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그림자
최은주 지음 | 2015-11-16 | 216쪽 | 13,000원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문학수업을 통해 삶을 이야기해 온 최은주의 문학에세이. 소설이나 시를 매개로 우리의 일상은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 독서광이자 영문학자가 남긴 독서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저마다 책, 그리고 작가들과의 그림자놀이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놀이이면서 훈련이고, 숨겨진 듯하지만 모두가 보이는 곳에 있는 문학과 독서의 비밀이 이 책에서 드러난다.
저·역자 소개 ▼
저자 최은주
영미문학비평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소속의 NRF 학술연구교수로, 인간과 비인간이 ‘난민화’되는 현상과 이동권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 「경계 횡단의 언어와 환대 (불)가능한 장소」, 「정치적으로 전유되는 이주·국경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그동안 제인 오스틴, 샬럿 브론테, 에드거 앨런 포,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에 나타난 타자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그 연장선에서 《책들의 그림자》, 《런던 유령–버지니아 울프의 거리 산책과 픽션들》을 펴냈다. 그밖에 《죽음, 지속의 사라짐》, 《나이 듦, 유한성의 발견》 등이 있다.
차례 ▼
들어가면서_오래된 놀이, 문학
1장_언어와 사물
느림을 만지다 | 떠나기 위해서, 떠나지 못해서 | 놓친 기억과 만나는 순간 | 낯선 언어, 행복감
2장_이야기의 발견
자발적 행위로서의 놀이 | 주사위 던지기 | 가지 않은 길을 가다 | 날카로운 인식
3장_삶에 대한 태도
방관하지 않는 태도 | 삶의 역설 | 놀라운 발견 | 고백
4장_공감의 언어
고독, 또는 절망 | 진리의 이름 | 불화, 이별 | 가족의 잔인한 얼굴 | 선과 악
5장_주인공이 되다
열등한 사람들, 무대에 서다 | 불행한 존재 | 깨달음의 비극 | 마침내 어른이 되다
6장_ 문학의 비밀
아이러니 | 현재를 완성하는 기억 | 삭제된 얼굴 | 이미지의 진실 | 내용 없는 편지
7장_픽션의 순간들
진실임 직함의 놀이 | 시간을 많이 들이는 사람 | 삶에의 탐구 | 뒤집기의 독서
편집자 추천글 ▼
‘독서’라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가 구멍에 빠지듯 책들의 그림자 속으로 빠지는 경험
“가슴이 뻥 뚫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가슴이 뚫리며 무언가를 잃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사랑이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잃어버릴 것도 없는 것일까? 프랑스 작가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의 일생』을 함께 읽는 수업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더해지는 것일까, 빠지는 것일까, 얘들아.
이 문학수업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문학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하는지, 그게 우리의 실제 삶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문학자로서 독서광으로서 선생으로서, ‘문학’으로 학생들과 삶과 텍스트를 논해온 최은주가 이 책 『책들의 그림자』에서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학수업이다. 단순히 ‘읽기’에 그치지 않는 것, 줄거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 것, 누군가를 만나고 감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사물과 풍경이 문득 이질적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문학을 읽고 쓰고 이야기해 온 저자가 그의 학생들과, 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독서의 풍경에서, 혹은 책들의 그림자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 모른다.
“… 아무리 느낌을 잡아내어 표현하려 하여도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어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생각을 하지만, 언어의 주변만을 맴도는 생각과 감각을 흘려보낸다. 그것들을 주워 올려 표현해 낸 작가의 글을 통해 독자는 자신이 사용했던 언어를 지나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아마데우가 성서가 아닌 다른 책들에서도 언어를 발견하게 되고, 그 언어가 낯선 모든 언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자기만의 언어를 버릴 때까지 그의 안에서 무성히 자랐던 것처럼, 독서를 통한 언어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본문 38쪽)
독서를 권하는 이유,
네 손을 잡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보다 많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고,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질 않고, 가지고 다니기에 무겁고, 유용하지 않고, 써먹을 데가 없고……. 이렇게 책을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항할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차라리 빈곤하다. ‘이게 이게 일단 읽으면 좋은데, 하아,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네.’ 저자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이유로 책읽기를 권한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알 수 없는 것이 독서의 기쁨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어머니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좋은 글의 마술 같은 힘이나 광채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 손을 잡고 책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본문 20쪽)
그러나 ‘책’ 자체, 그리고 책을 읽으라는 말은 식상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독서가 놀이라고 하는 말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오래된 놀이, 문학」). 저자의 말마따나 더 재미있고 더 흥분되는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볼 것 없고 할 일 없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놀이인 동시에 놀이가 아닌 독서. 저자는 말한다. “독서야말로 습관이며 숙련이 필요한 활동”이라고. 여행을 해본 사람이 여행의 기쁨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기쁨은 안락함이 아니다. 오히려 모험에 가까운 험난한 여정이다.” ‘문학=놀이’의 공식이 쉽고 즐겁고 웃음이 가득한 놀이동산에서 말하는 놀이를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슬슬 밝혀진다.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본문 23쪽)
낯섦과의 조우, 기억의 소환,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전복—이런 것들이 책을, 독서를 재미있게 만든다. 계속하고 싶은 놀이가 되게 만든다. 언어로 포착해 내는 세계의 다른 면을 보게 된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주워섬기게 된다. 그때가 바로, 책 읽는 우리가 토끼를 따라 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진짜 이상한 일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밀란 쿤데라와 자가예프스키가 얽히고설키는 시공간
이 책은 일반적인 문학수업의 커리큘럼과는 거리가 멀다. 플롯이나 시대를 따르거나 주제에 따라 진행되는 문학수업이 아니다. 최은주가 『책들의 그림자』에서 하고 있는 문학수업은 책과 작가와 언어의 그림자 밟기 놀이에 가깝다. 최은주의 글 속에서 작품과 작품은 서로를 참조한다. 시대와 지역이 다른 저자들이 글 속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만찬을 벌인다. 그리고 그들이 그 책을 읽는 ‘나’에게 말을 건다. 독자는 작가가 걸어오는 말에 기꺼이 응답한다. 책의 세계에서 작가와 독자는 이미 친구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로 그런 독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비를 피하며, 버스를 타고 내리며 이전에 만났던 작가들을, 작품 속 인물들을 소환해 내 이야기를 건다. 그렇게 독서의 세계에는 때도 장소도 없다. 이제는 우스개로 더 많이 사용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저자가 펼쳐놓는 이야기 속에서 진짜가 된다. 까무룩 잠이 든 사이 에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가 날아들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갑자기 신기루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픽션이기만 할까? 공상의 산물일까? 만약, 공상일 뿐이라면 그것은 무가치한가? 가치가 있다는 건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하는 걸까?
오랜 시간 대학에서 문학수업을 진행해 온 저자의 한 학생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문학작품을 읽으면 어느샌가 물이 촉촉이 스며든 모래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 학생은 이전에 “수학이 싫고 그나마 영어를 좋아해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실제 삶에, 혹은 취업에, 문학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살면서 “햇빛에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는 게 퍽퍽하기만 하고 괴롭다는 말이 입에 달라붙은 우리에게 이 반짝거림의 순간을 주는 것만으로 문학은 충분히 효용이 있는 건 아닐까. 시 한 구절, 소설 한 문장 외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모든 말들과 감정들이 나의 마음에 달라붙는다
다시, “가슴이 뻥 뚫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가슴이 뻥 뚫려서 내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일까, 상대의 마음이 내 속으로 들어와 무언가 더해지는 것일까. 사랑이란 건 무엇일까, 손에 잡혀지지도 않는데. 이름이 뭐냐고, 전화번호 뭐냐고, 너는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고 하는 그런 노래 가사 말고, 진짜로 내가 너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어떤 느낌인 것일까. 우리는 그 ‘말’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머리에 깃털을 꽂아 놓은 듯이 아프다’는 표현은 감각적이지만 낯선 비유이자 새로운 질감이다. 그 느낌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벌써 귀가 간지럽다. 적확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한 독자가, 그리고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독자가, 저자가 이해하고 조명한 세계와 마주했을 때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언어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세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물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낱말들과 결합되는 순간의 경이로움. 독서에서 찾은 생경한 풍경은 독자를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본문 45쪽)
책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보면 내가 익숙하게 보던 나무와 건물은 전과 같지 않다.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 “포개어진 감정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되고 숨은 기쁨을 알아 가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큰 기쁨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해 놓은 문장을 찾아내는 희열뿐만 아니라, “어느 책에서 화자가 헤매던 길의 풍경이나 상처가 된 과거의 아련한 기억 같은 것들이 나의 마음에도 달라붙는” 그 경험은 오로지 나의 심상에서만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를 다른 어떤 행위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활동으로 만든다. 다른 이와 나눌 수 있지만, 같은 것을 나눌 수는 없다는 사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사실은 같은 책을 읽은 게 아니라는 사실. 행간이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없다는 사실. 몇백 쪽에 걸쳐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빛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들이 우리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든다. 스펙터클이 가득한 다른 놀이들을 제치고, 다른 게 아닌 바로 책을.
“소설의 행간 행간마다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빛나고 있다.”(본문 206쪽)
앨리스가 구멍에 빠지듯 책들의 그림자 속으로 빠지는 경험
“가슴이 뻥 뚫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가슴이 뚫리며 무언가를 잃게 되는 것일까? 아니라면, 사랑이란 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잃어버릴 것도 없는 것일까? 프랑스 작가 마리보의 소설 『마리안의 일생』을 함께 읽는 수업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더해지는 것일까, 빠지는 것일까, 얘들아.
이 문학수업은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는 문학을 가지고 어떤 것들을 하는지, 그게 우리의 실제 삶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문학자로서 독서광으로서 선생으로서, ‘문학’으로 학생들과 삶과 텍스트를 논해온 최은주가 이 책 『책들의 그림자』에서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학수업이다. 단순히 ‘읽기’에 그치지 않는 것, 줄거리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 것, 누군가를 만나고 감정이 미묘하게 달라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너무나 일상적이었던 사물과 풍경이 문득 이질적이 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 문학을 읽고 쓰고 이야기해 온 저자가 그의 학생들과, 또 독자들과 나누고자 하는 게 바로 이런 것들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만이 우리가 독서의 풍경에서, 혹은 책들의 그림자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일지 모른다.
“… 아무리 느낌을 잡아내어 표현하려 하여도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언어는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생각을 하지만, 언어의 주변만을 맴도는 생각과 감각을 흘려보낸다. 그것들을 주워 올려 표현해 낸 작가의 글을 통해 독자는 자신이 사용했던 언어를 지나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아마데우가 성서가 아닌 다른 책들에서도 언어를 발견하게 되고, 그 언어가 낯선 모든 언어를 곰곰이 생각하고 자기만의 언어를 버릴 때까지 그의 안에서 무성히 자랐던 것처럼, 독서를 통한 언어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본문 38쪽)
독서를 권하는 이유,
네 손을 잡고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보다 많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고,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질 않고, 가지고 다니기에 무겁고, 유용하지 않고, 써먹을 데가 없고……. 이렇게 책을 읽지 않는 이유에 대항할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차라리 빈곤하다. ‘이게 이게 일단 읽으면 좋은데, 하아,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네.’ 저자는, 이 책은, 바로 그런 이유로 책읽기를 권한다.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알 수 없는 것이 독서의 기쁨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어머니에게는 아들이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다. 그가 어머니에게 아무리 이야기해도 좋은 글의 마술 같은 힘이나 광채를 이해시킬 수는 없다. 손을 잡고 책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본문 20쪽)
그러나 ‘책’ 자체, 그리고 책을 읽으라는 말은 식상하고 지루하다. 재미가 없다. 독서가 놀이라고 하는 말도 크게 와닿지 않는다(「오래된 놀이, 문학」). 저자의 말마따나 더 재미있고 더 흥분되는 놀이는 얼마든지 있다. 볼 것 없고 할 일 없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놀이인 동시에 놀이가 아닌 독서. 저자는 말한다. “독서야말로 습관이며 숙련이 필요한 활동”이라고. 여행을 해본 사람이 여행의 기쁨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도 그렇다고. “그들에게 기쁨은 안락함이 아니다. 오히려 모험에 가까운 험난한 여정이다.” ‘문학=놀이’의 공식이 쉽고 즐겁고 웃음이 가득한 놀이동산에서 말하는 놀이를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이 슬슬 밝혀진다.
“문학은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미미한 것들을 소환해내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관념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 문학은 우리의 머릿속에 짧게 스쳐가는 단상이나 눈앞에 빠르게 지나가는 파편적인 모습들을 정밀하고 미묘하게 묘사해 내서 결코 인식할 수 없었던 시간에 대한, 현상에 대한, 기억에 대한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본문 23쪽)
낯섦과의 조우, 기억의 소환,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전복—이런 것들이 책을, 독서를 재미있게 만든다. 계속하고 싶은 놀이가 되게 만든다. 언어로 포착해 내는 세계의 다른 면을 보게 된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말을 주워섬기게 된다. 그때가 바로, 책 읽는 우리가 토끼를 따라 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진짜 이상한 일은, 책의 마지막장을 덮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다.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밀란 쿤데라와 자가예프스키가 얽히고설키는 시공간
이 책은 일반적인 문학수업의 커리큘럼과는 거리가 멀다. 플롯이나 시대를 따르거나 주제에 따라 진행되는 문학수업이 아니다. 최은주가 『책들의 그림자』에서 하고 있는 문학수업은 책과 작가와 언어의 그림자 밟기 놀이에 가깝다. 최은주의 글 속에서 작품과 작품은 서로를 참조한다. 시대와 지역이 다른 저자들이 글 속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고 만찬을 벌인다. 그리고 그들이 그 책을 읽는 ‘나’에게 말을 건다. 독자는 작가가 걸어오는 말에 기꺼이 응답한다. 책의 세계에서 작가와 독자는 이미 친구다.
저자는 이 책에서 바로 그런 독자의 마음을 대변한다. 비를 피하며, 버스를 타고 내리며 이전에 만났던 작가들을, 작품 속 인물들을 소환해 내 이야기를 건다. 그렇게 독서의 세계에는 때도 장소도 없다. 이제는 우스개로 더 많이 사용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저자가 펼쳐놓는 이야기 속에서 진짜가 된다. 까무룩 잠이 든 사이 에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가 날아들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갑자기 신기루 같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픽션이기만 할까? 공상의 산물일까? 만약, 공상일 뿐이라면 그것은 무가치한가? 가치가 있다는 건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말하는 걸까?
오랜 시간 대학에서 문학수업을 진행해 온 저자의 한 학생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문학작품을 읽으면 어느샌가 물이 촉촉이 스며든 모래가 햇빛에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는다”고. 이 학생은 이전에 “수학이 싫고 그나마 영어를 좋아해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실제 삶에, 혹은 취업에, 문학이 어떻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누군가는 살면서 “햇빛에 반짝거리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는 게 퍽퍽하기만 하고 괴롭다는 말이 입에 달라붙은 우리에게 이 반짝거림의 순간을 주는 것만으로 문학은 충분히 효용이 있는 건 아닐까. 시 한 구절, 소설 한 문장 외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다른 종류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모든 말들과 감정들이 나의 마음에 달라붙는다
다시, “가슴이 뻥 뚫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가슴이 뻥 뚫려서 내 마음이 빠져나가는 것일까, 상대의 마음이 내 속으로 들어와 무언가 더해지는 것일까. 사랑이란 건 무엇일까, 손에 잡혀지지도 않는데. 이름이 뭐냐고, 전화번호 뭐냐고, 너는 나의 취향을 저격했다고 하는 그런 노래 가사 말고, 진짜로 내가 너와 사랑에 빠졌다는 건 어떤 느낌인 것일까. 우리는 그 ‘말’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머리에 깃털을 꽂아 놓은 듯이 아프다’는 표현은 감각적이지만 낯선 비유이자 새로운 질감이다. 그 느낌을 상상해 보는 것으로 벌써 귀가 간지럽다. 적확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한 독자가, 그리고 생각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한 독자가, 저자가 이해하고 조명한 세계와 마주했을 때 그동안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언어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세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똑같은 사물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낱말들과 결합되는 순간의 경이로움. 독서에서 찾은 생경한 풍경은 독자를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본문 45쪽)
책에서 빠져나와 일상을 보면 내가 익숙하게 보던 나무와 건물은 전과 같지 않다.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 “포개어진 감정의 조각들을 발견하게 되고 숨은 기쁨을 알아 가는 것”이야말로 책을 읽는 큰 기쁨이다. 내가 느낀 감정을 적확하게 표현해 놓은 문장을 찾아내는 희열뿐만 아니라, “어느 책에서 화자가 헤매던 길의 풍경이나 상처가 된 과거의 아련한 기억 같은 것들이 나의 마음에도 달라붙는” 그 경험은 오로지 나의 심상에서만 가능한 유일한 것이라는 사실은 독서를 다른 어떤 행위와도 구별되는 독특한 활동으로 만든다. 다른 이와 나눌 수 있지만, 같은 것을 나눌 수는 없다는 사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사실은 같은 책을 읽은 게 아니라는 사실. 행간이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없다는 사실. 몇백 쪽에 걸쳐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빛나고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실들이 우리로 하여금 책을 읽게 만든다. 스펙터클이 가득한 다른 놀이들을 제치고, 다른 게 아닌 바로 책을.
“소설의 행간 행간마다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빛나고 있다.”(본문 2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