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현상학 환상 없는 사랑을 위하여
철학의 정원 48
헤르만 슈미츠 지음, 하선규 옮김 | 2022-04-15 | 704쪽 | 29,800원
사랑이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랑이 왜 그렇게 자주 실패를 맞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사랑하기’에서 얼마나 현명해질 수 있을까? 국내 처음 소개되는 독일 현대철학의 이단아이자 거목,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의 현상학』에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내어 놓는다.
저·역자 소개 ▼
저자 헤르만 슈미츠 Hermann Schmitz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현대철학과 현상학을 대표하는 독창적 사상가로 평가된다. 1955년 후기 괴테 사상에 관한 박사논문을, 1958년 헤겔을 ‘개별성의 사상가’로서 재평가한 교수자격 논문을 썼으며, 1971년부터 1993년까지 독일 킬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절대적인 기억력’을 가졌던 슈미츠는 방대한 주저 『철학의 체계』(10권)를 비롯하여, 총 58권의 저서와 165편의 학술논문 그리고 35편의 서평을 남겼다. 그의 신체현상학 연구를 계승, 확장하려는 ‘새로운 현상학 연구회’(Gesellschaft fur Neue Phanomenologie)가 1993년부터 매년 심포지움을 개최하며 활발히 활동 중이며, 2006년에는 독일 로스토크대학교 철학과에 ‘헤르만 슈미츠 재단 현상학 연구’ 교수직이 마련되었다. 슈미츠의 ‘새로운 현상학’은 1970년대부터 신체와 감정의 철학, 주관성 이론, 분위기의 미학은 물론, 철학의 경계를 넘어 의학, 심리학, 실천적 신학, 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역자 하선규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1988~1998년 독일 쾰른대학교와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영화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동 대학원 미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이성과 완전성』(독일어, 2005), 『발터 벤야민: 모더니티와 도시』(공저, 2010), 『문화산업 이미지 예술』(공저, 2012),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2017), 『서양 미학사의 거장들』(2018) 등이 있으며, 역서로 『프리드리히 실러의 미적 교육론』(공역, 2015), 『불안과 함께 살아가기』(2016)가 있다. 칸트, 바움가르텐, 레싱, 헤르더, 하만, 실러, 벤야민, 크라카우어, 키르케고르, 슈미츠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중심 연구 분야는 18~20세기 서양미학사, 철학적 인간학, 매체미학, 영상미학이다.
차례 ▼
1장 주제의 한정 17
2장 주제의 동기 25
3장 역사적 입문 37
1. 그리스인들의 두 사람 사이 성적인 사랑│2. 로마인들의 성취
4장 감정과 느낌으로서의 사랑 65
1. 감정의 공간성│2. 감정을 느끼는 일│3. 확장 공간과 방향 공간│4. 감정의 공간성이 지닌 층들│5. 집중화된 감정의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6. 사랑에서 응축 영역과 정박 지점│7. 사랑과 우정│8. 사랑과 증오
5장 상황으로서의 사랑 131
1. 상황으로서 사랑이 지닌 권위│2. 인상들│3. 개인적 상황│4. 공동의 상황│5. 감정과 상황 사이의 사랑│6. 이해와 신뢰│7. 주도 인상│8. 사랑의 성숙
6장 사랑과 주관성 205
1. 주관성의 응축성│2. 사랑하기의 외로움│3. 사랑의 본래적 공동성과 비본래적 공동성│4. 안나 카레니나
7장 사랑과 신체 233
1. 사랑과 희열│2. 사랑에서 내체화
8장 사랑의 역사에 대하여 301
1. 실마리들│2. 고대│3. 중세 시대│4. 근대 이후│5. 20세기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핵심 용어 해설 441
옮긴이 해제 450
옮긴이 후기 479
슈미츠 철학에 대한 연구 문헌 486
색인 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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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슈미츠의 ‘새로운 현상학’으로 파헤치는 ‘사랑’
사랑이 배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원하고, 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랑이 왜 그렇게 자주 실패를 맞는 것일까?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사랑하기’에서 얼마나 현명해질 수 있을까? 국내 처음 소개되는 독일 현대철학의 이단아이자 거목, 헤르만 슈미츠는 『사랑의 현상학』에서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해답을 내어 놓는다.
사랑을 통찰하는 필수조건, 존재함의 요소들
사랑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생각보다 찾기 쉽지 않다. 슈미츠가 보기에 ‘지혜에 대한 사랑’인 철학은 ‘사랑’ 자체에 대한 규명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시도만을 해왔다. 이는 서양철학이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내면)을 객관화/실체화시켜 놓고, 거기에다 주관적 신체를 사로잡는 분위기적인 지각 내용들을 강제로 집어넣은 전통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의 철학은 주관적 사실 그 자체인 사랑을 성찰함에 있어 ‘관념의 하늘’에 머문 채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철학이 의지했던 ‘이성’은 객관적 사실, 즉 논리 추론, 수학적 인식, 실증적 지식에만 그 권능을 발휘했을 뿐이었다.
『사랑의 현상학』에서 슈미츠는 이른바 그의 ‘새로운 현상학’을 통해, 사랑의 근원적인 문제들로 내려간다. 여기서 근원적인 문제들은 추상적인 사상이나 신념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는 살아 있는 삶의 바탕, 즉 ‘신체’, ‘감정’, ‘상황’, ‘인상’이다. 슈미츠는 철학으로써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우리의 사유가 영혼이나 이성이 아닌 삶의 가장 낮은 지점인 신체로 내려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나아가 신체를 감싸는 힘인 ‘감정’, 각각의 인간을 둘러싼 ‘상황’ 그리고 타인에 대한 소통과 이해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인 ‘인상’의 의미까지 명료하면서도 유연하게 체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느낌과 체험을 늘 동반하고 있는 이러한 존재함의 요소들이야말로 사랑을 통찰하는 필수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신체적인 존재이기에, 몸의 느낌으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랑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독특한 정서적 뉘앙스를 띤 상황, 인상을 감지하며, 그것을 기초로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따라서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에 대해 우리가 갖는 온갖 환상과 신비주의, 통념의 원흉이 되는 ‘이성’, ‘실체’ 그리고 특히 ‘영혼’(내면) 중심의 서구 전통을 단호히 거부하며, 두 사람 간의 사랑이 ‘신체’를 압박하는, 두 사람을 하나로 아우르는 상황이란 점을 그의 신체현상학적 방법론과 더불어 여러 실제 사례 및 문학작품을 통해 섬세하게 관찰하고 분석한다.
현명한 삶에 대한 철학으로 가는 힘
삶의 기본조건으로서의 사랑
사랑이라는 ‘상황’은 동물, 식물, 사물 등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하나의 독자적인 유형이다. 상황은 “적어도 하나의 사태가 속해 있는 절대적인 혹은 상대적인 혼돈적 다양체 상태의 전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개념을 바탕으로 ‘인상’을 “명료하지는 않지만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함축적 의미를 잉태하고 있는 상황”으로 정의한다. 이렇듯 ‘인상’은 의미론적으로 ‘상황’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 사랑을 성찰하기에 앞서 상황과 인상의 존재론적 성격을 이렇게 정의한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대화와 신체적 교감은 철학 전통이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끊임없이 대면하고, 탐색하고, 공감하는 드라마임을, 그리고 우리는 이 혼돈적 다양체로서 사랑의 양상을 언제나 헤아려야 하는 과제 앞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한 슈미츠의 논의는 사랑의 인간학적 의미와 역동적인 구조를 해명하는 데 결정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게 된다.
그 돌파구의 끝에서 슈미츠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상황이 합쳐진 사랑이라는 공통의 상황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대변할 수 있는 소명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대한 환상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소명을 지니고 있다면, 사랑의 성숙이라는 긍정적 전망과 사랑하는 이와의 ‘깊은 신뢰’라는 가능성에 도달하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더불어 그 어떤 회의적 해체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러한 신뢰가 삶을 현재에 충만하게 뿌리내리도록 하는 고귀한 힘임을 일러 준다. 이는 곧 우리가 사랑을 경험할 때 흔히 겪는 괴로움은 물론, 사랑을 향한 냉소주의에 대비할 수 있는 안목의 백신과 다름없다.
이렇듯 삶의 기본조건으로 사랑을 규명하는 슈미츠의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의 온기와 풍성함을 최대한 구제하려는 겸허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주로 두 사람 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의 사랑론이 다른 많은 종류의 사랑, 나아가 인간다운 삶의 조건에 대해서도 훨씬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 현상학』은 사랑을 통해 이룩하는 현명한 삶에 대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