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예술과 철학 사이
철학의 정원 1
김동규 지음 | 2009-02-15 | 352쪽 | 20,000원
고대 그리스 철학,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미학 등 예술과 철학을 아우르는 여러 사유 전통을 치열하게 연구해 온 젊은 철학자 김동규가 '사이' 개념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해명한 책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철학이란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예술을 분석하는 통상적인 '미학'(美學)이 아니었다.그보다는 예술과의 만남,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예술의 언어를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리고 예술과철학의 양자의 '사이'를 사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철학은 유용성을 따지고, 본질 자체보다 관념에만 몰두하는 사유를 배척한다.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의 근원인 그리스어와 모국어인 독일어 낱말 자체의 어원으로 들어가 어근 하나하나의 뜻에서부터 예술의 근원을 파헤친다.
저·역자 소개 ▼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이데거를 비롯한 유럽 현대 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 분야이다. 오랫동안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 연구에 매진했고, 현재는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 관심을 쏟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매체에 정기적으로 철학 칼럼을 쓰고 있다.
차례 ▼
편집자 추천글 ▼
―시짓기와 사유하기 ‘사이’에서 하이데거 예술철학의 심연을 읽다
서구 형이상학은 그 출발(플라톤)에서부터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를 배제하고, 보이지 않는 본질만을 추구함으로써, 예술을 철학에서 추방시키거나 기껏해야 사회질서에 이바지하는 이데올로기 기능을 할 때에만 그 ‘유용성’을 인정했다. 그리스 이후로도 로마·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예술은 종교를 빛내 주는 시녀 노릇을 하면서나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은 시민권을 확보하기가 어려웠으며, 형이상학의 완성자 헤겔에 이르러서는 죽음을 선고받기(‘예술의 종언’)까지 했다. 헤겔에 앞선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미(美)에 관한 판단에도 보편성이 있다며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했지만, 이 또한 주관성에 머묾으로써 진정한 복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6~1976)는 이런 형이상학 전통을 해체하며,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보존하는 경험이 진리(본질)에 다가서는 일임을 「예술작품의 근원」(1935/36)을 통해 해명했다.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은 고대 그리스 철학, 독일 관념론과 낭만주의, 현상학, 미학 등 예술과 철학을 아우르는 여러 사유 전통을 치열하게 연구해 온 젊은 철학자 김동규가 ‘사이’ 개념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해명한 책이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철학이란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예술을 분석하는 통상적인 ‘미학’(美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예술과의 만남,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예술의 언어를 철학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리고 예술과 철학 양자의 ‘사이’를 사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예술철학은 유용성을 따지고, 본질 자체보다 관념에만 몰두하는 사유를 배척한다.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의 근원인 그리스어와 모국어인 독일어 낱말 자체의 시원(始原; 어원)으로 돌아가 어근 하나하나의 뜻에서부터 예술의 근원을 파헤친다. 지은이 김동규는 그 사유의 흔적을 꼼꼼히 추적하면서, 또한 그것을 우리의 사유로 옮기기 위해 우리말에 대해서 치밀한 사유의 궤적을 밟고 있다. 존재와의 눈맞춤이야말로 진정한 존재사건이며, 시인과 사유가(思惟家)는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자각한 언어의 ‘파수꾼’이라는 시적 언어 덕분에 복잡한 하이데거의 사유가 한층 친밀하게 읽힌다.
예술작품, 세계와 대지의 투쟁 ‘사이’에서 형성된 진리의 ‘틈’
▶‘사이’ 개념으로 전통 형이상학을 비판하다
플라톤은 거짓 모방과 감상, 신비와 광기를 통해 창작하는 시인(예술가)들을 ‘공화국’에서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시인들이 철학자가 통치하는 국가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질서에 복종하는 경우에만 그 시민권을 인정하겠다는 단서를 달아서. 이후 철학자들은 철학적 사유 속에서 시학(예술)을 배제하거나, 철저히 종속시키는 위계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플라톤 이래 서구 철학(형이상학)은 실체화될 수 없는 존재의 생동적인 모습을 망각하고, 이성의 눈을 통해 ‘보여진 것’만이 존재자의 존재라고 규정한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이데거가 보기에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자를 근거짓는 또 하나의 (보편적인) ‘존재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구 형이상학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아낙시만드로스·파르메니데스·헤라클레이토스 등으로 대표되는 시원(始原)의 사유자들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함께 사유했다. 만물은 투쟁과 대립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한다며, 경험세계에 대한 형식적 통일을 우려한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철학’은 하이데거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즉 ‘존재론적 차이’(ontologische Differen)를 통해 전통 철학을 해체했던 하이데거는 1930년대 중반 이후 그의 후기 사유에서 ‘사이’(Zwischen) 개념을 핵심 개념으로 사용한다. ‘존재론적 차이’ 개념은 한마디로 존재의 실체화(결국 존재자로 이해된 존재)를 막기 위한 개념인데, 그런 차이가 “현-존재의 거기, 진리, 존재사건, 관계” 등의 의미를 갖는 ‘사이’ 개념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하이데거에게 존재는 그때그때마다 차이를 낳는 통일적인 관계, 즉 모든 사이항들을 구분하면서도 이어주는 ‘사이’의 존재사건으로 이해된다. 이후 ‘사이’는 차-이(Unter-Schied; 사이-나눔)라는 개념으로 엄밀하게 규정된다.
▶작품의 ‘충격’에서 진리를 경험한다
지은이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예술·시·언어론은 철저히 ‘사이’를 통해 해명된다.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처음 ‘사이’ 개념이 등장하는 곳은 사물·도구·작품을 비교하는 대목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진리의 실현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진리란 지성이 사물을 제대로 파악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이데거는 진리의 그리스어 단어, 즉 알레테이아를 시원적 의미, 즉 비-은폐성으로 이해한다. 이 개념에서 하이데거가 밝히려는 것은 드러난 것 배후의 ‘감추어진 것’, 즉 알레테이아에서의 ‘레테’이다. 이것은 비-은폐성과 은폐성의 ‘사이’이며, 그 ‘사이’의 ‘투쟁’이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근원투쟁’이라고 명명하고, 그 투쟁의 틈 ‘사이’에서 모든 존재자가 현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예술이란 바로 이런 진리가 작품 안으로 자신을 정립시키는 것이자, 동시에 인간이 그 진리를 작품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예술을 작품 내 ‘세계’와 ‘대지’의 ‘투쟁’으로 해명한다. 작품이 소재와 형식, 두 가지 층위로 이루어졌다 보면, 소재는 형식에 의해 결정되는 한갓 수동적인 것, 형식은 작품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능동적인 것이 된다. 이때 소재는 단지 작품의 형식에 종속되는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소재란 대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 대지는 “자신을 폐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대지는 그리스적인 의미의 자연으로서, 스스로를 숨기고 간직하며 보호하는 존재다. 대지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 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감추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 준다. 작품은 존재자를 개방시키는 세계와 자기 폐쇄적인 대지 사이의 대립·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쟁은 또한 서로의 성격을 명확히 하게 하면서, 진리의 ‘틈’(Riß)을 일으키고, 그 틈에서 작품의 ‘윤곽’(Umriß)이 형성된다. 이것은 하나의 존재사건이다. 이렇게 발생한 작품의 ‘형태’(Gestalt)는 우리에게 낯선, 그저 ‘있음’의 ‘충격’(Stoß)을 준다. 무언가가 그저 ‘있다’는 그 충격을 통해서 우리는 일상의 삶으로부터 빠져나와 존재의 진리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예술작품 ‘창작’과 ‘보존’의 감동은 근원적으로 이런 존재 경험에서 유래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인간 운명의 근거 짓기
▶‘차-이’의 존재사건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의 기초는 이름(Name)이고, 이름은 어원적으로 “알려지게 함”을 뜻한다. 명명함(Nennen)이란 그런 ‘이름 부름’이다. 그리고 부름(Rufen)은 “더 가까이 가져옴”을 뜻하는데, 이때 부름을 통해 호명된 것은 “부재 속에 간직된 현존”(『언어에로의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호명된 것은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있지는 않지만(부재하지만), 호명되기 이전과는 달리 어떤 방식으로든 없는 것은 아니기(현존하기) 때문이다. 명명함으로써 우리는 부재 속에 간직된 현존을 가까이 가져온다.
이와 같이 언어를 통해 명명되는 것은 우선 사물과 사방이다. 후기 하이데거에게 사물은 모아들일 수 있는 ‘빔’(das Leere; 空)을 뜻한다. 사물을 ‘빔’으로 파악함으로써 하이데거는 무엇인가 규정되기 이전의 풍요로운 의미의 보고(寶庫)로서 사물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런 사물이 결국 모아들이는 것, 그 비어 있음에 담는 것은 바로 사방(四方)이다. 사방이란 후기 하이데거에서 ‘세계’를 뜻하는 용어로서, 땅과 하늘 사이의 자연과 그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신적인 것들’ 그리고 존재와 무(無)의 심연을 이해하는 ‘죽을 자들’이 서로 어울리며 형성하는 통일적인 세계를 뜻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물은 의미지평인 세계를 (자기 속에 숨기고 간직하면서) 몸짓하기만 하고, 세계는 사물에게 어떤 의미를 베풀어 준다. 이렇듯 사물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숨기려 하고, 세계는 그 의미를 밝히려 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차-이의 언어이다. 차-이는 세계와 사물 ‘사이’의 중심으로서, 양자를 가르는 동시에 이어 주는 “유일한 차원”이다. 그것은 한갓 다양한 차이들의 유개념이 아니다. 모든 차이들을 낳는 근원적인 차이, 즉 ‘차이가 있다’는 사태 자체를 말한다. 이런 차-이가 먼저 존재사건으로 일어난다. 그후에 ‘추후적으로’ 세계와 사물은 규정되고, 이후 존재자들의 의미가 정해진다. 차-이는 또한 디아포라, 즉 차이들을 통일적인 하나 속에 억제·비축하는 ‘품어 냄’이기도 하다. 때문에 한 사물의 의미는 개념적으로 영구히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생성하는 차이들의 억제를 통해 잠정적으로 결정된 것일 뿐이며,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시짓기와 사유하기의 ‘사이’는 바로 이런 ‘차-이’의 존재사건, 그 “존재사건이 말하는” 근원적인 ‘언어’인 것이다.(『언어에로의 도상』 참조)
▶‘성스러움’을 노래하는 시짓기
하이데거에게는 “예술의 본질이 시”이다. 따라서 하이데거 예술론은 시론(詩論)으로 이행되며, 그 속에서 심화된다. 하이데거에게 시론은 시문학 작품을 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로부터 들은 바를 사유하는 것이자, 시적 언어를 사유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며, 양자의 ‘사이’(차-이의 언어)를 사유하는 것이다.(『언어에로의 도상』 참조)
보통 시적 언어는 연과 행이란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운율이 있고, 간결하며, 다양한 수사법을 구사하는 ‘표현’의 언어를 지칭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언어적 특성이 시어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시적 언어는 “순수하게 말해진 것”으로서 ‘놀이’와 ‘모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놀이는 첫째로 존재의 심연(Abgrund), 즉 존재의 ‘있음’에는 ‘근거(이유)가 없음’[Ab-grund]을 뜻하며, 둘째로는 대립되는 것 ‘사이’의 ‘긴장’과 ‘흔들림’을 뜻한다. 시적 언어는 시인이 존재의 심연에까지 모험함으로써, 그곳에서 경험한 것을 언어화한 것이다. 하이데거가 흠모해마지 않은 시인 중의 시인, 횔덜린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신과 인간 ‘사이’의 ‘성스러움’을 ‘사이 존재’인 시인은 언어로 담아낸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성스러움과 시인 모두 ‘사이’라는 개념을 통해 규정된다는 점이다. 성스러움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양자를 드러내는 ‘열림’이며, 시인은 신과 인간 ‘사이’의 반신(Halbgott)이다.
이와 같이 성스러움을 노래하는 시짓기는 한편에서는 ‘역사의 기반 짓기’로서 이해되며, 다른 한편에서 ‘인간 거주의 장소 짓기’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역사의 기반 짓기란 크게 두 가지를 뜻한다. 첫째 시짓기는 근원적으로 한 민족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짓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짓는 시인은 한 민족이 형성·유지되는 근거를 마련한다. 둘째 역사란 존재가 한 민족에게 보내는 민족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 운명의 순간은 횔덜린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의 결혼식”인 축제의 시간이며, 시인은 그런 축제의 시간을 시로 짓는다. 그럼으로써 그 순간을 회상하도록 만드는 시는 존재가 선사한 역사의 기반을 시원적으로 정초 짓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편에서 시짓기는 인간의 거주 공간을 짓는 것으로 이해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짓기의 본질은 “거주하게 함”이고, 거주함이란 근원적으로 인간이 사물 곁에서 사방세계를 “보살피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사물 곁에서 사방세계를 보살피도록 하는 짓기 가운데 시짓기는 가장 탁월한 짓기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움의 언어를 짓는 시짓기는 인간 본질에 알맞게 사물 곁에서 세계를 보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과 철학─‘차-이’ 속에서의 무한한 대화
▶대화를 위한 번역
하이데거에게 시짓기와 사유하기 그리고 그 ‘사이’는 모두 ‘눈앞에 존재하는 것’,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시짓기와 사유하기’라는 말을 통해 단순히 양자를 비교하기보다는, 시짓기와 사유하기가 ‘같은 것’(das Selbe)에 ‘함께 속해 있는’(공속共屬한) 관계를 드러내 보이려고 한다. 여기에서 공속함이란 차이가 배제되지 않는 동일성을 해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하이데거에게 동일성은 언제나 차이를 통해, 차이는 언제나 동일성을 통해 해명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동일성과 차이를 모두 아우르는 사이 관계, 즉 ‘차-이’로서 존재(언어)가 이해되기 때문이다.
시짓기와 사유하기 양자보다 선행하는 ‘사이’ 사건, 곧 차-이의 언어는 다름 아닌 양자의 대화 또는 번역(옮겨-놓음)의 조건이다.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방의 언어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듣기는 상대방의 언어에 대한 번역에 기초해 있다. 말하자면 대화 상대자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으려면, 상대방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번역은 언제나 차이와 동일성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 쉽게 말하자면, 전적으로 차이나는 것은 번역할 수 없고, 동일하기만 한 것은 번역할 필요가 없다. 차-이의 언어는 차이나는 언어 방식, 상호간의 대화와 번역을 가능케 하며 그것을 요구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차-이의 언어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두 탁월한 언어 사이의 탁월한 번역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시짓기와 사유하기의 대화는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행하는 번역이자 해석이다. 사유의 편에서 볼 때, 이질적인 시적 언어는 사유의 언어로 번역되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탁월한 두 언어 방식의 번역 속에서 존재의 언어가 자신을 드러낸다.
서구 형이상학은 시와의 ‘사이’를 배타적·위계적 관계로 설정하면서 성립되었고 유지되었다. 후기 하이데거에게 있어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시와의 진정한 만남, 즉 시와의 배타적·위계적이지 않은 ‘사이’ 속에서 자신의 본질을 형성한다. 후기 하이데거 사유에서 시에 대한 논의의 일차적인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시와의 투쟁, 차-이, 친밀성 등을 통해 틈이 생겨나고, 그 틈 사이의 이음새가 사유를 한정 짓는 경계선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는 유한(有限)하며, 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시짓기와 사유하기가 존재의 언어에 함께 속한다.
▶차이의 해석학
하이데거에게 현-존재인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다. 이 말은 인간이 존재의 언어를 경청하며, 그것에 화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서 관계 자체, ‘사이’ 자체인 ‘유일한’ 언어는 ‘존재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로 ‘이중 접힘’이 일어난다. 그런데 인간이 존재의 언어에 ‘응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에서 존재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로 이중 접힘이 일어나며, 거기에서 인간의 언어는 크게 ‘본래적 언어’와 ‘비본래적 언어’로 다시 접히고, 본래적 언어 내부에서도 역시 ‘시적 언어’와 ‘사유의 언어’로 접히기 때문이다. 존재의 언어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이런 언어의 ‘사이-접힘’을 견디는 일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이중적인 ‘차-이’의 ‘고통’을 품어 내는 일이다. 그래서 존재 언어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차-이’를 ‘마음’(Herz)에 품고 기다리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아마도 한 민족의 시인들과 사유자들은 가장 고귀한 방식으로 기다리는 자들 이외의 다른 누구도 아닐 것입니다.”(『들길』)
지은이 김동규는 그 가운데 특히 시짓기와 사유하기의 ‘사이’가 탁월한 말하기의 두 방식을 형성하는 언어의 틈새로서 가장 풍요로운 해석을 낳는 ‘사이’를 뜻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하이데거는 “모든 번역은 해석이고 해석하는 모든 것은 번역하는 것”(『횔덜린의 찬가 〈이스터〉』)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이런 번역론은 ‘시짓기와 사유하기 사이’가 결국 ‘사이(차-이)의 해석학’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차-이의 해석학’이란 완결된 해석, 완벽한 일치의 해석을 동경하는 고전적·낭만적 해석학이 아니라, 고갈되지 않는 풍요로운 해석을 목표로 삼는 해석학을 뜻한다. 이런 끊임없는 차이를 산출하는 해석은 “언어의 틈새”, 그 사이 접힘(차-이의 언어) 때문에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차-이의 언어로 말미암아, 종결되지 않는 대화·번역·해석이 가능해진다. 예술과 철학의 의미, 나아가 현-존재인 인간의 삶도 그 무한한 대화 위에서 더욱 생동감 있는 존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