을 건넨다. 초상화를 건네받은 사람이 돌아선다. 길을 간다. 얼마 후 테이블로 달려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마실 것을 전한다.
이것은 7년 넘게 각지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선물해 온 내면초상화가 초선영의 거의 매일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을 이 테이블 앞에서 보내며 종이 위에 그려진 자신의 마음을 받아들고서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리고 이 순간, 익숙하지만 새로운 행위가 우리 삶으로 들어온다. 마음을 보고, 그것을 그리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스스로에게 기지(旣知)인 동시에 끝없는 미지(未知)다. 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이유다. 나를 표현하라고? 내 마음이 어떠하냐고? 내 안에 있으므로 나 자신밖에 답할 수 없는 그 질문들에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바꾸게 된다. 늘 바깥으로만 향하던 시선과 감정을 나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머릿속을 지나가는 것을 포착한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을 꺼내놓는다. 이제 힘이 생긴다. 나를 들여다보는 힘, 나를 돌볼 수 있는 힘. 나에게 오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나에게 온다. 슈테판 츠바이크도 말한바, “자신에게 한번 솔직했던 사람은 영원히 솔직하며, 자신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모든 사람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으므로 앞으로 영원히, 나의 시간은 내가 인식하는 삶으로 꽉 채워진다.
여덟 살의 무지개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를 물었을 때 여덟 살 꼬마 휘가 내놓은 단어는 무지개였다. 작가가 넘겨 짐작하기를 예쁘다거나 신기하다거나 하는 이유를 댈 줄 알았는데 아이의 대답은 달랐다.
“무지개는 비 오고 난 다음에만 보이잖아요.”
“그럼 휘도 무지개처럼 항상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인가요?” (본문 196쪽)
그렇다고 하고 덧붙인 한마디는 “내 마음”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내 마음이 보인다”는 말. 이 말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저암 유한준 선생의 말과 과연 다른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모두 철학자가, 시인이, 문장가가 된다. 나이나 성별, 직업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차원에서 저마다의 삶을 산다.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초상화가 초선영은 그만의 방식으로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한 발자국, 그것은 모든 발자국
사는 게 괴롭다는 청년. 고민이 많고 잠도 잘 수 없어 매일매일이 끔찍했던 청년. (본문 291쪽)
자신을 표현하는 단어로 ‘괴로움’ ‘방황’을 내놓던 청년이 열 번째로 내면초상화가를 찾아와 내놓은 단어는 마침내 ‘한 발자국’이었다. 이는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 필요한 발자국이 아니다. 자신에게로 가기 위한 발자국이다. 정기적으로 내면초상화를 그리며 점점 밝고 긍정적인 단어로 바뀌어감과 동시에 청년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은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괴로움이라는 단어에서 따뜻함, 좋은 사람…으로의 이 변화는 그러나 내면초상화가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해낸 것이다.
자신은 “내면초상화 그림보다는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초선영 작가의 말처럼,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오로지 본인, 자신만이 스스로를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다. 초선영 작가가 사람들의 마음은 그려 주지만, 그후에 힐링은 어디까지나 셀프다.
왜 그러고 사느냐는 질문에 대하여
좋은 대학 나와서, 남들 따라가지 않고 왜 굳이 힘든 길을 가느냐. 무섭지 않느냐. 후회하지 않느냐. 앞으로의 미래가 두렵지 않느냐. 왜 그러고 사느냐.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초선영 작가가 이상해 보이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때마다 작가는 대답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면 굶진 않을 거”라고.
“받을 것보다는 줄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살다 보면 다 되겠지 싶다. 먼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쓰임받는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든 주고받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비현실적인 사람은 비현실적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니까.”(본문 78쪽)
작가가 말하는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허무맹랑’과는 다르다. 삶에 반드시 따라야 할 룰이 있고, 현실적인 조건이 있고, 우리 모두 ‘진짜’라고 생각하는 어떤 진실이 있다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생각하지만 초선영은 다르다. 삶에는 반드시 따라야 할 룰 같은 건 없고, 현실적인 조건은 환상이며, 진실은 찾기보다는 각자의 영역에서 만들어 내는 것임을 믿는다. 사람은 변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세상은 좋은 곳이 될 수 있음을 믿는다. 나아진다면, 수치는 0.00001밀리리터여도 상관없음을 믿는다. 그 믿음이 바로 작가가 7년 동안 남들이 보기에 ‘비현실적’인 삶을 살게 한 동력이다. 그러나 안정된 직장과 높은 연봉은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아무리 승진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많이 벌어도 부족한 이 ‘현실적’ 틀에서 왜 그러고 사느냐는 질문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는 건 당연하다는 ‘비현실적’인 대답을 하는 그는 어떤 면에서 지극히 현실적이지 않은가. 이민, 헬조선 탈출을 부르짖으면서도 영원히 ‘안정’과 ‘직장’과 ‘연봉’으로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 남들이 가는 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